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암에 미역국 먹으러 가는 사람의 친구 이야기
내가 자랄 때는 집집마다 자식이 5명 넘는 건 별일도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40여 가구가 모여사는 우리 동네에만 나랑 동갑이 11명이었고 그중 여자애들이 8명이었다. 고향 친구들 대부분은 대구 근처에 살고 내가 제일 멀리 떨어져 산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초중고 동창회는 아예 안 가고 동네 친구들 모임에도 몇 년에 한 번 큰맘 먹고 가곤 했다. 어느 때부턴가 대구 가까이 사는 친구들도 다들 바빠서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들다고 했다. 우리끼리라도 일 년에 한 번은 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몇 년 전부터 m, s, 나 셋이 모여서 논다. 주로 내가 강원도로 올라오라고 부른다. 원주로 인제로. 이번에도 인제로 오라고 했다.
설악산 케이블카 타고 권금성 가보기가 m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라고 했다. 올해 여름휴가 때 1박 2일로 7번 국도를 타고 속초에 와서 권금성을 보고 싶었는데 무박으로 다녀오는 건 어떠냐며 밍그적거리는 둘째 아들(운전기사 노릇을 할 취준생)에게 썽(화의 경상도 방언)을 내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말을 듣고 가을에 s와 같이 인제로 놀러 오라고 한 것이다.
작년에도 m과 s가 금토 이틀 동안 인제에 다녀갔다(교회 다니는 s를 배려하여 일요일은 뺌). 그때도 친구 둘을 부지런히 자작나무숲, 곰배령, 인제 스피디움, 필례약수, 한계령휴게소로 데리고 다녔다. 올해는 인제에서 하루, 속초에서 하루를 계획했다. 금요일 오후에 인제에서 대승폭포, 꽃축제장을 둘러보고 토요일 새벽에 속초 신선대로 가서 일출을 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을 본 후 인제로 올 계획이었다. 화암사 주차장에서 헤드랜턴을 끼기 전 속초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나는 봤다. 올해 여름에) 보여주고 싶었다. 앞에는 속초 바다가 뒤에는 울산바위가 보이는 신선대에 앉아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함께 보고 싶었다.
그랬는데. 지난주 금요일 아침부터 토요일까지 내내 비가 왔다. 가을비답지 않게 많은 비가 쏟아졌다. 아침 7시 20분에 출발한 친구들은 점심때가 지나서 인제에 도착했다. 그 비 오는 그 와중에도 인제꽃축제장 둘러보기, 백담사 앞 순두부집에서 밥 먹기, 백담사 둘러보기, 백담사 안 찻집에서 대추차 마시기, 박인환 문학관과 산촌박물관 둘러보기, 감자네 식당 가서 닭볶음탕 먹기, 인제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집에 와서 셋이 나눠마시기를 했다. 6교시까지 수업이 있었던 나는 박인환 문학관에서 합류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친구들은 내가 짜준 코스대로 미션 수행하듯 움직였다.
토요일 아침. 신선대 일출 산행을 하지 않으니 늦게 가도 되지 않냐고 s가 물었지만 단풍객들 몰리기 전에 가야 한다며 재촉해서 7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전날 늦게 영월에서 온 남편이 운전기사로 동행했다. 오후 3시 30분까지 설악산 케이블카 오픈런해서 권금성 가기, 권금성에서 좌우상하로 들이치는 비 쫄딱 맞기, 비에 젖은 몸으로 칠성조선소 오픈런해서(11시에 문 여는 줄 모르고 가서 차에서 30분 정도 기다림) 차 마시며 몸 녹이기, 청초수물회에 가서 해전물회 섭국 성게알 비빔밥 먹기, 속초 중앙시장 가서 북적이는 사람들을 비집고 다니며 구경하다 나오며 길쭉이호떡과 붕어빵 사 먹기, 속초에서 인제로 오는 빠른 길 두고 단풍 보려고 한계령으로 넘어오기, 인제 주말 에누리장터에 가서 트로트 음악 들으며 황태사기, 관사 텃밭에서 무나물 솎아내기와 방울토마토 따기를 했다.
1박 2일 동안 시간을 쪼개서 알차게 다녔다. 그렇게 다닌 곳 중 친구 둘의 눈이 가장 반짝였을 때는 텃밭에 데리고 갔을 때다. 둘이(나까지 셋이) 텃밭에 달려들어(대구로 출발하기로 예정한 시간이 넘은 탓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도 전투적인 자세로) 토마토를 따고 무를 솎아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손으로 무 뿌리를 잘라내며 다듬으면서 "아이구 마싯겠다, 토마토 와 안 따묵었노, 이 무나물 재래기(겉절이의 경상도 방언)하면 진짜로 맛있데이, 토마토 뽑지마라 더 따무라, 출근할때 마다 한주먹씩 따 무라" 하고 연신 말하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촌아지매들이었다.
친구 둘이 다녀가고 가니 집에 먹을 게 넘쳐났다. 무김치, 열무김치, 삶은 고구마, 삶은 밤, 들깨 미역국, 우엉조림, 토마토와 등산간식이 일요일 하루 종일 남편과 먹고도 남았다. 우엉조림은 s가 작년에 m이 우리 집에 올 때 김치와 무말랭이 반찬을 들고 오는 것이 보기 좋았다며 자기도 그러고 싶어서 만들어왔다고 했다. 나머지는 모두 m이 가져왔다. 김치와 밤은 성주에 사는 m의 친정엄마가 보내준 것이고, 고구마는 m의 친정 언니가 군위에서 키운 것이라고 했다. m이 금요일 아침에 끓여 왔다는 미역국은 주말 동안 다 먹었고 고구마와 밤을 뺀 나머지 반찬은 월요일에 영월로 가는 남편에게 모두 들려 보냈다(남편이 사는 곳은 영월에서도 작은 동네라 마땅히 밥 사 먹을 곳이 없다. 그나저나 성주에서 대구로 갔다가 인제로 왔다가 다시 영월로 갔으니 반찬들도 정신없겠다).
신선대 일출산행을 못하고 권금성에서 설악산 공룡능선을 보지는 못했지만 비 덕분에 잊지 못할 가을 추억 하나가 더 쌓였다. 생각만 해도 가을비에 젖어 떨면서 돌아다녔던 기억에 한기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내 미역국과 반찬을 들고 온 친구들의 마음이 떠올라 온기가 느껴진다. 앞으로도 자주 오랫동안 그럴 것 같다.
ㅡ권금성 가는 길
ㅡ권금성
ㅡ 한계령 넘어가는 길
ㅡ칠성 조선소
<2023년 가을 단풍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