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능선은 핑계일지도
"예, 봉정암입니다"
나이 지긋한 남자 어르신의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왜 난 당연히 여자분일 거라 생각했을까?
"예, 저, 철야기도 예약 좀 하려고요"
말을 하면서도 철야기도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온다는 게 어색했다. 봉정암에 숙박 예약을 할 때는 예불을 드린다고 말해야 한다거나, 철야기도를 드린다고 해야 한다거나, 어느 절에 다니는 신도인지 확인한다거나, 등산객이냐고 묻는다거나... 인터넷에 있는 먼저 다녀온 분들의 글들이 그렇게 말했다.
설악산의 대피소들은 예약이 찼고 내 체력으로는 공룡능선을 하루 만에 다녀오기는 힘들 것 같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백담사에서 영시암을 거쳐 수렴동 계곡으로 올라가서 봉정암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새벽 일찍 출발해서 소청, 공룡능선, 오세암, 백담사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첫날에 비해 둘째 날 걸어야 하는 거리가 길긴 하지만 숙소 때문에 그렇게 정했다.
"성함이요"
등산객이냐고 묻지 않았고 어느 절에 다니는지 묻지도 않았다. 철야기도라는 말을 먼저 꺼낸 덕분인 것 같았다.
"ooo고요, 여자 두 명이요"
"한 사람당 만원이에요, 추우니까 패딩 꼭 챙겨 오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a(나의 등산메이트 겸 세르파)에게 봉정암에 숙박을 예약했다는 보고를 했다. 보고를 받은 a는 걱정을 했다. 무섭다고 했다. a가 무서워하는 건 공룡능선이 아니라 나의 걷는 속도라는 걸 안다. 작년에 봉정암에 다녀오던 날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영시암부터 백담사까지 거의 뛰다시피 했던 기억이 떠올랐을 게 분명하다. 봉정암 다녀온 뒤 며칠 동안 어기적 어기적 걷던 나를 부축하며 걷던 것도 생각났을 테지.
처음부터 봉정암에 가기로 한 건 아니었다. 작년 늦가을, 둘이 본격적으로 등산을 다니기 시작할 때였다. a가 오세암에 가보고 싶어 했다. 나도 영시암까지는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오세암까지는 가본 적이 없어서 오세암에 가기로 했다. 그러다 내가 인터넷으로 오세암 관련 글을 읽다가 봉정암에 식사시간에 가면 미역국을 공짜로 준다는 글을 보게 된 것이다. 오세암에서 봉정암으로 목적지가 바뀐 것은 순전히 블로그에서 본 미역국밥 한 그릇 사진 때문이었다. 정말이다. 미역국은 맛이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다. a와 나는 미역국밥을 먹으러 봉정암에 갔다. 작년 11월 11일에.
봉정암이 우리나라에 5개뿐이라는 적멸보궁이 있는 절인줄도 몰랐다. 공룡능선과 용아장성 사이 해발 1244m에 자리 잡았다는데 그 높이도 짐작하지 못했다. 봉정암에 오르는 길이 순례의 길, 구도의 길로도 불린다는 것도 몰랐다. 등산객뿐만 아니라 백담사부터 영시암,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까지 내설악 4대 사찰 순례길에 오르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몰랐다. 20km 정도의 거리가 난이도에 따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초보자의 걸음으로는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가늠도 하지 못한 채. 등산스틱도, 무릎보호대도, 충분한 물도 간식도 없이.
새벽 6시 50분에 두 번째로 출발(시간표 상으로는 첫차가 7시 출발이라 되어있음)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로 가서 신발끈을 조여매고 호기롭게 걸었다. 백담사부터 영시암까지는 길이 걷기에 너무 편하고 좋다. 영시암에서 잠시 쉬고 수렴동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갈 때는 수렴동 계곡과 구곡담 계곡의 에메랄드빛 혹은 옥빛 혹은 진초록빛의 크고 작은 담(潭)들은 그곳 이름이 왜 구곡담 계곡인지, 백담사의 이름이 왜 백담사인지 누구라도 알 정도였다. 봉정암 아래까지 이어진 계곡은 11월에도 초록을 품고 있었다.
봉정암 500미터 전에 만난 해탈고개는 급경사 돌무더기 구간이었다. 그 길을 오를 때 a가 내 배낭을 달라고 하더니 가슴 앞으로 매고 걸었다. 숨이 깔딱 넘어갈 즈음에 사자바위로 가는 곳을 알리는 표지판 앞에서 쉬었다. 사람들이 그 길에서 나오길래 얼마나 머냐고 물었더니 가깝다고 했다. 갔더니 사자바위 뒤로 뾰족하고 멋있는 바위들이 가까이 보였다. 그 바위들이 용아장성인줄도 모르고 우리는 이 바위가 사자를 닮았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인물 사진만 잔뜩 찍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거늘.
11시 30분경에 봉정암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양간을 찾아갔다. 마침 점심 공양이 시작되고 있었다. 큰 기대를 안고 미역국밥을 받아 들고 공양간 밖으로 나가 나무 벤치에 앉았다. 사골 국물은 아니더라도 참기름이나 들기름이 들어간 미역국을 기대했었다. 미역을 물에 빠트려서 소금과 약간의 간장을 넣어 끓인 듯한 미역국에 밥 한 주걱, 그리고 그 위에 김치 몇 조각을 얹은 미역국밥은 너무나도 소박한 맛이었다. 신도인지 등산객인지 묻지 않고 시주를 했는지 안 했는지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한 그릇. 먹고 나서 설거지도 스스로. 그리고 햇빛을 받으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설악산의 풍경을 감상하며 믹스 커피까지 홀짝거리니 감동과 감사와 평온이 몰려왔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어슬렁 거리다 적멸보궁 안내판을 봤다. 계단 앞에서 망설이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분들께 적멸보궁에 뭐 볼 거 있냐는 무식한 질문을 했다. '너무 좋아요, 올라가 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올라간 적멸보궁. 설악산 능선 풍경이 통유리를 통해 적멸보궁 안으로 가득 들어와 있었다. 하마터면 이 풍경을 못 보고 갈뻔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시주도 하고 a는 절도 했다. 적멸보궁에서 나와서 맞은편 사리탑쪽으로 올라갔다. 절 하는 사람들과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사리탑 뒤 전망대로 올라갔다. 그곳에 세워진 낡은 안내문을 보면서 용의 이빨(용아장성)과 용의 등뼈(공룡능선)를 찾으며 하늘이 파랬으면 더 좋았겠다 생각했다. 하늘이 회색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봉정암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안내지도판에 오세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어려운 길이라 표시되어 있었지만 미역국밥도 먹고 용아장성도 보고 공룡능선도 봤더니 용기가 솟구쳤다. 수렴동 계곡으로 가지 않고 오세암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러나 봉정암에서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그 길로 방향을 잡은 걸 후회했다.
얼음 낀 바위길과 수없이 반복되는 오르막과 내리막, 발목이 푹푹 빠지는 낙엽길을 걸으며 위험을 느꼈다. 낙엽에 미끄러져 길 옆 비탈로 굴러 떨어지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세암까지 가는 길에 혼자 걸어가는 남자 두 명을 봤을 뿐이다. 스틱을 대신할 그 흔한 나무 지팡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 오세암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오세암에서 남은 김밥과 간식을 먹을 생각이었으나 스피커에서 나오는 염불소리가 너무 커서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오세암 스피커 소리가 덜 들리는 곳까지 가서 남은 음식을 털어 먹고 부지런히 걸었다. 중간에 한 스님을 만나서 오세암으로 가느냐고 묻고는 오세암에서 나오는 스피커 소리가 너무 크다는 말씀을 드렸다. 스님께서 앞으로 스피커를 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스님 얼굴에 언짢음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진심으로 그 스피커 소음에 시달릴 새들과 나무들과 야생동물들이 걱정이 돼서 드린 말씀인데.
영시암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좀 놓였다. 영시암부터는 거의 평길이니까. 영시암에서 믹스 커피 한잔을 나눠먹으며 막차 시간을 검색한 a와 깜짝 놀랐다. 6시가 막차인데 그때 시간이 4시 57분이었기 때문이다. 영시암에서 백담사까지 3.5km. 1시간 30분 거리. 시간이 없었다. a는 긴다리를 이용하여 성큼성큼 앞에서 걸어갔다. 다리가 짧은 나는 뛰어야만 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몰려왔다. 막차를 놓치면 두 시간을 더 걸어서 내려가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럴 힘이 없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지 않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눈에 불을 켜고 걷다 뛰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둘은 더이상 걷지 않았다. 달리고 달렸다. 그러다 어둠속에서 백담사의 환한 불빛을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6시 바로 전에 막차를 탔다. 영시암에서 막차 시간을 검색하던 우리에게 막차를 탈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했던 남녀 한쌍은 결국 차를 못(안) 탔다(일부러 차를 놓쳤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우리는 오후 6시 5분에 막차(시간표 상으로는 오후 6시가 막차임)를 타고 용대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11시간 만에, 20.6km를, 47,428걸음으로.
그날 나는 사람이 하루에 47,428보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계획성이 부족한 두 사람의 무지와 무모함으로 얻은 11시간, 20.6km, 47,428 보라는 숫자는 이후 내가 등산과 트레킹을 계획할 때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번에 가게 될 두 번째의 봉정암은 첫 번째의 봉정암과는 다를 것이다. 이번에는 시주할 미역을 지고 갈 생각이다(쌀을 지고 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미 쌀 10키로 만큼의 지방을 몸에 달고 사는 사람인지라 이번에는 미역만). 그리고 첫날에는 점심을 먹고 난 후 느긋하게 설악산과 봉정암을 즐기고 싶다. 시간이 남았다고 무리하게 대청봉까지 다녀오지 않을 생각이다. 봉정암 구석구석과 봉정암을 둘러싼 설악의 풍경과 밤하늘과 스님의 염불소리와 사리탑에서의 일몰 풍경에 스며들고 싶다. 철야기도를 드린다고 말하고 온 등산객들이 어떤 모습으로 법회에 참여할지도 궁금하다. 1인당 가로 50cm, 세로 150cm의 공간이 주어진다는 봉정암 숙소도 기대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바로 밋밋하고 심심하고 투박하고 감사한 미역국밥 한 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