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45
"와! 진짜 사람들 장난이 아니네"
"행님! 도대체 여긴 왜 오자고 했습니까? 찡겨 죽겠는데요"
"그래도 처음으로 해외에서 보내는 새해 첫날인데 나름 해피뉴이어 기분도 좀 느껴보고 해야 하지 않겠니"
"에이~ 남자들끼리 무슨 그리고 외노자(외국인 노동자)가 그런 게 어딨습니까?"
"외노자는 사람도 아니냐?"
12월 31일 밤이었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일대는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시드니의 새해 첫날 불꽃축제는 세계적으로도 꽤나 유명해서 이 날은 수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모여 시티가 북새통을 이룬다.
택건과 가인도 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인파 속에 섞여있었다. 가인과 택건은 써큘러키(Circular Quay) 역 근처 도로에서 인파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들에 치여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오페라하우스 앞과 하버브리지의 아래의 전망 좋은 장소들은 이미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한 사전 예약자들에게만 허락된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쇼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인파 속에서 끼어 숨 막히는 압박 속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봐야 하고 누군가는 테이블에 놓인 스테이크와 와인을 마시며 낭만적인 순간을 즐긴다. 택건과 가인에게 불꽃 축제는 체험이지 감상은 아니었다. 체험은 좋은 경험도 될 수 있지만 나쁜 경험도 될 수 있다. 체험은 어떤 뉘앙스일지 모르지만 감상은 좋은 뉘앙스를 풍긴다.
택건에게 그날은 나름 의미 있는 날이었다. 삼십 대의 마지막 날이었다. 삼십 대를 어떻게 달려왔는지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이 삼십 대의 마지막을 이렇게 해외에서 맞이하게 될 거라고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인생이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와 불안이 함께 하고 있었다. 기대보다는 불안이 앞선다.
“Five, Four, Three, Two, One!”
"팡팡 파파 파방 파파파팡 "
“와아아아!
“끼야아 아!”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시계가 12시를 가리키자 폭죽과 함께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택건과 가인은 고개를 젖혀 도로 양쪽 옆으로 솟은 건물 사이에 드러난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 순간 수많은 연인들이 키스와 포옹을 하며 새해 첫날의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하필 택건과 가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죄다 연인들이었다. 왼쪽에는 흑인 남녀 둘이, 오른쪽에는 백인 남녀 둘, 뒤에는 동양 남녀 둘 그리고 앞에는 남자 둘이 키스를 하고 있다. 좀 전까진 휩쓸려 다닐 땐 눈치채지 못했는데 둘이 키스를 하는 순간 깨달았다. 둘은 동성이라는 것을. 그 둘은 다른 남녀 커플들과는 달리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Our dreams have come true, eventually” (마침내, 우리의 꿈이 이뤄졌어!)
호주는 얼마 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다. 그들이 머무는 현실 세상의 허락을 받아낸 기쁨과 환희 때문이었을까. 둘의 키스는 다른 어떤 이성커플보다도 더 찐했다. 택건과 가인은 그 장면을 코 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봐야 했다. 이런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는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바로 코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다소 거북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아직은 대한민국의 보수적인 유교사상의 때가 벗겨지지 않아서 인지 남자 둘의 혀가 뒤섞이는 모습은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면초가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것인가. 택건과 가인은 네 커플들 가운데 끼어 오도 가도 못하며 서로를 뻘쭘하게 쳐다보다 더욱 좁혀오는 압박에 결국 고개를 젖히고 하늘만 바라본다. 하늘에선 오색 형롱한 폭죽들이 천지를 뒤흔드는 사운드와 함께 검은 캠퍼스에 수를 놓고 있는 듯하다.
"엇! 저거 수호 아냐?"
"예?! 어... 어디요?"
"저 위에 레스토랑 건물 3층 창가 자리 말이야"
"저건 빅... 빅키?!"
"빅키가 누구야? 수호랑 같이 앉아있는 저 여자 말하는 거야?"
"아... 아녜요"
“뭐가 아니라는 거야?”
가인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수호와 빅키는 와인 잔을 들고 건배를 하며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빅키는 수호의 옆자리로 다가와서 그의 턱을 잡고 자신의 입술 쪽으로 돌렸다. 그 둘도 이곳의 모든 다른 연인들처럼 해피 뉴이어 키스를 했다.
"아놔! 수호 새끼 저거! 진짜 안 되겠네 정신을 못 차리는 구만"
"형님! 그냥 모른 체하세요"
"야~ 어떻게 모른 체 하냐!"
택건은 핸드폰을 들어 수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택건은 레스토랑으로 올라가서 뒤집어엎고 싶은 마음이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인파에 묻혀 불꽃 축제가 끝날 때까진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둘은 밑에서 화려한 불꽃이 터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수호와 빅키의 키스신을 감상해야 했다. 사방에서 키스를 하고 그게 뻘쭘해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곳에는 욕 나오게 하는 불륜 커플이 또 키스 중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도 여느 남녀 커플의 아름다운 키스 신이지만 다른 누구가에겐 이를 갈며 보는 더러운 장면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인간 세상과는 달리 스토리를 들려주지 않는 자연은 언제나 아름답다. 특히 남녀 관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속사정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택건은 윤아가 뭘 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윤아씨 해피 뉴 이어! 집에는 별일 없어요? 올 한 해는 좋은 일만 있길 바라요]
택건은 윤아에게 새해인사 메시지를 가장한 안부 문자를 보낸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녀에게서 다행히 답장이 날아왔다.
[고마워요 택건씨! 저희도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어요. 새해 첫날인데 좋은 시간 보내세요. 택건씨도 올해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요]
윤아의 답장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택건은 예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택건은 그 예상이 맞을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택건이 우려했던 건 혹시나 답장이 안 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또 저번처럼 윤아가 잘못된 행동을 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윤아는 송이를 재우고 멀리서 반짝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는 식탁 테이블에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며 잠들려던 찰나였다. 그때 택건에게서 온 문자를 받고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답장을 썼다.
[택건씨 고마워요! 혹시 지금 와 줄 수 있어요?........]
"아냐~ 이러면 안 돼!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
윤아는 슬픔과 술기운에 취해 충동적으로 적어 내려가던 문자를 지우고 다시 썼다. 그녀도 택건에게만은 더 이상 불쌍하거나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애 있는 유부녀가 남편의 친구한테 그것도 남편을 믿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땅까지 온 남자에게 꼬리 치는 듯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적인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과 택건에게 그 어떤 좋은 결과도 가져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서로를 더 힘들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택건에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테이블에 엎드려 멀리 창 밖 하늘에서 반짝이는 불꽃을 바라봤다. 또다시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택건은 윤아의 메시지를 받고 나자 수호에게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다. 불꽃놀이가 모두 끝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시티를 벗어나려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택건은 레스토랑으로 올라가서 수호를 잡아서 끌어내고 싶지만 이동하는 인파에 떠밀려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삐이익! 삐이익! Please move slowly along the line!"(라인을 따라 천천히 이동해 주세요)
"어랏! 안나 아니야?!"
"헐! 브라더? 엇?! 가인 오빠도 같이 있네"
"이런 데서 또 만나네"
안나는 무장한 경찰 복장을 한채 밀려든 인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불꽃축제로 경찰들이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 주변으로 쫙 깔렸다. 안나도 축제기간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혹여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주 경찰과 함께 축제 안전요원으로 동원되었다. 안나는 인파를 통제하기 위한 폴리스 라인 안에 서 있었다. 택건은 안나가 무장한 경찰복장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앳된 소녀처럼 여겨지던 모습과는 달리 경찰복장을 하고 시민들을 통제하는 모습에서 낯선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옆에서 서있던 가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아 보였다. 안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지만 가인은 아직도 서먹한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 보였다.
"오! 안나! 경찰 복장하니까 사람이 완전 달라 보이는데, 멋있는데. 우리 같이 사진 하나 찍을까?
"헐! 브라더~ 셀카봉도 챙겨 왔어요?
"그럼 이건 필수지!"
"행님! 사람들이 밀려와욧!"
"오오오~ 어떡하지? 안돼!"
“아아악!”
“아아아~~”
내리막 비탈길에 수많은 인파가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도미노가 택건과 가인 쪽으로 덮쳐오고 있었다. 가인은 뒤에서 넘어지는 엄청난 거구의 백인에 밀려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가인은 넘어지지 않으려 뻗은 손이 택건을 밀고 있었고 택건은 가인과 그 뒤에서 넘어지는 인파의 힘에 의해 몸이 기울고 있음을 직감했다.
“내 손 잡아욧!”
안나는 폴리스 라인 안쪽에서 손을 뻗었다. 가인이 먼저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안나는 힘껏 그를 잡아당겼다. 덕분에 가인은 다행히 폴리스 라인 안 쪽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안나가 다시 손을 택건에게 뻗으려 했을 땐, 그는 인파에 휩쓸려 거구 백인의 몸에 깔린 후였다. 순간 축제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곳곳에서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깔려버린 사람들은 뒤에서 계속 짓누르는 하중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안… 돼~~ 으으으아~ 뿌직 아아~악!”
택건은 위에서 위에서 짓누르는 무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자신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서서히 눈이 감기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브라~더~~!”
멀리서 희미하게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도 어두워진 화면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