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당근 Jun 04. 2024

잘못된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교회의 정치, 적법한 절차, 그리고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나안 성도

Intro

온라인에서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가나안 성도들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온라인이 아니더라도 목사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이야기한 경우도 참 많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사람들이 사회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좀더 정확하게는 사회와 인간, 집단,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물론 모든 가나안 성도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회와 인간, 집단, 그리고 규칙을 잘 이해하지 못해 교회를 오해하고 떠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불만이 참 많지만, 왜 교회에서는 저 사람들을 상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을까 거꾸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회의 정치

내가 아는 한 분은 전 세계를 다니며 사업을 하던 분이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인망도 있었던 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거다. 가는 교회마다 리더 역할을 맡지만, 1-2년을 못 버티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분과 친분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참 좋은 분인데 이유가 뭘까 싶었다. 교회에서 그분과 같이 계시던 분에 따르면, 언제나 갑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 교회의 정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들었다.




교회의 정치 시스템

가톨릭 신학교에서 교수님에 따르면, 가톨릭의 정치 시스템은 봉건제에 가깝다. 평신도가 의견을 낼 수 있었던 것도 극히 최근인 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 때부터이다. 원래부터 가톨릭은 성직자 간에 계급과 위계가 있어서 위에서 정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물론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목적이고, 정치 시스템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는 대의 민주주의, 또는 간접 민주주의를 따른다. 즉, 나 혼자 똑똑하고 나 혼자 잘났다고 모든 사람이 내 말을 따르는 게 아니다. 당회, 제직회, 공등의회라고 하는 투표 시스템이 존재한다.


즉,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듣고,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상해 "교회가 멍청하다"며 떠나는 것은 이러한 간접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사람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의견에 반드시 동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성도에게는 동의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자기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가 멍청하고 부패했다며 교회를 떠난 사람들 말이다.




멤버십

게다가 교회에는 멤버십 제도가 있다. 사실 이건 어디에나 있는 거다. 예를 들어서, 중국에 있는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할 순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어느 커뮤니티에 가든 회원과 비회원, 준회원 제도가 존재한다. 회원, 곧 정회원은 교회의 규칙을 지키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가입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가입했다 해도,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치리될 수 있다. 카페를 예로 들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강퇴될 수 있는 거다. (물론 교회는 카페에서 강퇴하듯 교회를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교회 방문만 가능한 준회원 형태로 받아주곤 한다.)


개그맨 사회에서 정회원은 수입의 일부 퍼센트를 내야 한다. 이게 참 합리적인 것이, 한 달에 100만 원 버는 사람에게 100만 원은 너무 크고, 한 달에 10억 버는 사람에게 100만 원은 너무 작기 때문이다. 워낙 소득 격차가 커서 수입의 일정 퍼센트(1%)를 내는 걸로 했다. 물론, 개그맨의 경우에는 경조사 외에는 돈이 나갈 일이 많지 않긴 하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 유지비와 직원 사례비 등이 꽤 많이 든다.)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것은 좀 유연하다. 교회의 규칙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세례를 받은 뒤 교회에 등록하면 등록 교인이 된다. 그러면 정회원이 된다. 그리고 공동의회에서 투표를 할 수 있다.


물론 교회를 1년 동안 안 나왔고, 헌금도 안 냈으면 정회원이라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교회를 10년 동안 안 나왔는데 갑자기 와서 투표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담임 목사를 정하는 것부터 예결산을 확정하기 위해 투표하고 의견을 내기 위해서는 정회원이 되어야 한다.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갑자기 사람을 모아 투표할 때 나타나서는 "교회 예산의 절반을 나에게 줘라" 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겠는가.)


교회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좀 까다롭다. 제직회가 바로 이것이다. 제직회에 들어가게 되면 좀더 많은 회의가 있고, 좀더 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해야 한다.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교회 운영을 위해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운영자가 되는 것은 보다 까다롭다. 당회에서 의견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교회 운영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이 교회의 당회이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제직회와 공동의회의 의견을 묻게 된다. 대통령 탄핵을 생각해보자. 갑자기 국회의원들이 탄핵을 주장한다고 탄핵이 되는가? 국회의원의 과반수가 탄핵을 동의한다고 해도, 결국 전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투표로 의견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제직회와 당회에 참여할 수 있는가? 간접 민주제가 여기서 드러난다. 1년에 두 번 공동의회 하는 것도 성도들이 귀찮아 하는데, 매주 또는 매달 선거나 투표, 회의를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공동의회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이 당회 또는 제직회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당회라고 하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기본적인 걸 모르는 사람이다.


(투표를 통해 선출된) 신분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든 교회를 좌우하고 싶은 사람들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내 의견을 왜 받아주냐"라고 징징대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참 많다. 아니, 아직 신분이 준위원 또는 정회원에 불과한데 어떻게 운영을 시키겠는가 말이다. 교회 운영에 참여하고 싶다면, 투표를 통해서 제직이나 당회원 같은 적합한 신분을 얻어야 한다.


재미있는 게 뭔지 아는가? 교회라는 곳처럼 저런 신분을 얻기 쉬운 곳이 없다는 거다. 이단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교회에 침투해서 1-2년 사이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이단으로 끌고 간다. 이처럼 좀만 열심히 하면 쉽게 인정 해주고 쉽게 신분을 주는 곳이 교회라는 곳이다. 세상과 다르게 학벌이나 재산은 크게 중요하지도 않다. 그런데 사람들이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건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참 교회에 불만이 많다는 가나안 성도들과 이야기를 많이 해보면, 교회에서 존경받을 만큼 열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교회가 비상식적이라고 하기에는, 이 사람들이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거다.




예산, 적법한 절차를 따라

적법한 절차를 따르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교회가 부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적법한 절차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교회 예산을 마음대로 쓰는 목사?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나와 친한 한 성도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목사가 교회 돈을 마음대로 쓴다는 거다. 왜 그러냐 물었더니, 목사가 말하기를, 자기가 말하면 교회 예산을 마음 대로 탈 수 있다거다. 그러면서 목사 욕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참..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교회를 모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 봉사만 해보았어도 이런 말은 안 했으리라 싶었다. 주일학교 부장 선생님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역자가 원하는 모든지 다 지원하겠다는 것그것이다. 예산도 사역자가 원하는 대로 다 쓰게 해준다는 거다. 그런데 이걸 잘 이해해야 한다.


나에게도 비슷한 부장 선생님들이 참 많았다. 내가 이야기만 하면 죄다 예산을 지급해주기도 했다. 때로는 예산에 없는 것도 다른 예산에서 끌어다 사용하기도 했다. -> 이제 이해가 가는가?


주일학교는 보통 한 달에 한 번씩 월례회의가 있다. 거기서 예산에 대한 회의를 한다. (물론 회의가 귀찮아서 도망치는 교사들도 꽤 있다.) 회계가 1년 예산에 대비한 매월 결산을 말하는데.. 보통은 이 회의 때 교역자가 다음 달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 전에 전년도에 1년 계획과 예결산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회의도 진행한다.) 그런데 갑자기 월례회의 때 교역자가 전에 이야기하지 않은 큐티 교재를 이야기한다고 해보자. 부장과 교사들이 교역자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면, 회의를 거쳐서 교재 예산이나 예비비 등에서 지출을 하도록 결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역자가 예산을 마음대로 쓰는 방법이다.


사역자는 당회와 재정부에 예산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당회와 재정부는 이미 정해져 있는 예산안에서 사역자가 원하는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만약 당회와 재정부가 예산안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다면? 그러면 사용할 수가 없다. 승인한다면?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당회에서 결재가 났어도, 제직회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공동의회에서도 문제를 삼을 수가 있다. "사용이 이상한데요? 왜 이렇게 심방비가 많이 들었냐. 예산안에 비해 두 배가 들지 않았느냐." 이렇게 따질 수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게 계속 이어진다면..? 목사가 재신임 투표를 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사가 신뢰를 받는다면, 위임 목사로 결의할 수도 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교회에는 위임 목사 제도가 존재한다. 당회장(담임목사)이 되었을 때 공동의회 투표로 위임 목사가 되기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수년에 한 번씩 재신임 투표를 하게 된다. 즉, (임시) 담임 목사인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교에도 정교수 제도가 있다. 정교수가 되지 않으면 정년을 보장해주지 않는 제도이다. 그리고 교수라고는 부르지만 정교수는 정말 극소수이다.




자녀 교육비에 대해 

이건 실제로 내가 들은 거기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떤 성도가 말하기를, 목사가 제직회를 좌지우지하여 예산을 마음대로 쓴다고 말하는 거다. 사실 나는 여기서부터 이해가 안 가긴 했다. 제직회가 목사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여 예산 집행을 맞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적법한 절차를 따른다면 그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그 중에 한 가지 근거를 든게 있었다. 바로 자녀 교육비였다. 아들이 여름 즈음에 학교를 자퇴(또는 휴학?)했던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자녀 교육비를 그대로 집행했다고 이거 문제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때도 의아했다. 그게 뭐가 문제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목사 아들이 자퇴한 줄 모르고 이미 잡혀져 있는 예산을 사용했을 수가 있다. 이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렇다면 추후에 공동의회 등으로 "아이 학비로 나가기로 한 교육비였으니 이번에 집행하긴 했지만, 추후에 학교 다니게 될 때 집행한 교육비는 제외하고 집행하기로 하자"고 이야기할 수 있다.


2) 교육비라는 게 꼭 학교 수업비만을 이야기하는가도 이야기해보아야 한다. 이건 교회의 전례와 이전 회의록을 찾아보거나, 또는 새롭게 결의할 수도 있다.


아이가 학교는 다니지 않지만 그 외의 다른 수업을 받는다거나.. 또는 학교에 다니지 않지만 아이의 자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아이 나이에 맞춰서 집행하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아이가 현재 학교는 다니지 않지만 교육을 받아야 할 나이이니 아이가 의무교육을 마칠 때까지 또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지원해주자고 말할 수도 있다. 자녀 교육비라는 게 "초중고 학비"를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학원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교회 반주를 시키기 위한 음악 학원(또는 교회 문서 작업을 위한 컴퓨터 학원)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3) 여기서 목사는 교회에서 주면 받는 것이다. 교회에서 상황을 잘 따져서 주겠다고 하는데, "아들이 자퇴해서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어떻게 말하는가. 주면 받는 거고 안 주면 안 받는 거다. 여기에는 교회가 이미 이 부분에 논의해서 주기로 결의했다는 전제가 있다.


4) 이게 마음에 안 들면 당회나 제직회, 공동의회에서 의견을 말할 수 있다. 대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표결을 하는 것처럼, 당회에서는 당회원이 회의를 진행하여 결정한다. 제직회는 제직들이 결정한다. 국회의 결과가 모든 국민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따르는 것처럼, 당회나 제직회, 심지어 공동의회의 결정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교회가 부패했다고 욕할 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상식이 부족하다고 여겨져도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대의 민주주의, 혹은 간접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투표를 톨해 결정된 사람들의 모임인 당회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고, 제직회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회원 또는 제직을 위한 재신임 때 투표를 하면 될 일이다.




적법한 절차를 따라

재미있는 건, 많은 사람들이 적법한 절차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적법한 절차를 경직된 문화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의 부품 같다"는 거다. 이 내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왜 내 의견은 반영을 안 했느냐

2월 부서 회의 때 나온 의견이 있었다. 아이들이 공예배 때 찬양대 섰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전체 교사회의 때 올려서 제직회와 당회로 의견을 제출했다.


그리고 전체 교역부 부장이 예배부 부장에게 요청을 넣어, 예배부는 찬양대에 의견을 물었다. 찬양대에서는 좋다고 하며 주일학교가 찬양대에 서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4월이 되어 아이들이 한 달간 연습을 시작하고, 5월 첫째주에 찬양대를 섰다. 그런데 찬양대원 한 명이 "당회에서 시키면 찬양대를 쉬는 거냐"고 주일학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교회가 하라 그러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기에 부품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이런 상황과 같다. 아이들 수련회 참석 조사를 위해 학교 선생님이 부모 동의서를 각 가정에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수련회 참석을 위한 부모 동의서를 담임 교사가 받았다. 그런데 수련회 전날, 갑자기 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학교에서 보내면 수련회를 반드시 가야만 하는 거냐"라면서 따지는 거다. 자기는 수련회 못 갔는데 어째서 동생만 가냐, 수련회비가 얼마인줄은 아냐고 학교와 싸우는 격이다. 학교에서는 황당하다. "그건 너네 부모님이랑 이야기해"라고 말할 일이다. 학교에서는 적법하게 동의서를 통해 부모의 의견을 확인했을 뿐이다. 적법한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웃긴 일이다. 동생이 수련회 가는 게 정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가족 회의를 통해서 동생 수련회를 못 가게 하면 될 일이고, 그걸 학교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대의 민주주의와 교회 시스템을 이해한다면, 저런 상황에서 "나는 부속품 같다" 라는 의문이 생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일학교가 공예배 찬양대에 서기 위해서 이미 몇 달에 걸쳐 여러 가지 회의를 지났기 때문이다. 부서회의, 전체 교사회의, 당회, 찬양대, 제직회에서 공식적으로 허락이 떨어진 사안이기 때문이다. 만약 찬양대원이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찬양대 내에서 미리부터 거절을 했어야 한다.


물론 교회는 하나의 사회이고 집단이기 때문에 나 혼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위의 예에서 당회, 제직회, 주일학교 전체 교사 회의, 찬양대에서 허락했다면 이미 대세가 바뀐 것이다. 이건 마치,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싫다고 나 혼자 아무리 주장해도 (적법한 절차의) 투표를 통해서 결정된 걸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건 마치,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게 싫다고 나 혼자 아무리 주장해도 (적법한 절차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걸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




목사에게 다이렉트로 이야기하는 사람

공동체와 집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 부서장이나 목사에게 다이렉트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참 많이 겪었던 것인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날 성도 한 명이 주일학교 교역자에게 찾아와서 아이들을 다음 주에 있는 봉사활동에 데려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워낙 좋고 단체가 있으니, 거기서 봉사활동하면 어떻겠냐는 거다. 교역자는 그것을 부서 회의 때 이야기했다. 그러나 회의 중에, 좋은 기회이긴 하지만 지금 시험기간이니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교역자는 의견을 이야기한 사람에게 어렵다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분노하며, 목사와 교회가 이래도 되느냐 화가 났다. 웃기지 않는가? 그런데 교회에 상처받았다거나 교회에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대개 이러하다.


일단, 이 사람들은 목사나 리더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목사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없다. 물론 어쩌다 목사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억지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실패한다면 사임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즉, 실패한다면 후폭풍이 거셀 것이다. 쉽게 말해, 독불장군식의 리더십은 목회 세계에서는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정말 옳은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한다면.. 목사가 사임할 각오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하지 않냐고 촉구하는 성도들도 많다. 그런데 사실 그 정도로 밀어붙일 만한 일이 많지는 않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내 의견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다. 그렇기에 단체에서 하나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무수히 많은 옳은 의견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하는가? 하다못해 이미 하기로 결정된 수련회 날짜와 장소 가지고도 한참을 씨름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의견을 낸다면..? 새로운 봉사활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결정부터 절반의 반대가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교회는 결정할 때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재를 한다면 바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찬성 30%, 반대 30%, 잘 모르겠는 사람 40%가 있다면 찬성 30%의 의견을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반대자와 잘 모르겠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최대한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처음 의견을 낸 사람이 한 명이라면, 그 사람 상처 받지 않게 하려고 바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거다.




정리하며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 중에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집단,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참 많다. 그 사람들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에 상식이 많이 무너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신앙인이라면 웬만하면 주일학교 봉사를 반드시 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주일학교에서 오래 교사로 봉사를 한 사람들을 보면 이런 시스템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이라 할지라도 주일학교에서 몇 년간 봉사를 했다면, 연간회의, 월례회의, 교사회의의 중요성을 배운다. 이것이 공동의회, 제직회, 당회와 어떻게 비슷한지를 알고, 교회의 규칙과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회사와 사회의 정치, 규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실제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이걸 경험하지 않고 혼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 집단, 규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면서 교회가 부패했다고 주장하는데.. 아는 사람들이 보면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상식이 부족할 때가 더 많다.







작가의 이전글 욥기 5장 17절-27절 묵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