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의 고통 : 차라리 죽는 게 낫다
10:1-7
1절 욥의 토로 시작
2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 칭의를 바라는 욥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 징계의 이유(나의 잘못)를 알려달라고 말한다. 즉, 정죄는 바라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된 행위는 알기 바란다 - 교정 또는 성화를 바라는 욥
3절 악인이 왜 더 잘 사는가 묻는다
4절 하나님이 인간을 이해하시는지 묻는다
5-7 욥 스스로는 그렇게 악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허물을 찾으신다면 벗어날 길이 없다.
10:8-12
하나님께서 욥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한다.
10:13-17
욥이 느끼기에 주님이 품으신 뜻은 욥을 정죄하시는 것이다.
10:18-22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고백
1.
쿠툴루 신화 속 외신들은 인간의 가치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사고방식과 목적을 가진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이런 외신들은 만나자마자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런데 요즘 웹소설들을 보면 이런 쿠툴루 신화속 외신들과 같은 관점의 신들이 계속 나온다. 신을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과 비슷한 모습이 웹소설에서 자주 등장했다.) 또한 반대로 신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욥의 질문이 이러한 생각과 닿아 있다. 과연 하나님이 인생을, 인생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이해할 수 있으신가 하는 의문을 토로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악이 관영하는 것처럼, 악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래참음이라는 것을 아직 욥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때로는 반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은 뭔가 똑똑한 것인양 이렇게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인 것처럼 이렇게 주장한다. 세상이 이렇게 악한데, 어떻게 선한 하나님이 존재하시냐는 거다. 하나님이 없거나 하나님이 선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는 이미 욥기 내에서도, 시편에서도, 그 외의 다른 성경에서도 충분히 다뤄지고 있다.
2.
여기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정죄를 두려워하는 욥의 모습이다. 고난이 닥칠 때, 인간은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런 죄를 저질러서 이런 벌이 온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욥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욥은 여기서 더 나간다.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더라도, 하나님이 찾으시려고만 한다면 죄악을 찾아내실 수 있는 거 아니냐는 거다. 즉, 어떤 노력을 해도 죄와 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욥은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여기서 결국 욥은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한다. 1) 죄를 보지 않으시는 것(칭의)과 2) 죄의 습관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것(성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3.
여기서 우리는 반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악의 문제에 대한 두 가지 모순적인 질문을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노아의 홍수와 같이) 심판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세상을 이렇게 악하게 두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 모두 "나"와 연관될 때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질문이다. 내가 고통 당할 때 두 가지 모순된 질문 중 하나를 꼭 하게 된다. (때로는 이 모순을 못 느끼고, 이 두 가지 질문 모두를 하기도 한다.) 1) (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를 괴롭게 (심판)하느냐와 2) 왜 나를 괴롭게 하는 저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느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욥이 동일한 상황 속에서 동일한 질문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4.
여기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토로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하셨다. 2) 하나님의 진노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게 죽음과 소멸보다 더 두려운 일이다.
그렇게 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허물을 찾으신다면 벗어날 길이 없다는 욥의 느낌을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한다.
과거, 크게 죄를 저지르지 않는 소시민적 삶을 산 사람들이 있다. 이것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이 참 많았으나, 혐오가 만연한 요즘에는 동정보다는 정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페미니즘과 채식주의이다. 부모 세대에 대해 남녀 차별을 했다며 부모를 범죄자처럼 그리는 소설과 글들을 우리는 많이 본다. 또한 육식을 폭력이라고 비난는 채식주의자들 이야기를 종종 발견한다. 환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지나치거나 살펴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런 새로운 사람들의 눈으로는 폭력과 악으로 비춰진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들이 지금도 이루어진다. 과거는 역사가 이미 판단했기에 옳고 그름을 알기가 쉽다. 일부다처제와 노예제도만 해도 우리는 쉽게 정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정죄할 수 있는 문제일까?
죄를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죄인식이 안 되는 거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양심에 털이 났다고 표현한다. 금수와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두 종류가 존재한다. 1) 단순히 그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 2)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
분명 교회 안에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을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막 대하는 갑도 많다. 그 사람들의 악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사람이 죄 인식을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한 거 같다. 즉, 내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정죄하지 말고 기다려줄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