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다.
저녁 메뉴였던 계란찜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비주얼과 맛, 어느 하나 잡지 못했고 솔직함을 자랑하는 우리 집 맛 평가단들은 늘 하던 대로
“아우~ 엄마, 너무 싱거워” 익숙한 대사를 읊었을 뿐.
하지만 ‘뭐 하나 걸리기만 해 봐라’ 오늘따라 영 심사가 배배 꼬였던 나는
“그럴 거믄 먹지 말든가”
죄 없는 계란찜 뚝배기를 신경질적으로 끌어와 우걱우걱 먹어치우는 장면을 연출하고. 그것도 모자라 야밤에 뜬금없이 빨래방 행을 택한 것이다. 현관에 있는 운동화란 운동화는 죄 쓸어 담아서 말이다.
덜덜덜 덜덜덜.
때가 잔뜩 낀 운동화를 실은 9,900원짜리 싸구려 구르마도 내 마음을 아는지 오늘따라 더 신경질적으로 털털거리며 내 꽁무니를 바짝 따라온다.
툭. 눈치도 없이 구르마 밖을 탈출한 운동화 한 짝을 주워 담으려니 기다렸다는 듯 혼잣말이 튀어나온다
“내가 다시는 해 주나 봐라”
뱉어 놓고 보니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요상하게도 엄마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적립되는 게 이 유치함인 것을. 현관문을 쾅 닫고 나오는 그 순간, 나는 벌써 예감했다. 한 시간 후, 현관문을 다시 열고 들어올 때의 그 말로 할 수 없는 낯 뜨거움을.
“우리 딸~ 싱거워요? 엄마가 소금 쳐 주까? 아니면 새우젓 한 스푼?”
뭐 이렇게 나이스 하게 넘어갔으면 될 일이었다. 육아서란 육아서는 죄다 줄줄 꿰고, 금쪽이를 시청하며 매주 금요일 밤 눈물로 다짐하는 엄마라면 모름지기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온통 머리로만 육아를 배운, 현실판 14년 차 엄마는 여전히 헤매는 중이다.
사실 그랬다.
요리가 아킬레스건인 나는 유난히 요리 평가에 예민한 엄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리에'도' 재능이 없는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 가득한 자격지심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른다.
유난히 아킬레스건 부자인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의기소침해질 일 천지다. 온라인에도 오프라인에도 세상엔 왜 그리 주부 9단들만 사는지. 요리 9단부터 청소 9단, 살림 9단, 요즘엔 재테크 9단까지. 1단도 딸까 말까 한 초라한 살림 실력을 자랑하는 나로서는 그냥 작아질 따름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나와 함께 사는 남자는 못하는 걸 찾기 힘든 사람이다. 운동이면 운동, 그림이면 그림,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심지어 요리도 잘해버리는 사람. 계란 후라이 그게 뭐라고, 반숙과 완숙 그 어디쯤의 환상 비주얼을 뽑아내며 프라이마저 요리로 만들어버리는 희한하기 짝이 없는 사람. 그런 남편을 보며 어느 순간부터 물음표가 생겼었다.
잠깐만. 내가 잘하는 건 뭐가 있더라.
나도 애들한테 물려준 우월 유전자가 뭐 하나 있긴 할 텐데. 생각이 안 나서 그렇지 뭔가 있긴 할 텐데.
떠올려 보면 이런 의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소개, 그중에서도 특히 ‘특기’란. 그게 참으로 난감했다. ‘특기’라면 특별히 잘하는 것인데. 가만있어보자. 특별히 못하는 거라면 숨도 안 쉬고 열댓 개를 읊을 수 있지만 자신 있게 쓸 만한 특기는 도통 생각이 안 나, 버퍼링 걸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자전거 타기’라는 취미 비슷한 것을 특기 란에 하나 급하게 적어내곤 했다. 자전거야 뭐 특별히 잘 타고 자시고 할 게 없으니까 비교적 양심에 찔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워낙 이런저런 폭넓은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앞으로 살다 보면 뭐 하나는 있겠지. 아직 내가 발견을 못한 것뿐이겠지. 설마 ‘신’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면서 하나는 장착해 주셨겠지. 양심상.
하지만 그 지난한 내 ‘숨은 특기 찾기 프로젝트’는 별 성과 없이 43년째 진행 중이다.
저 멀리 빨래방 구석에 안마의자가 보인다.
단돈 2천 원이면 일상의 피로를 싹 풀어준다는 그 묵직한 의자가 오늘따라 내 뭉쳐버린 마음도 구석구석 풀어줄 것 같다. 과감하게 결제를 하고 안마의자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겨보는데.
‘역시 자본주의의 맛이란’ 하며 몸에 힘을 쭉 빼고 열심히 거품 목욕 중인 운동화들을 바라보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렇게 찌질함이 하늘을 찔러 어딘가로 숨고 싶은 날이면 가끔씩 떠오르는 얼굴, 바로 우에노 주리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많았던 그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영화 속 주인공은 뭘 해도 애매하고 존재감 없는 주부다. 어릴 때부터 잘하는 게 딱히 없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던 그녀는 어느 날 스파이 모집 광고를 보게 되고. 얼떨결에 스파이가 되는데. 그렇게 스파이가 된 그녀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평범하게 보일 것’이라는 특명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최대한 무난한 1인으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녀. 미용실에 가서도 누구나 하는 스타일로, 식당 메뉴를 시킬 때도 최대한 흔한 메뉴를 고심 고심해서 시킬 정도다. 그야말로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러면서 초점 없던 그녀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선택한 ‘평범함’을 즐기면서.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절대 남의 눈길을 끌만큼 특별하지 말 것.
‘그런 임무라면 솔직히 나만한 적임자도 없지’ 생각하다 오늘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눈에 띄게 잘하지 않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한다니. 이 얼마나 엔돌핀 뿜뿜하는 일인가.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애매한 계란찜을 완성해 놓고 ‘임무 완벽 수행’이라며 씩 웃을지 모른다.
그러다 순간, 본분을 잊고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다가 너무 맛깔스러운 된장찌개를 완성해버리면 앞으로 자중하기로 다시 한번 다짐도 하겠지.
그렇게 열심히 평범 만들기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혹시 또 아는가?
나에게도 이런 신기방기한 ‘장기’가?
싶은 그 무언가가 어느 날 문득, 툭 하고 튀어나올 지도.
띠리 리리~ 세탁 완료를 알리는 평범한 멜로디가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하다.
대문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