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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Jun 27. 2024

욥기 8장 1절-22절 묵상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세계관이 좁은 사람의 무례함

내용 관찰

1-2절

이제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반론한다.


3-6절

빌닷에 따르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의인은 상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는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라는 말은,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어서 죽은 거라는 말이다.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번영신학의 핵심 구절이 여기에서 나온다. (물론 번영신학은 올바른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8-10절

옛 사람의 지혜, 잠언을 배우라고 말한다.


11-22절

인과응보가 있을 거라는 빌닷의 논리가 나온다. 특히 20절과 22절을 보면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 회개하라 라고, 그러면 웃음과 즐거운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빌닷은 말한다.




연구와 묵상

죄인에게는 징벌이, 의인에게는 상이 있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세상이다. 착한 사람, 의인이 잘 사는 세상, 그리고 악인과 죄인은 벌을 받는 세상 말이다.


안티 크리스찬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항상 이 정의의 문제를 가져온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이 세상에 악이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악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은 없을 거라는 주장을 한다. (지난 글을 보았다면 이것이 얼마나 빈약한 논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관점이 빌닷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빌닷의 이 논리는 부자의 논리이다. 잘 사는 사람의 시선에서 가난한 사람,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 죄를 저지르지 않았냐는 거다. 부지런하지 않으니 가난한 거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으니 인생이 꼬인 거고, 노력하지 않았으니 결과가 없고,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았다는 거다.


그리고 빌닷은 욥기 8장을 읽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린다. "지금 니 꼬라지가 그런 것은 죄를 지어서 그런 거야"라고 말이다. 사실 이 논리는 매우 막강하기에, 정의를 부르짖는 안티 크리스찬들의 논리를 무너트리기 쉽다. "니가 죄를 저질러서 그런 거지. 저 사람이 고난을 겪는 것도 죄를 지어서 그런 거야"라는 논리는, 그 사람이 실제 죄를 저질렀다면 논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물론, 위로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어떻게 "니 아들이 죄를 저질러서 죽은 거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이 세상은 정의롭지 않으니,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정의로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결국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거다. 문제는, 이 세상에 정의가 없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에게 징벌이 있을 거라는 점이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이다. 욥기를 처음부터 보면 알겠지만,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찾아온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말이다. 즉, 빌닷의 세계관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빌닷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세계관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세계관을 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유예되고, 대신 최종적 심판이 우리를 심판할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빌닷의 발언은 정죄를 받는다. 즉, 틀린 소리라는 거다. 1) 하나님께 간구하는 의인이라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 가난해질 수 있다. 즉, 고난을 당했다고 신앙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거다. 2) 빌닷의 율법주의적인 세계관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정죄와 비난으로 몰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는 틀린 거다.


아무튼, 빌닷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발언은 맥락 속에서도 틀린 소리이고, 또 욥기 맨 마지막에 빌닷의 자세는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다.




느낌 및 결단과 적용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빌닷과 같이 작을 때가 많다. 내 작은 세계관과 신념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의 작은 세계관은 신념을 만들어내는데, 우리는 복음이라는 더 넓은 세계관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로마서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을 약간만 맛보는 사람들은 작은 세계관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우리는 깊은 복음의 의미를 빨리 깨달아야 한다.



미국의 신학교 한인회에서 일했을 때의 일이다. 완전히 죽어 버린 한인회 페이스북을 선배들에게 연락해서 찾아낸 뒤, 가입 권한을 받을 수 있었다. 거의 10년만에 임원이 한인회 페이스북을 다시 관리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당시 거주지에 커다란 독수리가 날아왔다. 아이가 많이 노는 놀이터 맨 꼭대기에 앉아 아이들을 노려보는 독수리를 보며 한인회 페이스북에 기도제목을 올렸다. 물론, 독수리가 지나가던 성인 남자를 공격해 눈을 거의 실명 직전까지 가게 했다거나, 동물원에서 풀려난 독수리가 직원을 공격해 중상을 입혔다는 기사 등을 보았던 것도 기도 제목을 올린 이유였다.


그때 임원 한 사람이 "사역을 해본 적은 있냐"면서 욕설을 카톡으로 보냈다. 어떻게 독수리 돌아다니는 걸 기도 제목이 올릴 수 있냐고 말이다. 페이스북에 올릴 수 있는 건 그런 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아니, 공지도 아니고,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남기는 페이스북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아, 이 사람은 정말 세계가 좁구나"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바로 욕설을 할 정도였는데, 빌닷과 똑같았다.



빌닷은 자기 세계관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상황을 보며 분노에 차서 욥에게 막말을 한다. "니 아들 죽은 거 죄 지어서 그런 거지. 그러니 너라도 얼른 회개해"라는 것이 그것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남길 수 있는 페북에서 "당신이 기도 제목을 남기면 공식적인 요청이 되니 지운 거다. 아니, 기도 요청을 하다니, 사역을 해본 적은 있냐" 같은 소리를 하는 목사가 존재한다. 독수리가 아이들 노는 놀이터에 나타난 일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 이런 걸 페북에 남기거나 사람들에게 알리면 안 된다는 딱딱한 생각을 듣기도 한다. 이해는 간다. 그 사람이 사역했던 교회는 그런 분위기였구나 싶었다. 교역자 회의 때 컵을 던졌던 목사 밑에서 배운 사람이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페북에서 공동체의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말이다. 이 사람이 자기 페북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걸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다. 목사도 내로남불에 빠질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미국, 한국, 싱가포르 등 다양한 학교를 경험해보고, 다양한 기관을 경험해본 나는 하나의 경험만을 가지고 자기만의 방식을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조금 아는 사람들이 무례하다. 하나의 교회만 경험해본 사람은 자기 교회만 맞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나라만 여행해본 사람은, 그 나라만 유독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위의 목사와 같이 자기의 경험만 절대화하는 사람, 자기가 경험한 교회만을 기준으로 하는 사람, 그러니까 이렇게 세계관이 작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다. (위의 사건에서 보듯이) 목사라도 마찬가지다. 빌닷과 같이 부자에 존경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많이 보고 많이 배워야 한다. 세상을 알고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엇보다 현실에 임하는 복음의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내 알량한 지식으로 복음의 일부분만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욥의 세 친구들이 떠오른다. 욥의 세 친구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복음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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