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교회가 성경적 모델이라는 시대착오적 주장에 대해

시대착오적이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

by 초덕 오리겐
참조한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상


Intro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시대착오적이고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듯한 주장을 들을 때가 참 많다. 특히나 초대교회를 전공한 입장에서, 초대교회는 모두 가정 교회였으니, 우리도 가정 교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을 때면 한숨이 나온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과연 초대교회 때의 가정 교회의 "가정"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가정"과 같은 의미냐는 거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식하게 오늘날의 가정을 초대교회의 가정으로 치환해서 해석해 버린다면 엄청난 오해를 하게 된다.


둘째로, 과연 초대교회 때의 성도들이 가정 교회를 이상적 교회의 모델로 바라보았느냐이다. 성경을 읽어보았다면 알겠지만, 실질적으로 성도들에게 가정 교회는 대안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식 속에서 교회는 "가정 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였다. 즉, 로마에 있는 교회나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로마에 있는 한 가정교회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외국의 어느 도시 속 한인 사회를 생각해보자. 운전 면허를 새로 딸 필요 없이 한국에 있는 운전면허증을 해당 도시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때, 한인 사회는 한 가정에 모이는 공동체인가? 그게 아니라, 한국인이 이 도시에 살고 서로 교류하고 있을 때 그것을 한인들의 공동체라 말한다. 그런데 교회도 비슷하다. 각 지역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해당 지역에 가면 유대인 공동체인 회당으로 모였다. 마찬가지로 각 지역에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가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해당 지역에 가면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찾았다. 바울이 보낸 편지도 한 가정 교회가 아니라 그 공동체에 보낸 것이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초대교회의 가정 교회가 성경적이고 우리가 따라야 하는 모델이라는 주장이 왜 시대착오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인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물론, 가정에서 모이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델을 당연히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성경적 모델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뿐이다.




부득이하게 가정에서 모였던 성도들


먼저, 우리는 과연 성도들이 가정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바라보았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할 거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썼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것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정에서 모이게 되었다. 즉, 가정에서의 모임은 대안적이었다.


[행2:46-47]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성전의 외정(outer courts)에서 만났다. 물론, 이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마 이때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예수를 믿는 유대인"이라고 정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겐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와 내용을 어떻게 예배에 포함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가며, 성전과 회당에서 하던 대로 예배를 드렸다. 즉, 그들의 신학 속에서 교회는 가정 교회라기보다는 성전이나 회당에 가까웠다.


좀더 설명하자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회당에 먼저 방문했다. 여기에는 안디옥 회당 (13:5, 14), 이고니온 회당 (14:1), 데살로니가 회당 (17:1-2), 그리고 에베소 회당 (19:8)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전도 방문이 아니라, 안식일마다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활동이었다. 위의 링크를 좀더 살펴보면 알겠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아침에는 회당에서 유대교식 예배에 참석하고, 안식일이 저물어 다음 날이 시작될 때(유대인에게는 토요일 저물어 일요일 시작) 가정에서 주의 만찬을 행했다.


그리고 아래의 링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러한 행위는 2-4세기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Jewish Christians continued to worship in synagogues together with contemporary Jews for centuries. Some scholars have found evidence of continuous interactions between Jewish-Christian and Rabbinic movements from the mid-to late second century CE to the fourth century CE.).


즉,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가정 교회가 아니라 성전이나 회당에서 모이는 것이 이상적으로 보았지만, 성전이나 회당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외로 모여서 성찬을 드렸다는 것이다.




회당에서 배제되다


거기에 더해, 그리스도인들은 회당과 성전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성전에서 배제되었던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해보자면, 성전이 무너진 뒤에 유대인도 그렇고 그리스도인들도 성전에서 모일 수 없었다.


회당으로부터 분리된 것 또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회당에서 전도하다가 핍박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특히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이단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에 걸쳐, 유대교 공동체는 기독교인들을 회당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바로 “비르깟 하미님(Birkat haMinim)”이라는 아미다 기도의 12번째 축복이다.


Birkat ha-Minim'(비르캇 하-미님)은 유대교의 일상 기도인 '아미다'의 열두 번째 축복으로, '이단자들을 위한 축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유대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이단자들을 향한 저주이자, 유대교와 공동체의 안정을 추구하는 기도이다. 2세기경 제2성전 파괴 이후 야브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기도에는 “기독교인과 이단자들이 한 순간에 멸망하기를 원하며, 그들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 기독교인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강제 퇴출되기 시작한다. 회당으로부터의 배제는 단순한 종교적 거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 이웃, 친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 공개적 집회의 불가능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이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로마 제국의 박해와 법적 제약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계속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된 이유는, 기독교가 “불법적 집회(illegal assembly)“로, 이질적이고 반항적인 종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황제 숭배와 로마 신상(pagan worship)을 거부했다. 그래서 네로 황제 시대(54-68 AD)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303-312 AD)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반역죄, 여러 고소된 범죄, 불법적 집회, 그리고 외래 종교 도입 혐의”로 처벌받았다.


이러한 박해 상황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경배 공간을 가질 수 없었다.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받기 전인 3-4세기까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비밀리에 모여야 했다.


또한 특기할 만한 사건이 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발표한 AD 41년 칙령은 로마의 모든 유대인들이 집회를 갖는 것을 금지했다.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로마에서 유대 회당 내 기독교인들의 선교 활동이 야기한 분쟁이 그 배경이었다. 이 칙령은 기독교인들(대부분 처음에는 유대계)도 영향을 받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회당과 공개적 집회 장소에서의 활동이 법적으로 제약되었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성전과 회당에서 모이지 못한 것은 가정 교회에서 모여야겠다는 신학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성전과 회당에서 모이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안적으로 모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처럼 가정에서 모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초대교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는 박해, 배제, 법적 제약이라는 구체적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거면 땅 파고 들어가서 지하에 도시를 만들어 모이지 싶다.




가정 교회에 대한 시대착오적 이해


그보다 더 의아한 것은, 이 사람들이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싶은 거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요즘 우리가 말하는 가정 교회는 미주와 유럽의 가정을 모델로 하는 듯하다. 1층은 응접실 겸 거실이 있고 2층과 3층에 개인 침실이 있는 그런 집들 말이다. 그래서 미주와 유럽에서는 친구를 집에 초대해서 응접실에서 식사와 차를 대접하는 경우가 흔하다. (나도 종종 그렇게 보내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주와 유럽의 가정 교회 모델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미주와 유럽의 가정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냥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는 가정 심방조차 프라이버시 문제 때문에 싫어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게다가 미주와 유럽의 가정 교회 모델은 미주와 유럽의 모델이지 초대교회의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가정은 미주와 유럽과는 또 전혀 달랐다.




고대 지중해 가정에 대하여


고대 지중해 가정은 대가족과 노예, 종들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경제·생산 단위였으며, 현대의 핵가족 중심 가정이나 소규모 모임 공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고대 가정은 생산과 생식, 돌봄, 종교, 경제 활동이 통합된 총체적 단위였다.


특히 그리스의 오이코스(oikos)와 로마의 도무스(domus)는 먼저 독립적인 경제 생산 단위였다. 그리스 가정의 기본 개념인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현대의 “경제(oikonomia에서 경제가 파생되었다)”와 달리 “가정 관리”를 의미했으며, 가정의 주된 목표는 자급자족(autarkeia)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농업 생산이 가정의 핵심이었다. 로마의 대규모 농장인 라티푼디움(latifundium)은 물론이고, 일반 가정들도 작은 토지를 경작했다. 로마의 별장 경제(villa economy)에서 종들로 구성된 ’파밀리아 루스티카(familia rustica)’가 체계적으로 농업 생산을 관리했으며, 그 조직에는 vilicus(감독자), procurator(회계 담당), monitores(감시자)가 포함되었다.



직물 생산은 가정의 또 다른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가정의 세 명의 직조공이 34주에 걸쳐 일반적인 의류(클라미스)를 생산할 수 있었으며, 연간 60,140드라크마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아테네의 번영기(기원전 5세기)에는 35,000~40,000명의 노예 여성이 직물 관련 노동에 종사했다. 로마 시대에는 이러한 직물 생산이 상업적 규모로 확대되어, 가정 내 워크숍에서 판매용 직물이 생산되기도 했다. 식품 보관과 가공도 가정의 필수 경제 활동이었다. 곡물 저장, 포도주와 올리브유 보관, 식품 방부 처리 등이 모두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가정의 경제적 안정성을 결정했다. 제노폰의 『가정 경영론(Oeconomicus)』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곡식 저장실 관리, 새로운 것을 낡은 것과 섞지 말 것, 한 해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적절히 배분하기”를 담당하도록 지시받았다.



그리고 고대 지중해 가정은 핵가족만이 아니라 대규모 다세대 단위였다. 로마 법률에서 familia는 좁은 의미로 pater familias(가정의 아버지)과 그의 권력 아래 있는 자들(potestas 아래)을 의미했으나, domus는 훨씬 더 포괄적이었다. 로마 법학자의 정의에 따르면, domus는 “손자(nepotes), 손녀(neptes), 그들의 후계자들을 포함하여 자손이나 혼인으로 연결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가정에 속한 모든 노예와 해방노예들“을 포함했다. 포메이 고고학 증거에서 보듯, 로마 가정은 평균 7~8명의 주민을 포함했으며, 이 중 약 1/3이 노예였다.


이러한 이유로 초대교회 당시의 집에는 아래와 같은 공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앙 중정(courtyard): 다목적 공간으로 요리, 일 활동, 동물 사육, 종교 제식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저장 공간: 곡물, 포도주, 올리브유, 직물, 도구 등을 보관했습니다.
•작업 공간: 직조, 수공예, 작은 규모의 제조가 이루어졌습니다.
•응접실(andron/atrium): 공식 접대와 제한된 사회적 활동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여성 구역: 여성들의 직물 작업, 아이 양육, 가정 관리가 이루어지는 영역이었습니다.
•수면 공간(cubiculum): 단순히 수면뿐 아니라 “작은 일 과제, 아이 양육, 그리고 심지어 명상”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은 현대의 “가정”이라는 개념을 훨씬 초월한 포괄적 생활·생산·종교·재생산 단위였다. 이를 단순히 “모임 장소” 또는 “거주지”로 이해하는 것은 이들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가정 공간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모임 장소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새로운 가족 관계와 상호 책임의 형성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일부 현대 신학자나 운동 지도자는 첫세기 교회의 ‘가정 중심’ 모델을 이상화하며 가정 교회를 확산시키지만, 실제로는 고대 ‘오이코스’ 개념의 사회적·경제적 네트워크, 다기능성을 오늘날 재현하기도 어렵고, 재현한다고 해서 그게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단들은 땅 팔고 집 팔게 해서 하고 있긴 하다. 이단 교회 안에서 경제 공동체가 되어 사회 생활도 교회 구성원들과만 하게 만들고 말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 교회 방식을 그때로 따른다면 이단성이 느껴질 수밖에 없긴 하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가정 교회 운동이 대체로 가정에 대해서 시대착오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델 위에서 구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가정 교회의 실제 예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초대교회 가정 교회의 실제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다. 바로 1920년대에 발견한 듀라 유로포스 교회이다. (244-245년에 도시가 함락되면서 로마군이 서쪽 성벽을 강화하기 위해 이 지역을 흙으로 매립했는데, 이로 인해 건물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었다.) 듀라 유로포스는 콘스탄티누스 칙령으로 인한 대규로 교회로 변모되기 전 로마 제국 박해 시대의 가정 교회이자 가장 오래된 기독교 건물이다.


이 교회는 사유지인 집을 교회로 개조한 것으로, 동시대 유대인 회당과 비교하면 아쉽게도 좀더 작다. 뭐, 듀라 유로포스를 건축했을 당시 유대인 인구가 기독교 인구보다 많았을 것이기도 하고, 또 로마 제국의 기독교 금지 정책 때문에 작은 공간에서 비밀리에 모이는 게 안전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가정 교회의 건물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듣는 가정 교회라는 게 초대교회의 가정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한 이상한 나라 속 교회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위키 링크를 보면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니까 그냥 집이라기보다는 예배당과 사택이 있는 교회가 떠오른다.


사유지 가옥을 교회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작은 방 사이의 벽이 철거되어 큰 집회실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는 종교적 용도로 더 영구적으로 개조된 "교회 가옥"으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옥스퍼드 기독교 예배사》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더 큰 방 중 하나는 세례당으로, 또 다른 하나는 성찬식 거행을 위해, 세 번째는 예비 신자 교육을 위해 사용되었다".
Church_dura.jpg


듀로 유로포스 교회는 세 번의 개축이 이루어졌는데, 169년까지 제단과 설교단, 벤치를 설치했다. 209-211년까지는 연단을 확대하고, 출입구를 신설했다. 244-245년에는 예배실(공동체 집회를 위한 큰 방)과 현관을 확대했다. 이 가정 교회의 특징은 세례실과 예배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 교회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위해 의도적으로 개조된 특수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 교회와 듀라 유로포스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 사람들은 아래의 링크들을 참조하도록 하자.

https://www.journals.uchicago.edu/doi/10.1086/730388




우리 집에서 밥 먹고 헤어지는 게 성경적 가정 교회라고?


듀라 유로포스의 발견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바로, 우리가 말하는 성경적 “가정 교회”라는 용어가 정말 적절한 용어인가이다. 이 건물은 확실히 “신자들의 가정”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개조된 공동 소유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 교회와 역사 속 가정 교회 차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거다.


우리가 가진 고고학적 증거는 초대교회의 가정 모임이 단순한 소규모 친교 모임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가진 조직화된 신앙 공동체가 점진적으로 전용 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이었음을 시사한다.


애초에 초대교회 당시의 그리스와 로마의 집(오이코스와 도무스)들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가정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집들은 단순한 개인의 집이 아니라 공동체 공간이었다. 그런데다 실제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 교회는 프라이버스가 넘치는 개인 공간인 가정을 개방해서 예배 드리는 게 아니라, 개인 소유의 집을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개축하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도 가능하다. 듀라 유로포스는 가정 교회가 아니었고, 초대교회 당시에는 대체로 가정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교회나 지하 교회들이 사용되어 왔지만, 성경이 쓰여졌을 때는 가정 교회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집(오이코스와 도무스)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위에 설명했다.)




정리하며


나는 오늘날 성경적 가정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이 매우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제 초대교회 당시의 가정 교회 모습은 집을 교회로 개조한 교회였으며, 심지어 그리스의 오이코스와 로마의 도무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집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오이코스와 도무스에는 응접실과 예배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가정에서 모이는 것은 성경 시대에서도 이상적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안적이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가정에서 모였을 뿐이다. 원래는 성전이나 회당에서 모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상적이었다.


듀라 유로포스를 보면, 회당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회당보다는 작지만 회당과 비슷한 가정 교회에서 모였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 가지 못하자, 그리스도인들만의 회당을 만든 것이다.


사실, 성전과 회당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이나 회당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델(가정 교회)을 만들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성전과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이라는 모델을 가지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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