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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May 14. 2024

솔로몬의 지혜 - 듣는 마음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15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왕상3:4-15]


Intro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참으로 많이 듣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꿈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냐 물으시니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지혜에 더하여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도 주시겠다고 말합니다. 이후 솔로몬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어 유명해졌고, 부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얻은 지혜란 무엇일까요? 말씀을 보겠습니다.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3:11-12]


하나님은 솔로몬이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자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다 자세하게는 솔로몬이 실제 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7-9]


솔로몬이 구한 것은, 그냥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상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였습니다. 듣는 마음을 주셔서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는 것이 바로 솔로몬이 구한 것이었습니다.




첫째, 옳은 말도 주의해야 합니다.


1. 시비가 붙다


시비를 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비”란 옳음과 그름입니다. 즉,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는 말다툼을 “시비가 붙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보면,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했는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따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누군가 한 명은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따지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거고, 나도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끝난 문제를, 게다가 굳이 상대방도 이미 알고 있는 실수를 지적하는 건 유익하지 않다고 점점 배우고 있습니다. 물론, 실수가 반복된다면 그건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


옳고 그름을 잘 따지는 사람들은 “올바름”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옳음을 주장하는 게 옳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욥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욥과 엘리바스


욥기를 보면, 욥이 완전히 망하고 맙니다. 그러자 욥의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욥이 자기가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이야기하는데, 이때 엘리바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욥4:3-5]


엘리바스가 욥에게 팩트 폭행을 합니다. 명확한 사실을 말해서 욥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 완전히 망해서 절망에 빠져 있는데, 그 앞에다 대고 “야, 너 회개 안 해서 그래”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했던 것처럼 너도 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욥은 크게 상처를 받아, 친구에게 차라리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나중에 하나님도 욥의 친구들을 정죄하십니다. 거기다, 욥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내뱉은 이 정죄의 말, 팩트 폭행은 심지어 틀린 정죄였습니다. 성경에 욥은 의인인데 고난 받았다 말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공감도 지능이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면 정서 지능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도 욥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팩트랍시고 욥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팩트 폭행, 사실을 이야기해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왜 이렇게 못생겼어요?” “가난하세요?” 등등 팩트라는 이름으로 독설을 내뱉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으면, “저는요, 틀린 말은 안 해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나는 맞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상처 받을 걸 생각하지 못합니다.


실제 있었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성도의 교회 다니지 않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앞에다 대고, “천국 못 가시겠네요” 라고 말합니다. 그것에 대해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라고 이야기하니, “사실이잖아. 나는 틀린 말은 안해”라면서 “내가 사실도 말 못하냐?”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실제 우리 삶 속에서도 맞는 말이랍시고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3-24]


맞는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맞는 말을 한다고 해놓고 내 마음이 편한 말, 즉 나를 위한 말을 합니다. 이것은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제사에 바쳐진 음식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제사에 바쳐진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들은 “어떻게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데,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내가 이것을 먹는 것으로 다른 형제가 상처를 받는다면 먹지 말라는 겁니다. 즉, 내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겁니다.


“남이 상처를 받든 말든,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그냥 행동하겠다.” 이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의 유익을 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입니다.




둘째, 형제를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 솔로몬의 판결


16 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17 한 여자는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여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내가 그와 함께 집에 있으며 해산하였더니 18 내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이 여자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19 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그의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의 아들이 죽으니 20 그가 밤중에 일어나서 이 여종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21 아침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왕상3:16-21]


두 여자가 한 아이를 데리고 솔로몬에게 찾아옵니다. 이 두 여자 모두 그 아이를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처럼 DNA 기술도 없었던 시대라, 이 아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아이를 반으로 갈라서 나누어 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아이의 친엄마가 아이를 상대방에게 주고 죽이지 말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이 애원하는 여인이 친어미라고 판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이 "어머니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를 빼앗기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듣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생깁니다. 나만 생각할 때에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오해만 계속 쌓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빠져 나오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말을 줄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이 꼰대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는데, 듣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2. 솔로몬과 르호보암


안타깝게도 말년에 솔로몬은 이러한 듣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3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4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왕상12:1-11]


솔로몬이 죽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으려고 온 이스라엘이 모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말하기를,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든 노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니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라서 솔로몬보다 더 가혹하게 다스리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열 지파는 르호보암을 떠나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오직 두 지파만 남아 유다 왕국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둘로 분열되고 만 것입니다.


솔로몬이 어렸을 때는 백성의 마음을 듣고 그들을 위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나이가 들자, 자기 자신을 위해 백성들을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받아 그 아들은 더 악하게 백성들을 다스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을 둘로 분열시켰습니다.




3. 적용


교회도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만, 자기 불편함만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쉽게 말을 내뱉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불편함,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가족 가운데에도,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내 말, 내 주장을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갈등이 있는 가족을 보면, 서로 소통이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서로 맞는 말을 하는데,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을 때 갈등이 생깁니다. 듣는 마음이 없고 내 주장할 때 이 갈등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4. 복음도 마찬가지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들을 상태가 아닌데 그냥 막무가내로 전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맞추어주었듯이 (성육신), 우리 또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맞춰줘야 합니다.


100년 전, 일제 시대 때 최권능 목사님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때에는 이 말이 복음이었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지옥 같은데,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 말은 복음이 아니라 정죄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들을 때, “너네, 예수 안 믿지? 지옥 갈 거야.”라고 들립니다.


그래서 요즘 전도를 많이 한 사람들은 메시지가 오해가 되지 않도록 이런 말씀을 사용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예수에게 다가와야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다. 이 메시지는 바뀌지 않았지만, 청중이 달라졌습니다. 청중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청중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듣는 마음,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청중이 달라지면 메시지의 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중이 달라졌다고 메시지가 달라지면 안 됩니다. 메시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셋째, 하나님을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 의의 말씀을 경험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 3:13-14]


본문의 14절을 보면,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 곧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3:9]


솔로몬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주셔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일 때 이것이 생깁니다. 히브리서 5장을 보면 이게 좀더 분명해집니다.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5:12-14]


히브리서 5장은,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을 가지면 선악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2. 솔로몬의 타락


초반에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법도와 명령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말년이 되어, 하나님이 왕들에게 세우신 법도, 즉, 여자, 돈,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신17:16-17]




3. 수련회 연극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보다는 내 속에서 나온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처음 (겨울) 수련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수련회 기획서를 처음 나눠주고 한참이 지난 뒤, 수련회 전날 이런 소리를 선생님에게 들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거룩한 정의감에 분노하여 당시 전도사였던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아니, 이번에 왜 연극이 없나요?


이 이야기를 들은 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이야기 안 하다가 갑자기 수련회 전날 이렇게 이야기하다니? 이제 와서 어떻게 준비하라고?


그래서 저는 선생님을 달래며, 이번에는 어렵지만 다음 수련회 때에는 반드시 연극을 넣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여름 수련회 준비 기간이 되었고 수련회에 연극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동일한 선생님이 또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니 왜 사역자는 수련회마다 꼭 연극을 넣나요? 지난 번 사역자도 그러더니..


그때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아니, 자기가 넣자고 해서 넣었더니 갑자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선생님은 연극이 중요해서 수련회 때 연극을 넣자고 한 게 아니었던 겁니다. “연극을 넣고 빼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 내 의견을 따르느냐 마느냐”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회에서 정의감에 불타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보면 정말 그 의견이 중요했던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순간에 누군가 내 의견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나 자신을 위한 말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교회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의 실수를 하나하나 정죄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살펴보면, 마치 욥의 친구들이 했던 말처럼 대충 보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틀렸다고 정죄하십니다.





4. 하나님을 듣는 마음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아니, 너네 아직도 말씀의 초보에서 벗어나지 못했니? 이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단단한 말씀을 먹을 수 있어야지.”라고 말합니다.


이제 내 마음대로 말씀을 읽고, 내가 원하는 말씀만 선별적으로 골라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상숭배입니다.




5. 우상숭배


많은 성도들이 1계명과 2계명의 차이가 뭐냐고 물어봅니다. 1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이고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이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게 출애굽기 32장입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32:1-4]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이 지나기까지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새로운 신을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만든 신이 다른 신이 아니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신”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를 위하여 우상을 새기지 말아라” 즉 2계명은 이방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 마음대로 섬긴 것입니다. 두려운 하나님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황금 송아지에 가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하나님 그 자체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하여 새로운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는 게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식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는 게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제1계명이 “바른 대상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제2계명은 “바른 예배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이렇게 2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멋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예람워십에 대한 토론이 종종 나오는데, 예람워십의 마인드가 딱 이렇긴 합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대로 예배를 드리는 게 어떠냐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내 마음대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가인은 자기가 원하는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어떻게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듣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듣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Outro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결국 솔로몬이 받았던 지혜란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백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공정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세워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변질되긴 했지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교회를 더 하나님 나라답게 만들어 나가고,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이것을 위해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내 이웃을) 듣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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