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해 한가위만 같아라
서재 정리는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서재라고 썼지만 사실 들어가면 정신 사나운 창고에 가까운 방이다. 아이들이 쓰던 물건을 언제 찾을지 몰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예전에 둘째가 대학 들어가던 해에 묻지 않고 고등학교 때 입던 옷들을 싹 버려서 된통 혼난 이후로 애들 물건은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이번 추석에 온 김에 어떤 걸 버려도 되는지(애들 대학교 때 쓰던 물건과 책들을 떠올리며 한 말) 좀 알려달라고 지나가듯 말했는데 둘째가 서재 정리를 하자고 나섰다.
연휴 첫째 날에는 책꽂이에서 버릴 책을 방바닥으로 던져 놓기만 했다. 9년 전 속초에 살다가 원주로 올 때도 초등학교 저학년용까지의 책을 반은 버리고 반은 지역아동센터에 문구류와 함께 갖다 준 적이 있다. 그때 버리지 못한 책들과 그동안 늘어난 책들이 책꽂이에 넘쳐났다.
예순셋 큰언니의 스무 살 적 사인이 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부터 나와 남편의 전공책과 내가 읽었던가 안 읽었던가 알 수 없는 책들, 아이들이 어릴 때 보던 책과 공책까지. 버릴 책과 공책이 방바닥에 산처럼 쌓였다. 먼지와 곰팡이가 날려서 재채기가 나왔다. 내 전공책은 다 빼냈다. 남편의 전공책은 버릴 것을 빼내고도 꽤 남았는데 아직은 모두 보내줄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날 오후에 노끈을 사러 시내로 나갔으나 연휴라 문을 연 철물점을 못 찾고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산책을 가다가 동네 분리수거장에서 박스를 봉고차에 정리하며 담는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다가가서 우리 집에 버릴 책이 많으니까 차를 비우고 오후쯤에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전화번호를 받았다. 노끈을 못 구해서 책을 묶지는 못했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우리 집은 나만 아침형 인간이다. 셋은 내가 산책에서 돌아올 때 까지도 자고 있었다(새벽까지 드라마를 보다가 도저히 잠을 이기지 못할 때라야 잠이 들었을 것이다). 혼자 캐리어로 책을 날랐다. 책 나르는 소리에 일어난 남편은 한 달 전에 다친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몸을 사렸다. 밖으로 나갔던 하이톱 생물 참고서 여러 세트가 남편 손에 들려 다시 서재방으로 들어갔다.
폐지 수거하는 어르신이 오후에 오셨다. 같이 책을 나를 사람도 수레도 없이 혼자 손으로 책을 나를 생각인 것 같았다. 어르신 봉고차가 책을 잘 실을 수 있게 우리 차를 빼고 잠시 집에 들어왔다가 밖으로 나가니 폭염(낮 최고 기온 32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책을 나르는 어르신이 한쪽 다리를 절고 계셨다. 얼른 집으로 들어와서 식구들에게 같이 나르자고 했다. 남편이 난처한 표정으로 발목이 아파서 안된다고 했다. 두 딸이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같이 날랐다. 어르신이 가시고 나서 남편이 폐지값으로 얼마를 받았냐고 물었다. 폐지값을 주지 않았으며 얼마를 줬다 하더라도 되돌려 줄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노끈으로 묶어서 분리수거장까지 갖다 버리는 수고를 덜어줬으니 오히려 감사했다.
그날 저녁에 둘째가 클리어 파일도 정리하자고 했다. 클리어파일 비닐에 낀 A4용지를 일일이 꺼냈다. 학습자료를 오려 붙여서 프린트물로 만들어 놓은 학습지도안부터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색칠 놀이 종이까지 엄청난 양이 쏟아져 나왔다. 얇은 비닐은 비벼서 그 사이에 낀 종이를 꺼내는 데 손가락에 지문이 닳을 정도였다. 박스에 담으니 6 상자 가득 나왔다. 전날 미처 버리지 못한 책들과 공책, 그리고 예전에 내가 근무했던 학교에서 받은 졸업앨범 몇 권도 박스 위에 얹었다.
그러고도 책꽂이를 차지하고 있는 남편의 교무수첩 수십 권과 졸업앨범이 남아 있었다. 이것들도 이 참에 정리하자고 했으나 그건 개인정보도 많고 하니 연휴 끝나고 남편이 혼자 천천히 정리하겠다고 하여 그대로 뒀다. 어르신께 전화를 드려서 폐지가 또 많이 나왔으니 아무 때고 오셔서 갖고 가시라 했더니 이틀 뒤 추석날 오후 늦게 시댁에 다녀온 남편과 내가 낮잠 자는 사이에 소리도 없이 말끔히 가져가셨다(어르신도 풍성한 한가위가 되셨기를).
책장을 정리하며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개근상장 뒷면을 메모지로 썼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글씨(막내 남동생에게 당근 뽑는 밭으로 오라고 매직으로 쓴 글)도 발견하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나의 짧은 일기들도 발견하고, 초임발령 때 반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것을 프린트해 놓은 것도 발견했다. 서재 정리를 하지 않았다면 먼지와 곰팡이투성이 속에서 숨도 못 쉬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한 오래된 글들을 두고두고 읽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설에는 다락방에서 잠자고 있는 아이들의 장난감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때는 덕질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드라마를 몰아보기 하느라, 늦잠 자느라 책정리를 함께하지 못한 큰애와 시험문제 출제하러 추석 연휴기간 중 1박 2일 동안 영월에 갔다 온 남편(이런 글 쓴 줄 알면 싫어할 것이나 우리 집에서 브런치의 내 글을 읽는 사람은 둘째밖에 없으므로, 둘째도 라이킷만 누르고 긴 글은 아예 읽지도 않는다 했으므로)도 함께 하자고 할 것이다. 네 식구가 다락방에 모여 앉아 장난감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버리자, 버리지 말자' 태격태격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서재 정리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충만한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들이 노트북 앞에서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는 동안 나는 거실 해먹에 누워 추석연휴 때 읽으려고 가져간 책 세 권 중 두 권을 읽었다. 추석 당일 시어머님이 계시는 서울에 갔다가 두 딸은 그곳에서 각자의 집으로 가고 남편은 추석 다음날 점심때쯤 영월로 갔다. 덕분에 연휴 마지막날 오후에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연휴에 읽은 책 두 권의 내용을 정리했다. 또 연휴 5일간 평균 9 천보를 걸었다(하루 만보 걷기를 목표로 했으나). 게다가 비아침형 인간이면서 입이 짧은 세 식구 덕분에 하루 두 끼만 간소하게 차렸는데도(그중에서 아침 두 번은 둘째가 브리치즈파스타와 브리치즈토스트를 만들어줬다)
"음~, 너무 맛있어~, 엄마 요리 천재 아냐?"
라는 둘째의 칭찬도 받았다(참고로 나는 요리 똥손임, 요리하는데 최소한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사람임). 이렇게 내 마음에 한가위 보름달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드니 남편이 설거지를 미루고 미룰 때도 화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