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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민 걷기 행사에 참여하다

14호 태풍이 지나가던 날

by 당근

"인제 하면 떠오르는 동물, 인제를 상징하는 동물이 뭔지 아세요?"


진행자가 참가자들을 향해 물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이웃 학교 선생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곰, 곰 아닌가?"


"선생님, 인제 하면 기린이죠!"


"기린? 왜 기린이야?"


"인제가 기린의 발굽이라는 뜻이잖아요, 인제의 땅모양이 돼지의 발 모양을 닮아서 옛날에는 저족현이라 불렸대요. 돼지저에 발족자를 써서 저족현. 옛날에는 기린이 상상 속의 동물이었잖아요. 중국 쪽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옛날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기린을 보고 온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기린을 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린의 생김새를 설명했을 테고 그게 우리나라에도 전해 졌을 테고.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 인제의 땅 모양이 돼지 발 모양이 아니라 기린 발 모양이다, 이래서 기린린자에 발굽제자를 써서 인제가 된 거래요. 기린이 순우리말인 줄 알았는데 기린 기와, 기린 린이 한문이더라고요"


진행자의 이야기는 기린 이야기에서 기룡산과 비봉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진행자의 말이 잘 안 들렸는지 이웃 학교 선생님이 다시 내게 물었다.


"근데 소양강 건너편 산 이름이 뭐라고?"


"비봉산이요,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다 해서 비봉산. 우리가 가는 기룡산도 원래 용이 엎드린 모양을 닮아 복룡산으로 부르다가 엎드린 용보다 일어난 용이 더 낫겠다 하여 일어날 기자를 써서 기룡산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그때 우리 기룡산 가서 설명 봤잖아요. 뒤에는 용이 일어나고 앞에는 봉황이 날아다니는 곳에 인제읍이 있다, 이 말이에요"


이야기는 다시 오백 년 느티나무로 넘어갔다. 진행자의 설명을 듣던 이웃학교 선생님,


"이야, 그 느티나무는 정말 대단하다. 그 자리에서 오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다 지켜봤을 거 아냐"


"제가 오던 해부터 500살이었으니 올해는 오백 다섯 살이겠네요. 양평에 가면 천년 된 은행나무도 있잖아요. 용문사 은행나무. 그 나무는 천년동안 지켜봤으니 대단하지 않아요? 지금도 은행이 주렁주렁 달린다는데"


진행자의 이야기는 합강정의 유래로 넘어가고 있었다. 조용히 진행자의 설명을 듣게 두면 될 것을.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이웃학교 선생님의 모습에 고무된 나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합강정은 강이 합쳐진 곳에 있다고 해서 합강정이에요. 내린천에서 오는 물줄기와 서화 쪽 인북천에서 오는 물줄기가 한 군데로 합쳐지는 곳에 있는 정자라 해서 합강정. 그리고 인북천은 금강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흘러내려온 거래요. 리빙스턴교는 왜 리빙스턴교인줄 아세요? 육이오 때 북한군과 싸우다 강을 건너던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이 전사했는데, 그때 리빙스턴 장교가 다리가 있었다면 부하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 안타까워하며 다리를 놓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소식을 들은 리빙스턴 장교의 부인이 돈을 보내와서 다리를 지었대요(진행자도 이 이야기는 다소 미화된 부분이 있다고 말함)."


그러자 이웃학교 선생님이 옆에 서 있던 남편에게,


"자기야, 자기야, 이 선생님 이야기 좀 들어봐, 이 선생님 되게 박식해"


"헤헤, 박식한 게 아니라, 제가 오던 해부터 인제가 좋아서 이것저것 찾아보다 알게 된 거예요. 인제군청 홈페이지에 가면 다 나와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인제가 우리나라에서 땅이 넓기로 2위(1위는 홍천)라는 것과 인구밀도가 낮기로 전국 1위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내린천은 홍천의 내면에서 시작된 물이 기린면으로 흘러와서 내면의 내자와 기린의 린을 따서 내린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상남에는 도로변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하트폭포라 불리는 용소폭포가 있다는 것도, 마릴린 먼로가 한국 전쟁 후 미군 병사를 위문하기 위해 인제성당에 와서 공연을 했다는 것도, 마릴린 먼로의 동상이 살구미교 아래에 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갑둔리 비밀의 정원에 일출 사진 찍으러 새벽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묻지도 않았고, 인제 스피디움 전망대에서 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냐고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서 인제체육회에서 진행하는 인제군 명소 slow walk 행사를 위한 준비 운동을 함께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14호 태풍 풀라산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우천 시에도 행사를 진행한다는 메시지가 목요일, 금요일 연이어 왔다. 금요일 오후부터 폭우가 예상되니 주의하라는 안전 안내 문자가 수시로 날아왔다. 지난 주 토요일, 새벽에 인제에 도착한 남편에게 비 오는데도 걷기 대회에 갈 거냐고 물었더니 '약속했으니 가야지' 하며 일어나서 챙겼다. 집합 시간에 맞춰 8시 30분에 갔더니 9시에 개회식을 시작했다. 행사 진행 요원과 참가자들 사이에서 아는 학생도 보이고 선생님도 보였다.


올해 인제군 체육회에서 진행하는 인제군 명소 slow walk 행사는 인제체육관에서부터 시작하여 산촌박물관, 인제전통시장, 인제군청, 인제교육청, 인제성당, 인제향교, 인제고등학교, 500년 느티나무, 합강정, 리빙스턴교까지 약 5.5km를 걷는 코스였다.


작년에도 걷기 행사에 남편과 우리 학교 선생님들 몇 분과 함께 참여했었다. 그날도 비옷을 입고 백담골 특산물 직판장에서 백담사까지 7km를 걸었다. 백담사까지 이어진 영실천을 따라 걷는 길도 아름다웠지만 점심시간에 백담사에서 밥도 먹고 캠핑용 접이 의자도 기념품으로 받고 같이 걸었던 분들과 백담사 안 찻집에서 대추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렸던 기분 좋은 기억이 있다.


올해는 인제읍내의 명소를 걷는 행사라 동네 한 바퀴 도는 기분으로 남편과 함께 추억도 남길 겸(내심 올해는 어떤 기념품을 줄까 기대도 하며) 200명 선착순 모집에 일찌감치 신청했다.


2학기부터 이웃학교 선생님과 같이 가끔 퇴근 후 기룡산을 등산하고 있다. 작년 백담사 걷기 할 때도 같이 걸었던 분이라(가서 우연히 만남) 올해는 걷기 대회에 신청 안 하냐고 물었을 때 읍내를 걷는 거라 재미없을 것 같아서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선생님이 올해 말 까지 근무하면 정년퇴직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선생님, 올해가 인제 마지막이라면서요, 올해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인제 구석구석을 걷겠어요, 인제 떠나기 전에 같이 걸어요" 하며 내가 권했더니 속초에 사는 남편분도 작년처럼 함께 오신 것이고, 기관장들의 인사가 끝나고 오늘 걷게 될 코스에 관한 간단한 소개의 시간에 물 만난 고기처럼 인제에 대해 저렇게 아는 척을 했던 것이다.


다 같이 준비운동을 한 뒤 걷기를 시작하기 전에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으니 지금 기념품을 받고 집으로 가셔도 되고, 걷다가 중간에 돌아와서 기념품을 받고 집으로 가셔도 되고, 끝까지 걷고 돌아와 기념품을 받으셔도 됩니다."


태풍이 오는데 걷기 행사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온 분들이 많은 듯했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기념품 앞에 하얀 줄(모두 하얀 우의를 입어서)이 길게 생겼다. 나는 비옷을 입은 채로 우산을 쓰고 걷고 남편은 우산이 불편하다며 비옷만 입고 걸었다. 비 덕분에 원래 취지에 맞게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점점 잦아들어서 우산을 접고도 걸을만했다.


이웃학교 선생님 부부가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오손도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박인환 박물관을 지나고 산촌 박물관 앞을 지날 때 두 분의 뒷모습을 찍었다. 걷기 행사 이벤트인 사진콘테스트에 출품하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허락을 받고 사진콘테스트 오픈채팅방에 올렸다.


전통시장, 인제군청, 인제성당, 인제향교, 인제고 방향으로 걷는 곳곳에 안내요원들이 서서 길을 안내했다. 계획대로라면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합강교를 건너서 리빙스턴교 쪽으로 가야 되는데 합강교로 안내하지 않고 번지점프대(우리나라 번지점프대 중 최고 높이인)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안내를 했다. 계단으로 내려가다 앞사람을 따라 합강정으로 올라갔다. 서로 다른 색깔로 내린천과 인북천에서 내려온 강물이 합강교 아래에서 황토색으로 합쳐지는 게 뚜렷이 보였다. 합강정을 둘러보고 난 뒤 리빙스턴교 쪽으로 안내하려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비가 와서 합강정에서 행사를 마친다고 했다.


안내요원이 합강정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겠다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행사에 협조하는 마음으로 뒤에 가서 발뒤꿈치를 들고 서서 사진을 찍었다. 모르는 사람들과의 단체 사진. 누구의 폰으로 찍었는지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는. 급하게 마무리하는 게 느껴졌다. 합강정 휴게소에서 주최 측에서 마련해 준 택시를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타고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기념품으로 여행용 레디백과 보건소에서 제공한 금연치약 칫솔 세트를 받았다.


사진 콘테스트를 하는 오픈 채팅방에 쑥스러워하는 남편의 팔을 억지로 머리 위로 들게 하여 함께 하트를 만들며 찍은 사진도 남편 몰래 올렸는데. 걷기 행사가 끝나자 아무 안내도 없이 오픈 채팅방이 사라졌다. 비가 와도 체육관에서 걷기 행사 사진전을 하면서 아기자기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난생처음 박식하다는 말도 들었고, 비 오는 초가을 인제의 명소를 걷는 사진이 몇 장 남았고, 볼 때마다 걷기 행사를 떠올릴 참가 기념품이 남았고, 두고두고 이야기할 인제에서의 추억 하나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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