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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 Jun 15. 2023

없는 책도 만들어내는 책방

이상하게 영 마땅치 않을 때가 있다.

바로 '작정'하고 뭔가를 고를 때이다.


옷이고 신발이고 그냥 지나며 봤을 땐 다 괜찮아 보이는데

작정하고 팔 걷어붙이면 괜찮았던 그것들은 어디론가 다 숨어버린다.


책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기필코 책 한 권 사 들고 집에 들어가겠어 하면

들었다 놨다만 수십 번 하게 된다.

그래서 난 어지간하면 작정하고 서점을 가진 않는다. 그냥 간다.



그날도 그렇게 그냥 갔다.

츄리닝 바람에 안 감은 머리는 예의상 모자로 대충 눌러 주고,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 돌자하고 나온 길이었다. 어쩌다 보니 책방 앞이었고 온 김에 한 바퀴 돌고 갈까 하고 들어섰다.


건물 지하 한 층을 통으로 쓰고 있는 서점이지만 나에게는 편한 동네 책방이다.

"어서 오십시오"보다는 "어? 왔어? 둘러보다 가" 맞아주는 거 같은 그런 책방.

그냥 약속 시간이 남아 시간 때우러 온 건지, 화장실이 급해 들른 건지, 책을 사 갖고 나가는지 신경 쓰지 않아 줘서, 그래서 더 편한 곳이다.


그렇게 부담 없이 둘러보다 책 한 권을 집어 들게 됐고 잠깐  읽다 어느 순간 계산대 앞에 서게 됐다. 간만에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책을 들고서. 내 앞에는 어르신 한 분이 서 계셨다.

점원한테 뭔가 문의를 하고 있는 상황인 거 같았는데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들어보니 어르신은 '간 건강'에 관련된 어떤 책을 찾고 있었고

그 책은 하필 절판된 책이었던 것이다.


"저~기 중앙시장 헌책방에 갔는데

거기서 여기 가면 있을 거라고 가 보라더라고요.   

여기도 없으믄.. 아유 그럼 이걸 어디서 구한대"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꽤 안타까워하셨다.


"그러게요. 근데 인제 안 나오는 책이라서요"

점원도 난감한 얼굴이다. 소설책도 아니고 '간 건강'이라고 하니 누군가의 건강하고 관련돼 있을 거 같아 내가 다 아쉬워질 판이었다.


점원은 계산대에서 맞은편 컴퓨터로 자리를 옮기더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다.

'어쩔 수 없네요. 안녕히 가세요' 하는 듯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어르신은 애꿎은 양산 끄트머리만 만지작 만지작하며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점원이 말을 던졌다.


"어르신~ 터넷에 중고책이 있긴 하네요.

중고로 책이 5000원이고 배송비가 3000원이니까

8000원 주고 가시면 댁으로 배송해 드릴께요"


예상도 못한 전개였다. 순간 여기서 중고책 사이트도 운영했었나? 싶어 가만 보니 점원이 보고 있는 모니터 왼쪽 귀퉁이에 익숙한 요술램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알라딘 중고사이트'에서 책을 찾아보고 있던 것이다. 어르신이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를 못 하자 다시 한번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그제야

"아이구 고마워서 어째요. 내가 핸드폰으로 전화만 걸고 받지

당최 뭘 할 줄을 모르는데. 너무 고맙네요"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어르신과 눈이 마주쳐 나도 웃었다. 그제야 구경꾼에서 손님으로 돌아온 나는 계산을 했다.

카드를 내밀며 "감동이네요" 이 말이 새어 나왔다.




나오는 길 도 모르게 책방을 한번 스윽 둘러게 됐다. 분명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아이들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릴 것만 같다. 평소엔 한적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아이들로 자주 복작복작 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책을 꽁꽁 싸서 포장해 놓는 요즘 대형 서점들과는 달리 이 곳은 늘 열려 있는 곳이었다.  

언제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철퍼덕 자리 잡고 앉을 수 있는 마루가 있는 곳. 덕분에 우리 아이들도 유모차 시절부터 들르곤 했다. 어떨 땐 내 무릎 위에서, 어떤 땐 마루 바닥 위에기도 하고 책을 사들고 나오기도 하던 그런 곳이었다.


가끔 오전 시간에 들러 보면 단체 손님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먼 지역에서도 아이들이 단체로 서점 체험을 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들이 찾아오면 책방 주인장님이 직접 동화책도 읽어다. 그 후엔 아이들이 책방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고심고심해 가며 책을 고른다.

"선생님, 이 책 사도 돼요?"

"얘들아, 일루 와 봐. 여기 이 책 있어"

조용했던 책방이 아이들 목소리로 안 조용한 상태가 되지만 이 책방다운 기분 좋은 소음이다.


그런가하면 한쪽에선 기증 받은 헌 책들을 판매하기도 하는데 수익금은 책이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 새 책을 기증하는데 쓰인다.


 




나오다보니 아까 그 어르신이 책갈피 코너 쪽에서 기웃기웃하고 계신 게 보인다.

고마운 마음에 뭐라도 하나 사 갖고 나와야겠다 싶으신 모양이다. 책방에 대한 내 마음도 저 어르신하고 비슷하겠구나 생각한다.

 

클릭 한 번이면 온라인 서점이 집 앞까지 뚝딱하고 책을 대령해 주는 편리한 세상이지만

책이든, 아이들 책이든 난 웬만하면 이 곳에서 사려고 한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형 향토 서점인 이 이, 그 힘든 코로나에도 꿋꿋하게 버텨준 이 곳이 오래오래 남아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이든, 내 쪽에서만 아는 유명인이든 늘 마음속으로 잘 되길 바라게 되는 그런 사람이 있는데 나한테 이 책방은 그런 사람 같은 곳이다.


발품이 필요한 불편한 책방이지만 그만큼 정이 가는 이 곳을 앞으로도 계속 찾을란다.



10년 넘게 그렇게 들락날락했던 곳인데 간판에 있는 세 글자를 이제야 봤다.  

책방 이름 위에 정직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써 있는 세 글자

'내친구'



정이 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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