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0년 6월 24일 오후 3시 즈음
로그 #003 - 이 미친 세상의 장르
4130년 6월 24일 오후 3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미친놈이면 정상인 놈이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그래 안다. 어떻게 아냐고? 이게 지금 내 처지니까.
나는 여자가 있던 세상에서 살다가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떨어졌다. 마치 원뿔이 삼각형 나라로 떨어진 느낌이다. 즉, 3d 세상에 살던 사람이 2d 세상으로 떨어진 거 같다.
여자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하려고 해도 상대방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 나는 점점 광신도로 여겨질 뿐.
4220년 12월 24일 오후 3시 10분 즈음
지금 내 일대기를 적으면 어떤 장르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누가 보면 SF라고 하지 않을까? 실제로 지금 나는 우주에서 우주 로봇 괴수와 싸우다가 나폴레옹이라는 작은 행성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우주선, 정확히는 기동 전술기를 타고 우주 로봇 괴수와 싸우는 파일럿이 내 직업이다. 뭐, 지금은 불시착하면서 기동 전술기가 망가져서 움직이지 않지만.
아니면 판타지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이 세상에서는 마법 같은 걸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거의 온 우주에 인터넷 네트워크인지 생체 네트워크인지가 연결되어 있는데, 각 사람은 이것을 통해서 인터넷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대충 우리는 ‘시스템’이라고 불렀는데, 시스템에 접속해서 포인트만 내면 젊어지거나 떨어진 팔을 붙이거나 할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거의 전능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포인트만 주면 쉽게 할 수 있다.
뭐, 전쟁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삼국지나 은하영웅전쟁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 우주 로봇 괴수들이 판치는 우주 외곽, 그리고 우주의 중화를 가르는 제국과 여자주의 연합까지, 이거야 말로 위촉오의 삼국지 아닌가? 다만 우주 로봇 괴수들은 인류나 우주를 지배할 생각은 없는 듯하고, 그렇다고 평화롭게 둘 생각도 없는 듯하다. 마치 군대에서 편하게 놔두면 사고 친다는 생각으로 이리 뺑이 치게 만들다 또 저리 뺑이 치게 만드는 행보관의 느낌으로 공격해온달까?
하지만 로맨스 소설은 아니다. 놀랍게도, 한국의 거의 모든 드라마에는 로맨스가 가미되어 있지만 내 삶에 로맨스는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21세기를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별세계라고 할 수 있었지만, 어이없게도 여자를 만나는 건 할 수 없었다. 우주선을 타거나, 로봇 괴수들과 싸우면서 마법 같은 일들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여자를 만날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그나마 지금 내가 대화할 수 있는 작자는 스스로를 ‘위저드’라고 부르는 이상한 놈 하나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실제로 볼 수는 없고 통화만 할 수 있었다. 자칭 해커라고 하던데, 무려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는 놈이었다. 나랑 처음 통화하게 된 것도 시스템을 해킹해서 내게 직접 연락을 해온 거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시스템을 해킹하는 건 보안이 강력해서 앞으로는 웬만해선 내 시스템에 직접 접속해서 연락하지는 못할 거라고 한다. 그래서 이후로는 기체 안에 굴러다니던 기계 고양이를 통해 연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