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하는 그날까지한 방을 썼으니 그 좁은 방에서 온갖 유치 찬란한 대화를 나눈 사이라고 보면 된다. 야자 시간에 본의 아니게 숙면을 취하고 오는 날엔 누워도 잠이 올리 없었다. 그런 날엔 라디오를 틀어놓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BGM 삼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는데 이런 식이었다.
1번 조막만 한 얼굴
2번 찰랑찰랑 생머리
3번 긴 다리
3가지 중 딱 하나만 가질 수 있다 그러면 뭘로 할래?
둘 중 누군가 이런 영양가 1도 없는 질문을 던졌고 그게 뭐라고 우리는 세상 진지한 고민을 했다. 하~ 어떡하지. 3개 다 놓치고 싶지 않은데. 쓸데없이 심사숙고하던 우리의 선택은 모두 '2번 찰랑찰랑 생머리'였다.
그만큼 우리에게 자연산 생머리는 간절한 무엇이었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한 올 한 올 살아 움직이는 히마리 없는 그 여리여리 머리카락은.
우리 엄마는 곱슬머리를 유산으로 물려주셨다. 그것도 딸 아들 어느 하나 서운하다 할 거 없이 똑 같이 공평하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마어마한 머리숱까지도 덤으로 받았다.
어렸을 때 동네 아줌마들은 우리의 묶은 머리를 파 한 단 잡듯 한 번씩 잡아보며 "아이구야. 한 짐이네. 목 아프겄어"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어쩌다 왕삔으로 멋이라도 낸 날은 머리를 간당간당하게 잡고 있던 삔이 견디다 못해 어느 순간 로켓처럼 튕겨져 나가기도 했다.
곱슬 청일점인 남동생은 일찌감치 알았던 것 같다. 곱슬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젤 현명한 방법은 꼬부라질 틈을 주지 않는 거란걸. 당장이라도 입대해야 될 거 같은 짧은 헤어스타일을 늘 고수했고 애아빠가 된 지금까지도 "도대체 제대는 언제 하느냐"는 농담을 듣고 있다.
여동생과 난 그런 남동생이 차라리 부러웠다. 머리숱 많은 곱슬녀로 살아가기란 흡사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으니까.
일단 얘네들은 늘 들떠있는 애들이다. 원체 산만해서 안 그래도 방방 떠 있기 마련인데 숱까지 많아주니 어지간하면 '묶어줘야' 한다.
특히나 비가 오는 날엔 그냥 만화 속 빗금 친 얼굴이 된다. 아침에 아무리 매직기로 강력하게 펴 주고 나와도 앞머리는 어느새 사방으로 뻗쳐 있고 곱슬기가 활개를 쳐 왠지 도와주고 싶어지는 애처로운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머릿속엔 온통 여섯 글자. '집에 가고 싶다'로 가득 찬다. 이 꾀죄죄한 몰골을 얼른 집 안에 들여놓고 싶다 이 생각뿐이다. 부스스한 그 머리는 분위기 좋은 카페, 긴장감 도는 미팅룸, 왁자지껄한 회식자리 그 어디와도 어울리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대에 이렇게 원 없이 유전자의 힘을 보여줬으면 한 대 좀 건너 뛰었음 좋았을 텐데. 이 강력한 유전자는 쉬지도 않고 딸아이에게로 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랑 미용실에 가면 "그래도 곱슬은 아니죠? 곱슬이면 이렇게 윤이 날 리가 없죠?"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때마다 아이의 머리를 본 미용실 쌤들은
"글쎄요. 아직 몰라요. 사춘기 돼 봐야 확실히 알거든요" 이런 애매한 답을 하곤 했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윤이 나는 곱슬'로 판명이 났다.
"엄마 내 머리는 도대체 왜 이래?"
비가 간간이 내리는 요즘이라서일까. 아이가 이 말을 자주 하는 걸 보니 때가 됐나 싶기도 하다. 멤버 한 명 추가로 더 풍성해진 곱슬의 후예들은 1년에 한 번은 꼭 곱슬을 잠재우러 미용실에 가는데 그때가 됐나 보다.
어쩌다 보니 엄마, 나, 동생, 그리고 딸아이까지 3대가 같은 미용실, 같은 쌤한테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꼭 잡고 같이 갈 순 없다. 아무리 손목 스냅 좋은 헤어쌤이라도 양으로 보나 난이도로 보나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쪽저쪽으로 잔뜩 삐친 머리를 빗었다 폈다 묶었다 하는 딸아이한테
"귀엽기만 한데 뭘~ 우리 같은 머리가 얼마나 좋은데~ 이다음에 파마해 봐라. 어지간해서 파마도 잘 안 풀리지. 기름도 잘 안 지구. 나중에 엄마한테 고맙다 할 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