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데모도 ep42

by 글짓는 목수

“안나, 넌 하나님 있다고 믿어?”

“이젠 있다고 믿기로 했어요”

“왜?”

“저도 브라더처럼 물어볼 게 있어서요. 하나님이 없으면 물어볼 데가 없으니까 하하”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닌데”

“그럼 뭘 물어보고 싶은데?”

"부모가 왜 절 버렸는지..."

“…”


순간 택건은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잠시 동안 안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건 친부모를 만나면 물어봐야지 않을까?"

"만날 수가 없어요."


안나는 부모가 자신을 버린 이유를 알고 싶지만 친부모를 대면할 수도 할 자신도 없었다. 그때 차오를 것 같은 여태껏 억눌러 왔던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냥 그 또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냥 묻고 싶은 것을 신에게 묻고 그냥 듣고 싶은 것을 신에게 들으면 된다. 왜냐 신은 분명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영원한 아군이며 인간처럼 배신과 이별이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브라더는 결혼했어요?"

"싱글이라고 얘기했던 거 같은데, 그래서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돌싱도 싱글이잖아 효 큭큭. 한 번 하고 오신 거 아녜요? 호주 와서 신분 세탁?! 뭐 그런 거? 큭큭”

“야~! 또 시작이네. 네 맘대로 생각하세요, 넌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쏘리 브라더, 장난이에요, 뭐 요즘 한국엔 돌싱이 그렇게 많다면서요. 다른 민족들은 좀 덜한데 유독 한인들은 왜 그리 돌싱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우리 교회에도 꽤 많은 거 아시죠? 뭐 우리 목장 마리아 언니도 돌싱이잖아요 뭐 마리아 언니는 좀 특이한 케이스긴 하지만"

"그래? 여기도 그러니? 한국사람은 한국이나 호주나 뭐 별반 다를 게 없구만"

"난 그게 참 이해가 안 돼요,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을 텐데 왜 그렇게 헤어지려 안달인 건지"

"음… 사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일시적인 호르몬 분비에 의한 착시 현상이었나 보지 뭐"
"What the... 아... 아니 그게 뭐예요? 푸하하"

"사랑이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호르몬 분비에 의해 생겨나지만 현실의 삶은 자연스러운 호르몬 분비를 억제하며 살아가야 하거든, 그래서 두 가지가 같이 공존하기가 쉽지 않은 거 아닐까?"

"헐... 뭔 말인지... 브라더처럼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런 호르몬 분비가 지나치면 집착이 되는 거고 또 너무 억제하면 메마른 인간이 되어가는 거 아닐까? 마치 로봇처럼... 그런데 사랑은 없어도 숨은 쉬고 살 수 있지만 현실을 벗어나선 살 수가 없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로봇처럼 변해가는 거야. 그러고 보면 미래엔 로봇밖에 없겠다. 인간로봇이랑 기계로봇이랑 섞여있는. 큭큭"

"브라더, 이건 철학과 내분비 의학의 결합입니까? 푸하하"

"하하하 미안 내가 너무 철학적이었나, 술만 마시면 내가 좀… 이래, 큭큭"


안나는 택건의 예상치 못한 인문과학적인 답변에 혀를 내둘렀다. 안나는 택건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가인의 관계도 그런 과도한 호르몬 분비에 의한 결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근데 넌 가인이랑은 무슨 사이야? 저번에 교회에서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역시 연륜이 있으셔서 그런지 눈치도 백 단이시네요"


안나와 가인은 한 집에서 셰어로 살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가인과 집 마스터(임차인)인 마리아 언니의 권유로 지금의 교회까지 오게 되었다. 안나는 가인이 리더로 있던 교회 찬양팀에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둘은 직장에서 일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항상 함께 했다. 가인은 항상 안나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보살피며 챙겨주었다. 둘은 같은 시공간에 머무는 시간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교회에서 둘의 사이는 비공식적 연인관계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의 관계는 발전의 속도만큼이나 엇갈림의 속도 또한 빨랐다.


가인은 당시 지방에 큰 공사로 인해 자주 시드니를 떠나 있는 일이 잦았는데, 출장지에서도 틈만 나면 문자나 전화로 안나의 안부를 물으며 애정을 표현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누가 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감시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인은 그런 안나에 대한 집착으로 일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에 주변의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았다.


안나는 연방 경찰이라는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 많았고 가인은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은 안나가 대대적인 마약사범 검거를 위해 작전에 투입되어 하루 종일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직업상 기밀을 요하는 작전이 많기에 그런 사실을 사전에 가인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간이었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확인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둠 속 집 앞에서 자신의 방 창문 앞에서 서성이는 그림자를 목격했다.


“거기 누구얏? 엇! 가인 오빠!?”

“이제 오는 거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헐, 어떻게 여기에? 브리즈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너 걱정돼서 왔지”

“헐~ 어이없다. 이 시간에?”


안나는 가인의 다정하고 자상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고맙기는 했지만 조금씩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안나는 가인의 그런 행동에 반감을 드러내거나 싫은 티를 낼 때면 가인은 더 많은 물질 공세로 다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안나를 더욱더 질리게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인의 집착은 안나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안나는 가인이 한 주의 일을 마치고 시드니로 돌아오기 전날 밤 결국 전화 상으로로 헤어짐을 통보하고 말았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이별 통보에 가인은 충격과 불안에 휩싸였고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을 새우며 커져간 충격과 불안은 어느새 분노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시드니로 돌아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분노의 질주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때 수호는 그 옆에 앉아서 졸고 있다가 분노의 재앙을 함께 맞이했다.


"그날 이후부터 왠지 가인 오빠한테 죄지은 사람 같은 느낌이에요"

"그건 니 탓이 아니잖아"

"그건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도 없잖아요"

"음... 남녀의 감정이란 게... 참..."

"그래서 저 며칠 뒤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가려고요, 교회에서 부딪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집에서까지 불편한 기분으로 마주치고 싶진 않아서요"


사고 이후 둘의 사이는 예전과는 달라진 서먹한 사이로 변해 있었다. 교회에서도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적잖은 서먹함과 어색함 때문에 서로를 피해 다녀야 했다. 결국 가인은 찬양팀에서 빠져나왔고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를 피해 교회를 빠져나갔다. 가인의 그런 행동이 안나에게는 더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안나는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려 가인에게 편한 교회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고 웃으며 다가갔지만 가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등을 돌렸다. 안나는 교회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 호감에서 시작된 남녀 간의 사랑은 한순간에 분노로 바뀌었고 이제는 미움만 남기고 차갑게 식어버렸다.


"브라더, 제가 이런 얘기한 거 가인 오빠한테는 비밀이에요"

"음... 알았어. 근데 너 술 잘 마시나보다 벌써 세잔 짼데... 얼굴색 하나 안 변하네"

"웬만해선 잘 안 취해요, 그것 때문에 힘들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럴 때 있잖아요, 좀 취하고 싶을 때 취해서 뭔가 다 잊어버리고 싶고 그럴 때..."

"나랑 비슷하네 나도 취하려고 맘먹고 마시면 기억이 더 또렷해지는 그런 기분이 드는데..."

"오... 빙고! 저도 그래요, 브라더는 나랑 먼가 통하는 게 있는 거 같다니깐요"


그때였다. 안나의 등 뒤로 건장한 백인 남성 둘이 안나를 내려다보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택건의 눈에 들어왔다. 음흉한 눈빛과 미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표정으로 안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또 그때 트레인에서의 기억(23화)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Hey Anna! What are you doing here?"(헤이 안나! 뭐 해 여기서?)

"Oh~ What’s up Bros? (왠일이야?)


그리고 한 덩치가 안나의 어깨에 손을 얹히며 말을 건넨다. 안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는 반갑고 놀라운 표정으로 그들이 내미는 손을 손뼉 치듯 경쾌하게 받아쳤다.


“I'm drinking some as you see" (오~ 깜짝이야! 술 마시고 있지)

"Who is he next to you?"(옆에 누구야?)

"My brother!"(나의 브라더!)

"I heard that you don't have brother. Cousin? haha" (너 오빠 없다고 들었는데. 사촌? 하하)

"haha I guess so."(하하하 아마도)

"bullshit! Don't make me fool. he looks like Uncle"(허튼소리! 날 바보로 아나, 삼촌쯤은 되어 보이는구만)

"hahaha"(하하하하)


택건은 안나 둘이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을 그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게 되었다. 자신은 분명 그들과는 다른 세계의 존재이고 그들의 세계에 잠시 머물고 있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안나와 둘이 있을 때는 같은 세계에 머무는 듯 했지만 안나는 분명 택건과는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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