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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Jun 29. 2024

욥기 9장 1절-35절 묵상

빌닷에 대한 욥의 대답 : 칭의와 중보자의 절실함


내용 관찰

9장 1-3절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빌닷의 말에 욥이 긍정한다.


9장 4-13절

창조자 하나님은 위대하시니, 아무리 위대한 창조물이라도 하나님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하나님께 반론할 수 있겠냐(12절)고 말한다.


9장 14-21절

그러니 욥 자신도 하나님께 반론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15절, 20절을 보면, 아무리 자기가 의롭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반론할 수 있는 자격과 위치는 안 된다고 말한다.


9장 22-24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을 그대로 두고 보시는 거 같다고 말한다.


25-35절

욥은 자기가 가진 두려움(25-28절)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28절).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이것은 불가능하며, 이 노력하는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은 죄를 찾으실 수 있고, 그렇기에 수고가 헛되다(29절)고 말한다.


아무리 죄를 씻어도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30-31),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시기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실 수 없으며, 그렇기에 우리 사이를 중보해줄 판결자가 없음을 한탄한다 (32-33절). 하나님께서 자비로 바라보셔야만(33-35절)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고백한다.




연구와 묵상

욥의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이 아님을 욥기 1장에서부터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상대적인 것이다. 욥은 상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고난은 욥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그러나 또한 욥은 빌닷과 마찬가지로 욥 자신의 죄성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절망감의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1)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차이이다.

2) 인간의 죄성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커다란 틈을 또는 담을 만든다. 그렇기에 욥은 중보자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32-33절)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자면, 원죄가 없이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1) 먼저,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있을까?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두시는 것처럼 보일까? (22-24절) 원죄를 알지 못하면 악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죄를 안다면, 하나님이 악을 조장하시는 게 아니다. 다만, 오래 참으심으로 악을 저지르는 인간들을 유예해 주시는 것이다.

2) 왜 나는 악과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까? 그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악과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28-33절) 그렇기에 욥은 칭의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33-35절)


그런데 악의 문제에 대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저급한 논리에 빠지게 된다. 그 논리는 이와 같다.


ㄱ) 이 세상은 악하다. ㄴ)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이 세상은 악할 수 없다. ㄷ) 그렇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하나님은 선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의 논리에는 중요한 것 몇 가지가 빠졌다.

1) 첫째로, "나는 악하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면, 지금 당장 나를 심판하셔야 한다. 모든 인간을 쓸어 버리셔야 한다.

2) 둘째로, 이 세상이 악하다면, 도대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이 악하다면, "악"이 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이 기준이고, 악은 지양해야 할 것이 된다. 즉, 악한 세상에서 선한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욥기 1장에서 살폈다. 기독교의 신론과 원죄에 대한 개념 외에는 악한 세상에서 선한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게 지난하다.





느낌 및 결단과 적용

죄악이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물론 이 말씀은 잘 이해해야 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로마서 5장 20절


이 말씀의 행간을 읽지 못하면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된다. 이 말씀은 죄를 더 많이 저질러야 은혜가 많다는 게 아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어려서부터 다녔던 교회에 그대로 다니는, 문화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거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복음을 누리기 위해서는 철저한 죄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죄성을 모르는데, 어떻게 은혜를 깨닫느냐는 것이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625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미군에 대해 아무런 감사가 없다. 625의 끔찍함을 경험한 사람은, 그 끔찍한 정도에 따라 미군에 대한 감사가 늘어난다.


수백억의 빚을 졌고, 누군가 그것을 갚아줬다고 해보자. 이 빚이 얼마나 큰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누가 빚을 갚아줬어도 아무런 감사가 없다. 어떤 사람은 빚을 갚아준 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까지 하다. 감사를 느끼려면, 빚을 갚아주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인식해야 된다.


부모의 사랑도 이와 같다. 부모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모를 하찮게 여기는 자녀들이 있다. 독립해서 자녀를 낳고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봐야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게 된다. 부모의 사랑이 당연하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모의 도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고 나야 부모의 사랑에 감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욥의 절망이 여기서 드러난다. 자신이 가진 피조물로서의 한계와 인간의 죄성이 중보자 예수와 칭의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만든다. 이것에 대한 인식이 철저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충만하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는, 이러한 나 자신의 한계와 죄성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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