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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문법적으로는 맞을 지 모르지만..

by 닥그라

Intro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를 하기 피곤한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때때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한다.


말이라는 것은 맥락 바깥에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모든 대화에서 사전적 정의만으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만날 수 있고, 놀랍게도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고, 때로는 이 사람들의 지능을 의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쉽게 이해하는 것을 “설명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굳이 필요없는 설명을 요구한다. 여기에 더 나아가, "설명을 못하면 너는 모르는 거다"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나 틀린 말


비슷한 예가 하나 있다. 아래의 영상을 한 번 보자. (영상에서 먹고 싶은 걸 말해보라 했는데, 진짜 아무 거나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하는 거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려면 영상을 꼭 보자.)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다. "먹고 싶은 거 말해봐"라고 했더니 “먹고 싶은 걸 말했다”. 근데 이게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지당한 말이고 맞는 말이다.


위의 영상 속 “먹을 수 있잖아”가 왜 틀린 말일까? 왜 옆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웃거나 당황할까?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거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거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눈치가 없을 때 이런 실수에 빠진다. 즉, 다른 사람의 의도가 맥락,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말을 새롭게 해석하는 거다.


(참고로, 과거 일본에서 나온 게임 중에 <쿠키요미>라는 게임이 있는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가 또는 공감 능력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게임이다. 즉,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외국 있을 때 먹고 싶은 음식


일단 위의 대화에서 맥락을 이해해보자. 외국에 나와 있다. 외국에 있으니, (여기서 먹을 수 없는) 먹고 싶은 음식을 이야기해보자고 말한다. 즉, 여기서 상대방의 의도는, "여기서 먹을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이야기해보자"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먹고 싶은 음식? 그럼 난 라면"이라고 말한다면..?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한 대답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질문의 의도에는 완전히 다른 생뚱맞은 답을 내놓은 것이다. 질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외국에 나와 있으니, 여기서 먹기 힘든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을 이해하지 못한 거다.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화술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저런 사람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재밌지만 가까이에서 겪는다면 답답하다. 모두가 이해하는 걸 설명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농담이라는 게 설명하면 팍 식는 게 많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이게 왜 재미있는지 설명하라"라고 말하며, 설명을 듣고 나면 "재미가 없는데?"라고 말하는 식이다. (물론 설명하면 재미가 없지.. 농담은 원래 설명하면 재미가 없다.)


특히나 "설명을 못하는 니가 무식한 것"이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을 때 답답함은 배가 된다. (그리고 놀랍기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이해 못하는 걸, 상대방이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나 상대방의 무식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가진 세계관, 화술 같은 것을 뒤집어 엎어야 한다. 다시 말해, "네가 쓰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가 잘못되었다"면서 상대방의 전제부터 부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 역사를 보면 패러다임 시프트가 어려웠던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방의 패러다임이나 세계관을 바꾸는 것은 정말이지 지난한 작업이다.


삼단논법으로 설명해보자.

1. 이해를 못하는 상대방이 문제이고 무식한 것인지 설명하려면 상대방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2. 세계관 또는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3. 즉, 이해를 못하는 상대방이 문제인 걸 설명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에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은 설명하는 사람이 무식해서”라는 말은 오류이다.




추가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글


아래의 글을 읽으면 이 글을 이해하는데 좀더 도움이 될 거다. 누군가의 말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어렵다. 말의 정의만 이해하고 거기에 담겨 있는 맥락과 심층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과 하는 모든 대화마다 맥락과 심층적 의미를 설명해줘야 한다. 즉, 같이 대화하는 사람은 계속 설명해줘야 하니 피곤하고 답답하게 된다.



그런데 아까도 설명했듯이, 심층적 의미와 맥락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나는 똑똑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는 커진다. 상대방을 "무식해서 설명 못하는 사람"으로 몰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몇 시간을 소요해야 하고, 그 일을 무수히 반복된다.


게다가 간단한 말로 설명이 되는 걸, 이 사람이 이해 못하기 때문에 설명이 점점 어려워졌던 것인지라.. 이 사람이 나중에 이해하고 나면.. 이게 다시 간단한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때 또 이 인간이, 설명한 사람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걸 설명 못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어이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이 간단한 걸 니가 이해 못한 거라고..!!)




표면적 의미와 심층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렇다면 표면적 의미와 심층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사람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겠다.


이 사람들은 일단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했을 때 나만 이해를 못했다면, 대개는 내 문제다. 상대방이 멍청하거나 무식해서 설명을 못하는 게 아니다. (보통은 이 정도 설명하면 이해하는 건데, 듣는 사람이 이해를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렇기에 이런 실수가 잦다면, 심층적 의미와 표면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극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무수히 많은 상황을 경험해야 한다. 사실 언어란 건 상황과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최대한 많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소설이나, 만화(그 중에서도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마블 만화 속에 등장하는 코미디 같은 것들이 도움이 된다.


말을 하지 않지만, 굳이 문자로 만들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하는 감수성을 갖추어야 한다. 문자로 표현하면 오히려 그 감성을 잃어버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농담은 설명하지 않고 이해해야 농담이 된다. 농담을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맛을 잃어버리고 말지 않는가.) 우리는 이것을 보통 행간의 의미라고 이야기한다.


"너는 표면적 의미, 문맥,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네가 한 문장으로 설명을 못하는 거니, 너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니가 행간(문맥)을 파악하지 못해서 이해 못하는 거다"라고 하면 이게 바로 한 문장으로 설명을 한 거다. 왜냐하면 행간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컨텍스트와 행간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봐라. 조선시대, 일제시대, 625전쟁, 근대 정치사를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이미, "니가 행간을 모르는 거야"라는 말에서 설명은 끝났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면 행간을 설명해라"라는 건 설명하는 사람의 의무가 아니다.


일례로, 위의 링크에서 "한"에 대해 설명했다. 각 문화권에는 그 나라의 역사, 맥락, 상황에 연결된 어떤 감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은 한국인의 정서를 보여주는 독특한 감성이다. 그러니까 "한"은 "한"을 모르는 사람에게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너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요구이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이라도 아이들을 가르쳐 보았다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라는 명제가 얼마나 무지한 명제인지 알 수 있다.)


같은 맥락과 컨텍스트, 문화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한"이라는 단어 하나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다. "한"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한"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전혀 다른 맥락과 컨텍스트, 문화, 언어를 가진 사람에게 설명한다면 어려워진다. 사실 "한"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맥락, 문맥,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야 한다.


특히나 외국에서는 "한"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예로, 예전에는 "답답하다"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이없다"는 말이나 "눈치"라는 말도 영어에는 없는 말이다. 그런데, "눈치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외국인에게) 쉽게 설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눈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인가? 이렇게 외국어를 공부해 보았다면, 한국인이라면 당연스레 이해하고 있는 어떤 것을 외국인에게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대화 도중에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주제에 벗어나서 갑자기 새로운 주제에 대해 그 맥락을 처음부터 설명하라 그러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설명을 못하면 너는 모르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면 질문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한국의 한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국의 역사를 조선시대부터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모르는 걸 내가 알도록 설명하는 게 상대방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며 "내가 알도록 설명하지 못한다면 상대방도 모르는 것"이라는 패러다임부터가 무례한 것이다. 공부를 안 했든, 상식이 없든, 모르는 내가 무식한 거지, 설명을 못하는 상대가 무식하다는 반응은 고치자. (외국어를 한 번이라고 공부해봤다는 이런 무식한 소리는 못한다. 이건 마치, "문법을 설명할 수 없으면 영어 네이티브라도 영어를 모르는 거다"와 같은 소리이다. 그러나 백날 문법을 잘해봤자 실생활에서 써먹지 못하는 사람보다, 문법을 잘 모르더라도 틀리지 않고 잘 말하는 사람이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물론 겸손하게 상대방에게 그 의미를 물어볼 수는 있다.




덤, 사람의 70%는 물이다


"사람의 70%는 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그러면 열 명 중 일곱 명은 사람 행세를 하는 물이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상식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물론 이런 중의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말이 오해를 일으키기는 한다. 하지만 원래 말이란 맥락이 중요하다. 헬라어나 라틴어를 공부할 때에도 결국 "맥락 속에서 이게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라"는 말을 한다. (왜냐면 중의적으로 받아들일 법한 표현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즉, 중의적인 문장이 오해를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오해하지 않는 문장에 대해 오해를 하는 사람"은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중의적 표현을 쓴 사람이 나쁜 거"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 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중의적 표현에 대해 오해하지 않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평소에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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