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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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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n 16. 2024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약간의 욕설 포함

누군가 싸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4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자의 비명과 술에 취한 남자의 악다구니가 아파트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속에 귀에 또렷이 들어온 말.


"내가 그렇게 만만해? 씨발......"


술 취한 남녀의 싸움인가 생각하며 베란다에 나가보았다. 뭔가 많이 억울한,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자신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남자와 또 한 남자. 그리고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발악을 하는 남자의 엄마인 듯한 여자. 세 명이 보였다.


맞은편 동을 바라보니 복도로 나와서 소란의 근원지를 내려다보는 검은 실루엣 몇이 보였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빗속을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이 간간이 들려왔다. 경비아저씨가 가까이 다가갔다가 별일 아니란 듯 돌아가고, 엄마로 보이는 여자만 애를 쓰며 아들로 보이는 남자를 뜯어말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번지던 그때.


어딘가에서 천하를 호령했을 법한 장년의 여성 목소리(50대~60대 중반으로 추정)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야~이~   씨~발~것~들~아~   잠~좀~자~자~"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듯한 그 목소리에 놀라서 1000여 세대가 넘는 그 아파트에서 최소 몇 백 명은 또 잠에서 깼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소란이 멎기를 기다리며 잠을 청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통쾌한 외침이었다.


그때 엄마로 보이는 여자의 말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는 게 느껴지는 그 말 끝에 탄식과 함께 새어 나온,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한 마디.


"오~ 주여"


보증금 500에 월세 30만 원을 내고 임대아파트에 살던 어느 해 여름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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