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은 2-3장 : 첫 번째 표적과 첫 번째 대화
요한복음 2장부터 5장까지는 같은 구원을 세 관점으로 바라보는데, 말씀에 의한 구원, 믿음에 의한 구원, 그리고 은혜에 의한 구원이 그것이다. 요한은 이 구원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세 개의 표적과 세 개의 대화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아래의 내용을 보면 요한복음 2장부터 5장까지의 대략적인 구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아래의 구원에 대한 세 가지 관점 가운데 첫 번째인, 말씀과 성령에 의한 구원에 대해 다룬다. 물론 요한복음의 전체 맥락에서 "성령"을 강조하기는 하는데, 아래의 구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클 것이다.
첫 번째 표적: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2:1-12) - 말씀에 의한 구원
성전 정화 사건 (2:13-22)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심 (2:23-25)
첫 번째 대화: 니고데모와의 대화 – 성령으로 거듭남 (3:1-22)
세례 요한의 두 번째 증언 (3:22-36)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
두 번째 대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 생수 (4:1-42)
두 번째 표적: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심 (4:46-54) - 믿음에 의한 구원
세 번째 표적: 예루살렘의 베네스다 못가에서 환자를 치유하심 (5:1-9) - 은혜에 의한 구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 (5:10-18)
세 번째 대화 : 아들의 권위에 대하여 (38년된 병자를 치료한 후 유대인들과 대화)
- 아들의 권위 (5:19-29)
- 예수님를 믿게 하는 증언 (5:30-47) / (feat. 세례 요한의 증언)
요한복음의 전체 구조는 아래의 블로그를 확인하도록 하자.
그런데 구원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표적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주시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각 표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적이란 무엇인가? 영어로 표적은 Sign이다. 그리고 도로의 표지판도 영어로 sign인데, 도로의 표지판을 생각하면 표적을 이해하기 쉽다.
표지판은 우리에게 길을 알려준다. 여기로 가면 서울이 나온다, 저기로 가면 인천이 나온다. 여기는 공사중이다, 가면 안 된다.
표적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길,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목적지를 우리에게 가리키는 것이 바로 표적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사도 요한이 경험한 무수히 만은 표적 중 일곱 개를 가지고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즉,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자 목적지라는 것을 표적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마냥 크고 대단한 기적이라고 해서 표적이 아니다.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부터 시작하면, 각 기적에는 의미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표적 또한 이러한 메시지가 담여 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이다. 예수님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거다. 그러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한복음 2:5]
그러자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뒤,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한다. 그리고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이게 중요한데, 말씀에 순종할 때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먼저,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이 여기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성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성경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상징들만 정리해보고 싶은데, 성전 물 환상,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 등의 환상도 그렇지만, 포도주라는 비유도 성령에 대한 매우 강력한 비유 중에 하나다.
좀더 설명을 하자면, 한 번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29]
여기서 예수님은 포도주에서 난 것, 즉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로 마실 거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이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 성령을 보내주셔서, 이미 우리는 성령을 우리 속에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즉, 온전한 것(성령)이 왔으니 그림자(포도주)는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앞으로도 온전하지 않은 것(술)에 의지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성령과 포도주(술)이 서로 대조되는 것을 생각하면, 술에 취했을 때 성령에 취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기는 하다. (물론 이게 굳이 술에만 한정지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여기서 이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맹물 같았던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된다.
그러면 언제 말씀이 우리 속에서 작용하여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바꾸느냐,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듯이 우리가 말씀에 반응할 때이다.
그렇기에 성령충만하고 싶다면 우리는 말씀에 반응해야 한다. 말씀을 안 보고 내 생각대로 산다면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어렵다. 그리고 말씀 없이 성령만 찾는다면, 성령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두 사람이 방언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불렀다. 자기에게 통변의 은사가 있는데, 두 사람의 방언을 번역해보니 서로 축복하는 게 아니라 저주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렇게 말씀이 없는 은사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탄의 역사일 수 있다.
요즘 우리는 말씀의 힘에 대해 과소평가할 때가 참 많다. 그런데 아래의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성경만 읽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실상 한국의 역사는 성경 번역과 성경 전달의 역사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4:12]
로자리아 버터필드 라는 교수가 있다. 동성애가 완전히 정상이며 성적으로 다른 것일 뿐이라고 믿었던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즘 교수였던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왜 기독교인은 나와 같은 동성애자를 안 좋아하는가”에 대해 책을 쓰다가 연구를 해야 하니까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경을 7번 읽고 목사님의 집에서 500번의 식사를 하던 와중 일이 벌어진다. 예수를 만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결국 레즈비언임을 포기하고 목사의 사모까지 되고 만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는 말씀과 성령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 다음 장면을 보면 좀더 명료해진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끝나면 이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성전 정화 사건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성령으로 가득해야 하는 곳인 성전이 물건 파는 곳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흘이면 성전을 무너뜨리고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하시는데,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21]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보면 이것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에게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6-17]
우리 몸도 성전이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 좀더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전 청결 사건을 일으키신다. 왜냐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성령으로 가득해야 하는 곳인 성전이 물건 파는 곳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마음 속에서 성전 청결 사건을 일으키신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 성령이 거하고 임재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자본주의에 더럽혀져 돈의 노예로, 유튜브 쇼츠의 노예로, 미움의 노예로, 열등감의 노예로,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것들에 의해 우리 마음을 더럽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우리에 안에, 곧 성전에 성령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다음 장면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2:23-25]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있어야 하는데, 그 속에는 다른 게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의미인가? 나중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즉, 사람들의 속에는 성령이 아니라 이기심이 가득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와 성령, 말씀이 아닌 물건 파는 것이 가득할 때 예수님은 성전을 청소하셨다. 사람 속에 성령과 말씀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찾는 것으로 가득할 때 예수님은 이 마음이라는 성전을 청소하신다.
그렇다면 예배하는 예배자인 우리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 묻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는다.
이슬람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번, 새벽 5시, 오후 1시, 오후 3시, 오후 6시, 오후 7시에 알라에게 기도한다. 유대인들은 613개의 율법을 있어서 이것을 지켜야 한다. 불교에서는 과거 성철 스님을 만나려면 일천 배, 삼천 배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몇 시에 예배를 드리는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방향으로 예배를 드리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리고 말씀하신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겉모습이나, 겉 행동이 아니라 참된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는 무엇인가? 바로 성령과 말씀이다. (영이 성령이고 진리가 말씀이다.)
장소나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말씀과 성령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말씀과 성령에 의한 구원 파트>의 클라이막스로 넘어가게 된다. 바로 니고데모와의 대화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2-5]
성경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뜬금이 없다. 그리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니고데모의 질문 중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에 대한 대답이 매우 난해하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이 때로 이와 같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 힘으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교회 내 많은 청년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 믿으면 구원 받는 걸 아는데, 안 믿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는 대개 복음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다룰 것인데, 필요하다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믿음이 생기지 않을까? 왜냐하면 믿음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잘못되면 위에 있는 링크에서 소개하는 잘못된 구원, 구멍난 복음에 빠질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을 다루면서 해야 하는 것이지만, 필요한 개념이니 간단하게 다루어보자면, 어거스틴에 따르면 우리에게 두 가지 은혜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장을 봐야 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6]
여기서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은혜1과 그 위의 은혜2 이렇게 두 개의 은혜가 존재하는 것이다. 참고로, 개혁주의에서는 이 첫 번째 은혜를 "신비"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을 살피기 전에 좀더 말씀을 이해해보자.
이 두 가지 은혜가 무엇인가는 1장 12,13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데,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 이 말씀을 간략하게 분석해보자.
요한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난다"고 말한다. 즉, 은혜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은혜는 영접하는 것, 곧 그 이름을 믿는 것이다. 두 번째 은혜는 구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즉, 믿음과 구원 모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이 믿음이 생기는 것을 <신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왜 이것이 생기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우리 힘으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믿게 하신다. 즉,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믿음이 생긴다는 것을 가리켜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느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9-10]
사람들이 이 말씀만 보고,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 영접기도 시키고, “너 구원 받았어”라고 주장한다. 믿음이 생기는 매커니즘을 신비가 아니라 방법론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혁주의 선배들이나 어거스틴 같은 신앙의 선배들과는 전혀 다른 믿음이다.
그런데 이 바로 앞의 말씀이 중요하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10:8]
말씀이 우리 입과 마음에 있어야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정리하면, 우리 안에 말씀이 있을 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을 때 거듭남이 생긴다. 오늘 포스팅을 처음부터 잘 읽었다면 알겠지만, 믿음은 매커니즘이나 방법론으로 얻는 게 아니다.
이 부분을 <가나의 혼인잔치> 부분에서 다루긴 했지만 그래도 좀더 설명해보자. 믿음은 우리가 성취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은혜로 선물처럼 주어진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 같은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바꾸신다. 즉, 우리 안에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힘이 없지만 (나빌 쿠레쉬와 C. S. 루이스 같은 예를 들지 않아도 알 사람은 알 것이다), 신비롭게 하나님께서 주신다.
요한복음 2장부터 3장까지를 <말씀과 성령에 의한 구원>이라는 주제로 각 장면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설명해보았다. 이제 이것을 마무리하기 전에 간략하게 정리해보겠다.
첫째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살펴본 것처럼, 말씀에 반응할 때 맹물 같은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된다.
둘째로, 성전에는 말씀과 성령이, 예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의 몸을 거쳐, 우리 각 사람으로 적용이 된다.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쉽게 말해 성령과 말씀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 우리 속에 성령과 말씀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이라는 성전을 청소해달라고 예수를 초대해야 한다.
셋째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가 없다. 즉, 은혜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 뒤에,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신다. 쉽게 정리하면,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 성령의 사람이 된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말씀과 성령에 의한 구원 부분을 마무리하기 전에,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로 장면을 전환한다. 거기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4-36]
이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정리하면 이와 같다.
ㄱ. 하나님이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 없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
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ㄴ-1. 아들을 믿는 자는 곧 성령이 가득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다.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나오니까.)
ㄴ-2. 영생이 있다는 건 성령이 있다는 거다. (영생은 그냥 단순히 오래 사는 게 아니다. 성령이 가득한 삶을 말한다.) 즉, 성령이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의 입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행동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심
-> 하나님이 보내신 이=예수님이 성령이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
-> 그 말씀(성령이 가득한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김 -> 영생을 얻고 성령의 사람이 됨 -> 성령이 가득한 사람(곧 하나님이 보내신 이=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
->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성령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돌아보아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