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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Apr 13. 2024

'핸지열시안'을 챙기는 남자

그 남자와 같이 살면

남편은 외출할 때마다 ‘핸지열시안'을 챙긴다. '핸지열시안'은 건망증이 심한 남편이 챙겨야 할 물건들의 머리글자를 따서 직접 만든 단어다. 핸드폰, 지갑, 열쇠, 시계, 안경. 출근할 때는 가방도 들어야 되니 '가핸지열시안'이 된다. 코로나가 끝나기 전에는 마스크까지 '가핸지열시안마’였다. 담배까지 피웠다면 ‘가핸지열시안마담라’를 챙겼을 텐데 오래전에 담배를 끊어서 천만다행이라고 남편은 말한다.


큰애 초등학교 1학년때, 나와 아이들은 원주에 살고 남편은 혼자 태백에 살 때였다. 그때는 서울에서 강릉 가는 ktx가 생기기 전이라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가는 해돋이 열차(정동진에 도착해서 일출을 볼 수 있는)가 다녔다. 주말에 원주로 온 남편이 월요일 새벽에 그 기차를 타고 태백으로 가곤 했었다. 한 겨울이었다. 그날도 새벽기차를 타고 태백으로 간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열쇠를 원주에 두고 와서 집에 못 들어간다고. 여관에라도 가서 자고 출근하라고 해도 조금만 있으면 날 밝는다며 생으로 계단에 앉아 추위를 견딘 남편.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엉덩이가 얼얼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인제에서 같이 살던 어느 날. 퇴근 후에 외식을 하기로 했는데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운동을 끝내고 관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남편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묻자 핸드폰을 학교에 두고 왔는지 핸드폰이 안 보인다고 했다. 그때 나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장면을 봤다. 남편 차 앞 번호판과 그릴 사이, 그러니까 번호판 윗면 1센티미터 정도 되는 그곳 바로 뒤 살짝 들어간 1.5센티미터 정도의 틈에 핸드폰이 옆으로 세워져 있는 것을. 핸드폰은 그곳에 얹힌 채로 20분을 달려온 것이었다(왜 하필 그곳에? 남편에게 물어보니 퇴근 전에 차바퀴를 둘러보다 갑자기 핸드폰이 거추장스러워서 어디다 뒀는데 그 게 어딘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오는 길에 급정거라도 했다면 도로에서 박살이 났을 핸드폰.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때 찍은 사진이 없어서 오늘 재연해 봄(이런 모습)




지난 수요일, 일요일에 첫째 딸 결혼식을 치른 작은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니 부조는 와그래 마이 했노 “

”나는 원래 시댁이나 친청이나 똑같이 그만큼만 해“

”야, 근데 니는 50이면 50이고 40이면 40이지 45는 뭐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분명히 두 번이나 세서 봉투에 넣었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결혼식에 45만 원을 부조한단 말인가. 부조금을 받고 기록한 조카가 실수했겠거니 생각했다. 혹시나 싶어 남편에게 물으니 자기는 봉투에 손댄 적도 없다고 했다.


기억의 필름을 돌려보던 나는 지난 토요일 아침에서 멈춤 버튼을 눌렀다. 남편과 같이 나가서 부재자 투표를 한 뒤 남편은 지인을 만나러 가고 나는 미장원에 갈 예정이었다. 부재자 투표소를 검색하던 남편이 갑자기 ”아, 지갑을 교무실에 두고 안 가져왔다, 아, 오늘 투표하려고 했더니 투표 못하겠네, 내가 오늘 점심도 사야 되는데 나 돈 5만 원만 줘 “라고 했다. 5만 원을 주려다 돈을 더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카드를 줬다. 그리고 미용실에 가면서 화장대 위에 놓인 부조 봉투에서 5만 원을 꺼냈던 것이다. 미용실 갔다 와서 다시 채워 넣어야지 생각하고는 그만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토요일 저녁. 결혼식장 주변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려서 교통통제를 할 거라는 작은언니의 톡이 왔다. 검색해 보니 결혼식장 주변이 대구 마라톤 대회로 교통 통제된다는 안내가 있었다. 다음날 일찍 출발해야겠다 싶어 가방을 미리 챙기려는데, 결혼식에 들고 갈 가방이 없었다. 정장과 구두는 따로 챙겨 오면서도 정장에 어울릴만한 가방을 안 챙겨 온 것이었다. 운동복을 넣어 매일 들고 다니는 누런 얼룩이 있는 에코백에 충전기, 화장품 샘플, 지갑, 부조봉투, 책 한 권만 넣어온 것이다. 결혼식에 에코백을 메고 갈 수도 있었고 가방 없이 갈 수도 있었지만 큰 딸이 가방 두 개를 가져오는 것으로 해결이 됐다.




 조카 결혼식이 끝난 후 점심 먹을 때 큰언니가 나에게 말했다.

”야야, 니들 부부는 어째 자꾸 닮아가냐, 니 얼굴 보는데 김서방 얼굴 보는 거 같다야, 분위기가 점점 닮아가네”


건망증 심한 남자와 같이 살면 분위기도 닮아가고 건망증도 닮아가나?





[디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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