"우읍~"
"왜 그래?"
어느 날 저녁, 수호 가족과 성일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윤아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윤아는 양변기를 붙잡고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더 이상 토할 것이 없는데도 계속 헛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했다. 수호는 옆에서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윤아의 표정에 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음날 윤아는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테스트를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 호주에 온 지 한 달 만에 윤아는 다시 또 아이를 가졌다. 수호는 아내의 둘째 임신 소식에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벌어놓은 돈은 도박으로 다 날렸고 쌓인 빚까지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물론 그 빚은 빅키가 잠시 해결해 줬지만 이제 더 이상 빅키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기에 그건 다시 상환해야 할 부채가 되어버렸다. 비자(영주권)도 없는 상황에 둘째까지 가진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수호는 대놓고 윤아에게 표현할 순 없었지만 윤아는 그가 둘째를 원하지 않는 것쯤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윤아는 빅키에게 빚이 있다는 것은 몰랐지만 얼마가 호주에 함께 머물며 수호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이제 호주에 온 이상 어떻게든 서로 맞춰가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 가족이 힘을 합쳐 나가면 뭐 크게 어려울 게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째는 윤아도 생각지 못했던 변수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또다시 시작된 임신 중독증은 윤아를 점점 메말라 가게 만들었다. 윤아는 수호와 성일이 낮에 일을 나가고 혼자 집에 남아 송이를 돌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송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윤아에게 칭얼대기만 하고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윤아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다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한 번은 수호와 성일이 집에 도착했을 때 윤아가 화장실의 변기 앞에 쓰러져 있었고 송이는 온 집안을 어질러 놓고 윤아 옆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수호는 급히 윤아를 병원으로 옮겼고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다. 윤아는 몸이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져 혼자서는 거동도 힘들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송이 데리고 한국 처가 댁에 가있는 게 낫지 않겠어? 어차피 이제 관광비자도 다 끝나가고 한국에서 둘째 낳고 몸 괜찮아지면 다시 합치자. 일단 너도 그렇고 송이도 챙겨야 하잖아. 나 혼자 있음 여기서 돈 금방 모을 수 있을 거야"
"..."
윤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호는 숨만 쉬어도 새어나가는 시드니에서 세 가족 아니 네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해야 했다. 윤아는 수호에게 힘이 되기보단 짐이 된 것 같았다. 낯선 환경에 영어도 못하고 마치 자신도 송이와 같은 어린애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나마 몸이라도 성했으면 집안 살림이라도 하겠지만 이젠 몸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잠시 떨어져 있기로 결정했다. 혼자서 송이를 데리고 갈 수 없어 결국 한국에서 장모가 호주로 넘어왔다. 수호는 장모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했던지 장모가 호주에 와서 며칠 머무는 동안에는 자청해서 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다른 약속을 핑계로 늦은 시간 가족들이 다 잠들 때쯤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전에 장인과 장모 앞에서 딸의 행복을 평생 책임지겠다고 말버릇처럼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었을 때는 그냥 낮에만 일을 했지만 가족이 생긴 이상 앞으로 들어갈 돈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이에게 들어갈 돈들을 더 벌어야 했다. 수호가 일을 내팽개치고 윤아와 송이를 돌본다는 것은 세 식구가 길거리로 나앉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연고도 없는 이곳 호주에서 두 모녀를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보모를 고용할 형편도 되지 않았다. 윤아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 가족은 다시 이별해야 했다.
윤아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계속되는 임신중독에 의한 거식증과 구토로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 갔다. 시간이 지나자 또다시 뜸해지기 시작하는 수호의 연락에 불안함이 밀려왔고 우울증까지 찾아들었다. 결국 뱃속의 아이는 그 불안과 우울을 견디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를 유산했다. 아니 아마 윤아가 견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수호씨, 이제 둘째는 이 세상에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윤아는 아픈 배를 움켜잡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수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읽지 않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눈가에선 눈물이 흘러 베개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아아 하악~ 허억”
“Oh my God, fucking me more Dingo~” (오 마이갓! 더 해줘 더 딩고!)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은 수호에게는 변함없는 진리와도 같았다. 수호는 여자의 살 냄새가 없이는 오래 견딜 수 없었다. 수호와 빅키는 또다시 서로 격렬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 정사를 끝낸 수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탁자에 손을 뻗어 핸드폰에 들어와 있는 윤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놔~ 쩝! 휴~ 뭐 잘 됐지”
수호는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 침대에서 나와 베란다로 갔다. 윤아의 유산 소식에 수호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怎么了你?有什么事吗?”(왜 그래? 무슨 일 있어?)
“没什么”(아냐 아무것도)
“你觉得你能瞒着我吗?”(넌 네가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
“…”
수호는 담배를 피우다 말고 빅키를 쳐다본다. 빅키는 담배가 들려있는 수호의 손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수호는 그 모습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수호는 알 수 없는 연민의 감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빅키도 이제 더 이상 수호를 놓아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수호는 그녀가 두려우면서도 그녀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지울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주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개 같은 운명이랄까.
빅키는 그런 수호를 항상 딩고라고 불렀다. 수호는 그 별명이 듣기 싫었지만 빅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불렀다. 딩고(Dingo)는 호주의 들개로 처음에 반려동물로 들여온 개였지만 야생에 버려져 늑대처럼 살아가는 동물이었다. 늑대는 집단생활을 하지만 딩고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였다. 빅키는 아마 그런 수호의 습성을 일찌감치 알아챘던 모양이다.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 어느 쪽 습성도 버릴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빅키는 그런 수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호도 그런 자신을 잘 아는 빅키를 한편으론 두려워하면서도 완전히 떼어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수호는 또다시 자연스럽게 윤아와 송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국으로 생활비를 보내주긴 했지만 예전보다는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매일 하던 연락도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윤아는 또다시 불안해졌다. 윤아는 수호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거란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호는 여자 없이는 지낼 수 없는 사내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억압되어 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는 법을 섹스를 통해서 해소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아니면 술이나 도박 혹은 게임 같은 다른 중독을 통해서만 해소된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끊을 수 없었다. 그런 중독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자였다. 그래서 차라리 여자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나은 것인지도 몰랐다.
윤아도 호주에서 석 달간 함께 지내며 수호의 그런 모습을 발견했다. 밤에 송이를 재우고 나면 그는 윤아와 거의 매일 밤 관계를 가졌다. 윤아는 수호가 밖에서 육체노동으로 피곤할 거라 관계를 멀리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밤이면 엄청난 에너지를 윤아에게 쏟아내고선 골아떨어졌다. 윤아는 거칠게 달려드는 그의 모습에서 그는 여자가 없으면 안 되는 남자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호가 호주에서 홀로 여자 없이 지내진 않을 거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윤아가 호주에 온 뒤, 빅키가 수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윤아는 모르는 척했지만 수호와 빅키 사이에 감도는 남녀 간의 미묘하고 애매모호한 기운을 눈치 못 챌 만큼 그렇게 둔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날 그 장면의 주연 배우는 수호와 빅키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조연이었을 뿐이었고 극 중 연기 대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아였다.
그래서 윤아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결혼 후 처음으로 한 가족이 모여서 살게 되었는데... 또다시 이별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무엇보다도 또다시 송이에게 아빠의 존재가 사라진 시간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윤아는 자신보다 송이에게 온전한 가족을 가져다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으려면 구체적인 계획과 현실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했다. 이상적이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현실의 상황을 무시하고서 지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윤아는 유산 후 몸을 추스르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온전한 가족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송이를 데리고 호주로 들어가려 계획했다.
그리고 택건도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호주행을 꿈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