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캐리 Dec 02. 2022


자책의 아이콘입니다만



어린 시절 유난히 가슴이 쿵쾅쿵쾅 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고해성사를 하고 나오는 그 순간이다.  '오늘은 무슨 잘못을 얘기하나. 동생 나 몰라라 하고 혼자 친구네 집으로 줄행랑친 거? 아니면 엄마 심부름하고 거스름돈 100원 꿀꺽한 거?'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후보들 중 몇 개를 고르고 고르다 보면 어느새 난 오래된 나무 냄새 가득한 고해성사실 안에 앉아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잘못 리스트들을 겨우 겨우 고백하고 성당을 나오는 길. 분명 그 길은 후련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곳을 나오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더 요동쳤다. 발걸음까지 빨라지면서.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들어가기 전보다 오히려 더 떨려왔을까. 그건 아마도 꿀꺽 삼켜버린 것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용기가 없어 차마 말 못 하고 나와 버린 내 진짜 잘못들, ‘동생이 너무 질투 나서 미웠어요’ ‘엄마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요’  어린 마음에도 ‘이런 건 진짜 나쁜 거니까 아무리 마음 넓은 신부님이라고 해도 나를 혼낼지 몰라’ 싶어 차마 꺼내놓지 못한 감정들. 그걸 들켜버릴 까 봐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 어쩌다 보니 나는 성당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다니지는 않는다. 그런데 굳이 성당을 찾지 않아도 그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들은 수시로 고개를 내민다.  특히나 아이를 키우면서는 더더욱 자주. 

한 때는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나라는 사람은 자격미달일까. 엄마의 그릇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 내 그릇은 겨우 간장소스 담을까 말까 한데 국을 담아보겠다고 욕심을 부린 걸까. 엄마 말고 이모, 고모로 만족했어야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건 그런 부정적 감정들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감정이 드는 걸까. 그리고 왜 그걸 또 참지 못하고 토해 내는 걸까.  엄마가 되고 가장 힘든 건 바로 그런 인정하기 싫은 나의 밑바닥을 내 두 눈으로 온전히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Photo by Anita Austvika on Unsplash


그렇게 밑바닥 체험을 하는 날이 반복되면 난 그 시절 고해성사하듯 앨범을 열어보곤 한다. 책꽂이 맨 위에 차곡차곡 쌓아둔 앨범. 의자를 밟고 올라가 낑낑 대며 내려놓은 그 속엔 아이들의 시간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뱃속 초음파 사진부터 훌쩍 커버려 마스크를 쓰고 찍은 졸업 사진까지. 떼쓰며 우는 사진마저도 사랑스럽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너무 빛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런 아이들인데.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인데. 왜 그렇게 화부터 쏟아냈을까. 기다려주지 못하고 다그치기부터 했을까. 후회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그런데 그 긴 후회의 끝엔 꼭 죄책감이라는 놈이 기다리고 있다. 얼핏 보면 반성의 또 다른 이름 같지만 이 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나는 안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도. 

죄책감을 품고 있는 엄마의 눈을 보는 아이는 ‘엄마가 나 때문에 슬프구나’ 본능적으로 알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될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는 주차위반 딱지 같은 게 바로 이 놈이라 쉽게 떨쳐낼 수가 없다. 그게 더 미칠 노릇이다.      




축구에 자책골이라는 말이 있다. 


이 자책골이라는 게 열심히 수비를 하고 있는 와중에 얼떨결에 공이 몸에 맞아 자기편 골대에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30년 전만 해도 자살골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불리기도 했었다. 이 불운한 일은 축구 말고 아이스하키 경기에서도 벌어지는데 축구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축구처럼 자책골 장본인의 이름을 또박또박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가장 마지막으로 퍽을 맞춘 상대방 선수의 이름을 임의로 기록해 놓는다고 한다.  자책골을 넣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 사람을 굳이 이름까지 남길 필요는 없지 않나 보는 것이다. 두 번 죽일 일까지 뭐 있나 하는 것이니 백번 만 번 옳은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수시로 자책골을 넣고 그것도 모자라 내 손으로 내 이름 석 자를 몇 번이고 기록까지 하는 그런 엄마다.  그 순간 아이한테 실수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후회스러운데 자꾸 되감기를 해 가며 스스로를 상처 내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말이다.      


믿고 싶지 않은 골을 넣었지만 '그때 왼쪽으로 몸을 틀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리를 요 정도까지만 뻗었어야 됐는데' 이런 네버엔딩 후회는 독이 될 것이 뻔하다. 아직 더 필드에서 뛰어야 하는 선수에게는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동료 선수들도, 응원하는 관중들도 그건 바라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쉬울 수는 있다.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툭툭 털어버려야 남은 경기 제대로 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제대로 된 골도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앞으로도 어이없는 골을 넣지 않을 거라고 장담은 못하겠다. 시시때때로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샤우팅을 하고, 눈빛으로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실수를 범한다고 해도 이제는 마음에 기록까지 해 가며 나 자신을 괴롭히진 않기로 다짐해 본다.       


앞으로도 긴긴 경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Photo by   Pixabay

                                                          대문 이미지 :    Photo by charlesdeluvio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특명 : 반드시 평범할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