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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n 14. 2024

내변소

내 변의사를 소개합니다

지난주 토요일, 원주에 도착해서 터미널 주변에 세워둔 차를 끌고 b를 집까지 태워다 주던 중이었다. 집이 가까워졌을 때 "막걸리 혼자 먹기 싫은데 막걸리 선생님 집에 가서 같이 먹으면 안 돼요" 하고 b가 말했다. 집에 가서 짐 정리를 해놓고 씻고 오겠다고 했다. b는 순살치킨을 한 마리를 들고 10시 넘어서 우리 집으로 왔다. 남편과 셋이 우리를 지리산으로 초대해 준 k가 기념으로 사준 남원춘향골 쌀막걸리 2병을 마시며 지리산에 다녀온 회포를 풀고 잤다.


일요일 아침, 자이글을 꺼내서 목살을 구웠다. 내가 지리산에 가 있는 동안 남편이 지인을 초대해 구워 먹고 남은 고기였다. 남편이 손님맞이를 하고 남은 쌈 채소, 오이, 김치, 쌈장, 양파, 된장국과 냉동실에 있던 새송이버섯, 단호박까지 같이 구운 목살구이로 아침을 먹었다. 냉장고에 보니 수박도 반통이나 남았길래 수박도 썰었다. 밥을 먼저 먹고 거실에 가 있던 남편에게 수박을 갖다 줬더니 한 조각만 집고는 더 안 먹겠다고 했다. 입 짧은 남편. 식탁으로 돌아와서 수박을 몇 개 집어 먹다가 배가 불러서 포크를 내려놓고 b가 수박 먹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뭐든 잘 먹는 b. 역시 잘 먹는다.


"수박 싸 줄 테니까 갖고 가"


남은 수박이 종일 입 짧은 남편과 둘이 먹기에도 컸고, 남편과 내가 관사로 나눠 가져가기도 번거로웠다.


"화장실 다녀오세요"


나는 분명 수박 싸준다고 말했다.


"응?"


"아, 화장실 다녀오세요"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면 돗자리 펴고 앉아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수박 싸줄 게 갖고 가'라는 말을 하기 전에 변의가 잠시 스쳐 지나가긴 했다. b는 큼지막한 깍두기 모양의 수박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아구아구 수박을 먹고 있었다. 웃겨서 놀라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얼른 다녀오세요"


일단 다녀왔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너무 붙어 다니다 보니 이제는 나의 변의까지 감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궁금했다. 아기가 말하지 않아도 엄마가 아기의 변의를 알아차리는 것 같은 그런 건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0.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간 그 느낌을.


"뭔가 살짝 불편해 보였어요, 선생님의 평소 장 상태로 봤을 때 이 정도 먹었으면 가고 싶을 때 됐다 싶기도 했구요"


전날 자기 전에 막걸리와 치킨, 아침에 일어나서 목살에 쌈 채소에 수박. 이 정도면 장이 활발히 움직이겠다 싶었나 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평소 내가 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을 어떻게 알아챘냐고. 나는 얼굴을 찡그리지도 몸을 비틀지도 않았고 수박 싸준다고 말할 때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있지도 않았다. 분명코.


"선생님 몸이 살짝 불편한 듯 움직이는 것을 봤어요"


이 정도면 변의사 자격을 줘야 한다. 나의 개인 변의사로 고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맑고 깨끗한 생각만 하고 살기로. 분명히 b는 들키고 싶지 않은 속물적인 내 생각까지도 읽을 것이다. 먹는데 정신 팔려 아무 생각 없어 보일 때조차도 나의 생각과 느낌을 캐치하며 호시탐탐 나를 놀려먹을 기회를 엿볼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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