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맥락을 모르는 사람
지난 번에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동문서답이 된다는 거다. 나도 어렸을 때 이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눈치가 없고 남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기 중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오류를 많이 일으킨다.
나름 미국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도 이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다. 아래의 영상이 바로 그것이다.
<흑형>이라는 말을 그대로 직역해서 <Black dude>이니 인종차별 단어라는 거다. 그런데 그걸 주장하는 게 바로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게 충격적이다. 흑형이라는 발언에 대한 문화적 맥락을 모르고 그냥 문법적으로 직역해서 비하 발언이라고 하는 것인데, 위의 링크에 설명한 것처럼, 맥락을 전혀 모르고 문법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
나도 외국 생활을 꽤 하다 보니, 1.5세대나 2세대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1.5세대나 2세대 아이들의 단점은 이중언어, 이중문화를 경험해서인지 하나의 문화 하나의 언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나 성인이 된 1.5세대와 2세대 친구들과 대화를 많이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컴플렉스를 이야기하곤 했다.
특히 나는 친구들 중에 중국계 싱가포르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의 고백이 이러했다. 중국어로 대화는 가능하지만,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면 전혀 못 알아듣는다는 거다. 영어로 대화를 해도 표면적인 이야기는 다 알아듣지만, 한계가 있다는 거다. 즉, 양 문화의 경험자이고, 양 언어의 사용자이지만 둘 모두에서 주변인에 머문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대학생이 딱 그런 사람이다. 문화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일단 화를 낸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다.
물론, 이중언어를 사용한 모든 아이들이 저렇게 문화적 주변인에 머물지는 않는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 아이들, 그리고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은 저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특히, 외국에 살면서 한국어로 된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오늘날 한국에 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문해력이 높다.
나는 군대에 들어가며 처음으로 <외국>을 경험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내가 알던 언어와 많이 달랐고, 군대의 문화는 내가 아는 문화와 많이 달랐다. 그리고 나는 강제적으로 이것에 적응해야 했다.
물론,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갈 때마다, 그리고 전학갈 때마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언어에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군대만큼 기존에 존재하는 문화에 외국인처럼 적응해서 들어가야 하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즉, <외국> 또는 다른 나라라고 생각될 정도의 경험은 군대가 처음이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중고등학교에 입학거나 대학교 입학하는 것처럼 넓게 본다면, 이러한 경험은 우리 삶에서 평생 있을 거란 소리다. 교회를 옮길 때마다, 사는 지역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새로 적응해야 한다.
다시 군대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적응>이 무엇인가에 대해 배웠다. 여기서 말하는 적응이란, 기존에 있는 문화를 무지성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상해 보이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화를,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고민해보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군대에서 타부대 파견을 나간 적이 있다. 그때도 전혀 다른 부대 문화에 생경했었다.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고, 걸레를 빠는 등의 문화 양식이 전혀 달랐다. (군대에서는 걸레 빠는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가? 다른 방법으로 걸레를 빨면, 걸레를 아무리 잘 빨아도 욕을 먹는다.) 그런데 각 문화에는 역사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각 문화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는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한 예를 들어보자. 병사들에게 용접을 시키는 부대가 있고, 용접을 시키지 않는 부대가 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 두 부대 사이의 차이는 사고 유무이다. 즉, 용접 사고가 났던 부대는 용접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난 적이 없다면, (안전 불감증으로) 시킨다는 것이다. 즉, 용접 사고라는 역사가 "용접을 시키지 않는다"는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용접을 하던 (그리고 그것으로 포상 휴가를 많이 받았던) 병사가 타부대로 파견을 나갔다고 해보자. 그 부대에서 안전을 이유로 용접을 시키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너무 깐깐하고 딱딱하게 부대를 운용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비행기에 탈 때 무수히 많은 규정들 때문에 피곤함을 느낀다. 왜 보조 배터리는 위탁 수하물로 보낼 수 없는지, 왜 보안 검색대에서 물이 통과될 수 없는지 의아할 때가 많다. 특히나, 비행기에 처음 타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처음 비행기 여행이 가능했을 때는, 지금 우리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듯이 쉽게 탔다는 것을 아는가? 그렇다면 왜 지금은 이렇게 변했는가?
<플레인 센스>라는 책을 보면, 항공에 대한 모든 규정은 피 위에 쓰여졌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한 번 사고가 나고 대참사가 일어나서 바뀐 것이 지금의 항공 규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교회의 교리와 문화는 역사 위에 세워졌다. 교리 같은 경우는 전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쓰여진 것이고, 각 교회의 문화는 각 교회의 문화적 배경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1. 플레인 센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한 것은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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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라면서 문화적 맥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봤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런 사람들이 참 많다.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무지성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 중에는 나도 있었다.
삶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학교에서만, 책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 중에,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일단 나와 다른 것을 이상한 것, 정신병자 같은 것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정신병자 같다는 식으로 욕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나는 신입생, 사회 경험이 없는 사회 초년생, 교회의 문화를 이해 못하고 교회를 욕하는 교회의 청년들을 보면 서툴다는 인상을 받는다.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는 문화에 적응할 생각 자체를 못하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이 가진 서툰 면모가 새로운 문화에 대한 무지성적인 비난이다. (또는 정반대로 추종이다.)
그런데 문화적 맥락을 아예 읽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 사람들을 <평생 서툰 사람>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군기가 센 대학교 학과 학생들을 보면, 우리가 소위 <쓰레기>라고 부르는 인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신입생 때에는 군기를 잡는 선배들을 욕하면서 동기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가장 문제 일으키고 동기를 피곤하게 만든 사람들이 선배가 되어서는 가장 악질 선배가 된다는 거다.
군대에 가보면, 신병일 때는 폐급이었는데 선임이 되어서는 악질이 되는 경우가 참 많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기가 이렇게 악질처럼 후임들 괴롭히는 이유에 대해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이 문화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저 사람들을 보면 문화적 맥락을 전혀 읽을 생각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 군대에 들어가든 대학교에 들어가든 일단 그 문화에 대해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 문제는 그 문화에 적응하고 난 뒤이다. 신입생이나 후임이 들어오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걸 어려워할 거라는 배려가 없다. 즉,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상대방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내 문화적 맥락"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폐급이 악질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꽤 많은 공동체에 익숙해지고 나면, 우리 사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대다수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후에 벌어진다.
젊어서 (강제적으로) 여러 가지 문화를 경험하고 이해하게 된 사람들 중에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마치, 사회 초년생 때 자신감에 넘쳐서 자기가 속한 문화를 무지성적으로 욕하는 서툰 청년과 똑같다. 자신감에 넘쳐서 내가 모르는 문화를 무지성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렸을 적의 서툰 면모가 전혀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만, 문화를 많이 경험해보았을 뿐이다. (그랬기에 신세대 문화를 일단 혐오하고 본다. 즉, 무수히 많은 고기를 가졌지만, 고기 잡는 법은 하나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 게을러지기는 한다. 이미 경험한 문화가 다양하거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들 속에서 너무나 편하게 적응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면 이해할 노력을 하기 어려워 진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너무 익숙하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렵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흑형은 인종차별 발언이다"라는 저 학생과 같이 문화적 맥락을 모르고 헛소리를 난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나는 여기서 "모든 문화는 옳기 때문에 비판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각 문화에는 틀린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내가 말하는 서툰 사람은, 상대방이나 새롭게 접하는 공동체를 이해하려는 마음 없이 무조건적이고 무지성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야 그럴 수 있다. 우리는 다 서툰 시기를 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성을 훈련하고 사회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사회를 이해하는 노력과 기술, 배려를 배워야 한다는 거다. 다시 말해, 자기중적이었던 상태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서툴지 않은 사람, 성숙한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점점 유아적으로 바뀌는 듯하다. 정치권의 싸움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만 해도 점점 유아적인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의 페미니즈은 이렇게 유아적이지 않았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자세였다. 그런데 지금의 페미니즘은 "나는 너를 이해하지 않겠어"라는 자세로 바뀌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회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의료 개혁 사태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없다. 특히나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가들의 모습은 역겨울 때가 많다.
가나안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가나안 성도들과 참 많은 대화를 나눠보았는데, 놀랍게도 이 사람들 중에 거의 대다수가 문화적 맥락을 읽을 줄 모른다. 일단 교회에 대한 비난을 하는데, 제대로 살펴보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들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 사람들은 일단 규칙을 지킬 생각 자체도 없고, (다섯 줄 되는) 규칙을 살펴볼 생각도 없다.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너네는 사랑이 없다"가 전부다. 즉, 이 사람들에게는 "나"만 있고 다른 사람은 없다. 그러니 배려가 없고,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상처를 준다.
그러나 우리는 서툰 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노력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져야 한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