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41
"미안해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윤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윤아는 아직도 수면제의 여운이 남아 있는지 눈을 천천히 껌뻑거리며 수호와 택건을 번갈아 쳐다봤다. 수호는 윤아의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엄마! 일어났어? 택건 삼촌이 잠자는 엄마를 업고 왔어, 삼촌이 엄마가 잠자는 숲 속에 공주래, 엄마는 잠을 많이 자서 이쁜 거래, 나도 오늘부터 일찍 일찍 잘 꺼야, 난 백마 탄 왕자님이 뽀뽀해주면 일어날 거야"
"택건씨 고마워요"
윤아는 송이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택건을 쳐다봤다. 잠시 뒤 의사가 와서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병원에 와서 수면제가 혈액 속으로 많이 흡수되지 않았다고 했다. 조금만 더 안정을 취하면 금방 회복될 거라고 하며 퇴원을 해도 된다는 얘기를 했다.
"택건아 우리 먼저 갈게 고마웠다"
"이제 윤아랑 송이 잘 좀 챙기고, 또 이러면 내가 가만 안 둔다, 그리고 연락 좀 받아라 제발 좀!"
"그래 알았다 조만간 다시 보자, 그때 일 얘기도 하고"
수호의 세 가족은 택시를 타고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갔다. 택건은 멀어져 가는 택시 보며 병원 앞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엇! 브라더! 여기서 뭐해요?”
“헉! 안나? 네가 여기 웬일이야?!”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아무래도 브라더랑 나랑은 뭔가 있어! 확실해 음…"
“음… 그래 아마 전생에 철천지(徹天之) 원수가 아니었을까? 큭큭”
“철천지가 뭐예요?”
“영원히 잊힐 수 없다는 그런 뜻이야”
“그래요, 틀린 말이 아니네요, 이렇게 잊을 만하면 만나니 하하, 근데 이번 생은 누가 복수를 할 차례인 건가요? 하하하”
“야! 적당히 해라!”
안나가 병원 응급병동에서 걸어 나오다 택건과 마주쳤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말아 올린 머리 아래 목덜미에는 흘러내린 땀으로 흥건했다. 흘러내린 땀과 옷에 스며든 땀으로 하얀 티셔츠 곳곳이 젖어있었다. 트레이닝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모습이 마치 집 근처에 마실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흘린 땀으로 갈증이 났는지 손에는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듯한 이온음료가 들려있었다.
"근데 넌 어디 동네 마실 나왔냐? 옷이 그게 뭐냐?"
"참! 그런 말 하실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제야 택건은 자신의 복장을 훑어봤다. 그러고 보니 급히 윤아를 데리러 정신없이 나온 터라 그도 잠잘 때 입는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랑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슬리퍼 복장이었다. 택건은 청색 티셔츠를 입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만약 둘이 머리에 흰색과 청색 띠 혹은 모자만 쓰고 있었다면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의 청군, 백군을 떠올릴 만한 모습이었다.
“넌 이 시간에 여기 웬일이냐?”
“저도 갑자기 누가 좀 아파서 큭큭큭”
“누구?”
안나는 몸이 아프다는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아아악!!”
늦은 밤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잠에서 깬 안나는 그 소리가 자신의 옆 방에서 나는 소리임을 직감했다. 가인의 비명소리였다. 방문을 두드려도 대답은 없고 비명소리만 계속 이어졌다. 안나는 급한 마음에 가인의 방문의 방문을 열려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이 안에서 잠겨있다.
“쿵쿵쿵! 가인 오빠! 문 좀 열어봐!”
“아아아악!!”
대답은 없고 비명소리만 커져갔다. 안나는 발로 강하게 문고리를 걷어찼다. 문고리가 부서져 나가며 문이 열렸다. 방안에는 가인이 두 손으로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의 그곳을 감싸고는 떼굴떼굴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가인 오빠! 무슨 일이야?"
"아아아 아악 거... 거기... 가 아악.. 너무 아.. 파"
가인은 무표정한 인상도 인상이지만 육군 장교 출신으로 엄살 같은 건 모르고 살아왔다. 웬만한 통증은 그냥 웃어넘길 정도이다. 웬만큼 아프지 않고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얼마 전 택건은 가인과 인테리어 공사 일을 할 때였다. 인테리어용 가구를 조립해서 인스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가인이 두 개의 MDF 합판을 잡은 채 고정하고 택건이 컴프레샤 에어 타카 건을 쏘았다. 그때 발사된 타카 못이 합판 모서리를 관통해 튀어나가 가인의 손바닥을 관통해 박혔다. 그때 가인은 비명소리는커녕 멀뚱히 자신의 손에 박힌 타카 못을 보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다른 손으로 못을 뽑아버렸다. 피가 줄줄 흐르는 손바닥을 옆에 놓여있던 마스킹 테이프로 칭칭 동여 감으며 지혈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택건에게 다시 타카 총을 쏘라며 합판을 다시 잡았다. 택건은 가인의 그 참을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가인이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며 뒹굴 정도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통증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안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가인을 부축해 병원으로 왔다.
"Please take off your pants and let me see that"(바지 좀 내려주실래요, 제가 환부를 확인해야 해서요)
하필 응급실에서 가인을 맞이한 당직 의사는 여자였다. 가인은 여자라곤 엄마 이후 난생처음으로 여자 얼굴 앞에 자신의 성기를 내어 놓은 채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다행히 불행인지 전혀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 남자처럼 생긴 백인 여자의사였다. 여의사는 가인 앞에 쪼그려 앉아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성기를 툭툭 건드렸다. 그때마다 가인은 찌릿한 통증에 비명을 질러댔다. 그는 참기 힘든 통증과 참기 힘든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는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It's ureter stone"(요로결석이네요)
가인은 바로 요로관 내시경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갔다.
"정말이야? 하하하"
"브라더! 웃을 일이 아녜요. 어찌나 비명을 질러대는지 전 정말 가인 오빠가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네가 가인의 생명을 살렸네 하하 근데 너 진짜 대단하다. 저번엔 흑형 둘을 니킥으로 보내버리더니 이번엔 발로 방문을 부수고 저 탱크 같은 녀석을 둘러업고 병원까지 오질 않나, 너 정말 괴물이구나"
"아니! 뭐라구욧? 숙녀한테 괴물이라뇨? 브라더 혼 좀 날래요?”
"아... 아니 미안 미안! 내가 말 실수했네"
"제가 이래 봬도 저 우리 팀에서 별명이 뷰티인 더 비스트(Beauty in the Beast)예요 큭큭큭”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아냐? 하하하”
“아니 야수 안에 아름다움!? 큭큭큭”
“푸하하 그게 뭐야?”
“뭐 팀 동료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그냥 평소에 일할 때 보면 야순데… 따로 밖에서 만나면 너무 다른 모습에 한 번씩 놀란다나 어쩐다나 큭큭, 어쨌든 브라더 한텐 야수의 모습을 드러내기 싫으니 조심하세요! 알겠죠? 한 순간에 변할 수도 있으니 하하하"
"그… 그래 조심할게, 근데 집에 둘 밖에 없어? 왜 네가 데리고 왔데?"
"마리아 언니라고 같이 사는데 교회 일이 있어서 집에 아무도 없었어요, 아! 참 브라더도 조만간 만날 거예요"
"마리아?"
"그 언니가 저희 목장 목자거든요"
"그게 뭔데? 저희 교회가 가정 교회라서 목장 별로 매주 모임을 해요. 매주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기도하고 한 주 있었던 삶도 나누고 해요"
"근데 왜 내가 그 목장이야?"
"그러게요 말이에요. 브라더랑 나랑 인연이 많나 보죠 큭큭"
안목사는 택건을 비슷한 연령대의 싱글 목자가 있는 목장에 배치했다. 마리아는 청년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미혼 여성이었다. 마리아는 택건 보다 나이가 많았다. 수호를 비롯해서 성일과 가인도 모두 그녀의 목장이었다. 지금은 수호도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성일도 한국으로 돌아간 상태라 가인과 둘만 남았는데 얼마 전 마리아의 집으로 셰어를 들어온 안나가 합류해 세 명이 되었다. 택건도 가인이 교회로 데려왔기에 안목사는 마리아의 목장 인원으로 포함시켰다. 안나는 수호와 성일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교회에 왔을 때 둘은 이미 교회를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브라더는 여기 병원에 웬일이에요?"
"친구가 아파서"
"그렇구나 브라더 배고프지 않아요?"
안나는 가인을 부축해 병원까지 오느라 힘을 많이 써서인지 허기가 밀려왔다. 택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호주의 늦은 밤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시티(시내 중심)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식당이나 상가들은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펍(Pub)이나 일부 24시간 패스트푸드점 밖에 갈 곳이 없다. 안나와 택건은 역 근처의 역전에 있는 펍으로 갔다. 펍 안에는 평일 저녁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안나와 택건은 피자를 시켰다.
"브라더 맥주 한잔 어때요?"
"야 너 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딱 한잔만! 히히”
“아… 이러면 곤란한데…”
“아이~ 또 왜 이러세요, 선수끼리, 김 빠지게 이건 우리만의 비밀로 합시다"
"큭큭 그래.. 뭐 피자에 맥주가 빠지면 좀 글치?"
둘은 맥주와 피자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피자는 금세 사라지고 한 조각이 남았다. 안나와 택건의 손이 동시에 마지막 남은 한 조각으로 향했다.
“너 먹어!”
택건은 안나에게 마지막을 양보했다. 안나는 남은 한 조각을 나이프로 잘라서 두 조각으로 나누고는 택건에게 한 조각을 건넸다.
“피자 한 조각도 나눠먹으라고 했어요 큭큭”
“하하 빵이 아니었나?”
“피자도 빵이죠”
“그래 고맙다”
"근데 브라더는 왜 교회 다니시는 거예요? 크게 신앙도 없어 보이는데… 큭큭”
“글쎄…그냥 주일에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넌?”
“그게 뭐예요? 하하 전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나도 불편하진 않아 그래서 계속 나오는 거겠지?”
“브라더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어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없는 거 같기도 하고"
"Oh! I feel the same like you" (나랑 같은데요)
"하나님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뭘요?"
"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택건은 인생의 절반을 지나왔지만 자신이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삶이 마치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떠나는 여행과 같다. 택건은 천천히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키려 할 때였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금 여기 이렇게 현재를 즐기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카르페디엠! (Carpe diem)”
“오~ 그래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즐기자!, Cheers! (건배)”
안나도 잔을 들어 택건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둘은 웃음 지으며 남은 맥주잔을 모두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