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회의 : 역사의 이면에서
이번 본문은 천상 회의라고 불리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사탄의 성격이 여기서 드러난다. 사탄은 다른 사람의 죄와 죄성을 까발리는 존재이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정의감에 불타 다른 사람의 죄를 어떻게든 까발리려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사랑이 없이 다른 사람의 죄를 까발리는 것은 사탄과 같은 모습일 수 있다.
8절을 보면, 욥의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었다. 즉, 고난 받는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겪는 사람을 보며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면서, 죄를 지었겠거니 지레짐작 하는 사람이 있다.
9-10절을 보면, 사탄은 기복주의 또는 번영신학을 잘못된 신앙의 모습으로 비판한다. 욥이 이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냐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사탄이 정죄하는 이런 잘못된 신앙(기복주의, 번영신학)의 모습을 가지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1.
8-11절을 정리하면, 부자라고 신앙이 좋거나 가난하다고 신앙이 나쁘다 말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그 동안 이런 생각이 자리잡았었다. 아무래도 교회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쓴다면 그만큼 교회를 사랑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중직자가 되기 쉬웠다.
(물론 돈이 많으면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교회를 위해 쓰기 쉽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적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더 많은 돈을 헌금하는 사람보다, 십일조와 같이 수입의 비율을 정하는 게 공정할 것이다. 즉, 중직자 선출 요건으로 꾸준히 십일조를 낸 것을 보는 건 합당하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십일조를 안 낸다고 정죄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을 교회의 리더로 세워야 하는데, 그 기준으로 "돈이 더 많은 사람"보다는 "십일조를 더 꾸준히 내는 사람"이 보다 적당하다는 거다. 가난한 사람이 내는 두 렙돈이 거부가 내는 한 달란트보다 클 수 있다.)
2.
12절을 보면 일신론과 이신론(Dualism) 사이의 기독교적 신론을 살필 수 있다.
이슬람과 같은 일신론에서는 신이 기준이다. 즉, 신이 사람을 죽여도, 신이 아무리 잔혹하더라도 기준이 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선일 수 있다. 즉, 신이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저주하고 괴롭게 하더라도 그것이 선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이 세상의 무수히 많은 고통도 선이 된다. 왜냐하면 따로 악(악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신론(Dualism)의 경우에는 정반대이지만 결론은 비슷하다. 이 세상에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한다. 즉, 이 세상의 선한 것은 선한 신에게서 나온 것이고, 이 세상의 악한 것은 악한 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는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를 정의하는 것이 사실상 바보 같은 소리가 되어 버린다. 악한 신이 선한 신을 이기게 된다면, 악한 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악이 선이 되어 버린다. 반대로 선은 악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는 악을 굳이 악이라고 할 이유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악 또한 악한 신의 기준으로는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어거스틴의 "선의 부재는 악이다"라는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욥기 12장만 보아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선의 기준이다. 사탄과 같이 고통을 일으키는 존재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보신다. (그것을 냅두시는 이유는 비유적 지옥설이나 타락 등을 다루어야 해서 주제에서 벗어난다.) 즉, 선이 기준이고 악과 고통은 (비유적 지옥설에 의하면 인간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을 뿐이다. 즉, 기독교는 (이슬람과 같은) 일신론과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이신론(Dualism)의 사이에 존재한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보다 열등한 영적인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
12절을 보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자를 지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신자의 고난을 허용하시되, (영원한) 생명을 잃을 정도의 고난, 즉 신자가 견디지 못할 정도의 고난은 허용하시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물론, 교회에서 리더를 세울 때에는 다른 문제이다. 디모데전서와 같이 성경에서도 직분자를 세울 때의 기준을 말한다.) 특히 우리는 상대방의 옷차림, 부유함과 같은 외적인 것을 가지고 상대방의 신앙을 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지적할 때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고 반성하고 있는데 굳이 들추어 내는 것은 사탄의 행위와 매한가지일 수 있다. (물론 교회에서 치리를 해야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