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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당근 Feb 27. 2024

구멍난 복음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19-31]




들어가며


여기에 있는 내용은 아래의 블로그에서 포스팅한 걸 설교로 새로 만든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만 복음을 잘 모르고 유사 복음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꽤 많기에 이렇게 다시 포스팅하고자 한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

작년 말에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사람은 대개 이런 식으로 말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모르겠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올해 목사 안수를 받는 사람이었다. 계속 이야기를 해보니, 복음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복음을 모르니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었다.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면 이 사람의 갈급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굉장히 많다. 특히 복음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을 형성해 나가게 된다. 목사들 중에도 구멍난 복음만 알거나, 유사 복음에 빠져 잘못된 신앙을 형성하는 예가 허다하다. 사실 나도 학부를 신학과 나왔지만, 신대원 가서야 복음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복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우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해온 복음을 동일하게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복음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피상적으로 이해한 복음을 피상적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오늘은 복음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복음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며, 마지막으로 다시,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난 바른 복음과 바른 신앙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로마서를 보면 우리는 복음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


로마서 1장은 이방인들 중에 의인이 없다고 말한다.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 중에도 의인이 없다고 말한다.

로마서 3장은 결국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고, “의인이 없으니 하나도 없다(3:10)”고 말한다.

→ 그렇기 때문에 (3:19) 온 세상이 심판 아래에 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3:21)”고 말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다. → 이것이 복음

둘째, 그래서 자랑할 게 없다. (3:27)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지 알 수 있다.

셋째, 자격이 없는 우리가 자격 있는 자처럼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자격 있는 자처럼 율법을 굳게 세운다. (3:31) →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율법을 세워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세우게 된다.

-> 다시 말해, 믿음과 행위의 순서가 중요하다.
행위가 있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즉,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믿음이 있기에 행위가 생기는 것이다. (즉, 구원에 대한 반응으로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구멍난 복음

안타까운 사실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잘 모르면 구원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알거나 잘못 알게 된다.


복음 또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성경은 이것을 신랑 예수와의 결혼을 비유로 든다.


결혼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식 너머 결혼 생활이 훨씬 중요하다결혼 생활이 지옥 같으면 아무리 결혼식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어도 무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복음을 잘 모르고 구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결혼 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결혼식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하는 결혼 이야기는 알맹이가 쏙 빠져 있는 것과 같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느냐에만 관심을 가지고,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복음은 복음인데, 알맹이가 쏙 빠진 구멍난 복음이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은 우리의 삶, 곧 예수 믿은 이후 신자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구멍난 복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의 삶과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미친다.




복음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

그러면 이제 구원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먼저, 구원을 잘 모르는 사람은 유사 복음에 빠질 수 있다. 유사 복음은 복음과 유사하지만, 복음의 깊은 의미를 담지 못하는 어딘가 부족한 복음, 파편화된 복음이다특히, 복음을 지식적인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 사람들이 믿는 복음이 바로 유사 복음이다.




세 가지 유사 복음

복음을 파편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대개 세 가지 유사 복음, 구원파적 구원론, 개인주의 신앙,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복음을 복음이라 착각한다. 이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오류에 빠져 있는데,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도식이 그것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중간에 많은 게 빠져 있다.


이 사람들에게 구원은 이신칭의 이후 (성화 없이) 바로 천국(영화)으로 가며, 복음은 이 도식의 한계에 갇혀 있다. 천국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생긴 오류이다.


(참고로, 성경 전체가 우리의 복음이다. 천국도 “내세의 천국”만을 믿는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자.)





구원파적 구원론

먼저 구원파적 구원론은 한 번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이상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이다. 실제 구원파의 믿음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개신교 내에서 구원파적 구원론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으로, 잘못된 구원론이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마치, “나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데이트 해도 상관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개인주의 신앙

개인주의 신앙은 한 개인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이제 신앙 생활은 거기서 끝난다. 굳이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신앙은 개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실제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동체를 말하고, 공동체의 사랑을 말한다즉 이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지식에 머무른 복음

복음을 지식적인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도 마찬기지이다.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영지주의 이단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정도 수준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의 신앙에는 삶이 빠져 있다.




게으른 신앙

복음과 구원에 대해 구원파적 구원론, 개인주의 신앙,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복음과 같은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이 믿고 있는 것은 어딘가 부족한 복음, 구멍난 복음이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신앙 모두 게으른 신앙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과거 개혁주의 신자들은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전도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것”이라며 전도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구원 받았으니 이미 다 이루었고 아무 것도 할 게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이상 열심히 신앙생활할 필요가 없기에 게으른 신앙에 빠진다.


이 사람들이 자주 드는 성경 구절이 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맥락을 파악 못하고 원하는 말씀만 가져와 잘못 해석한 것이다. 이 앞구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예수의 주되심”이다. 그런데 예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입으로 시인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냥 사실을 나열하는 건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복음을 총체적으로 믿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가 내 전체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한다.




잘못된 신앙의 케이스들

이러한 어딘가 구멍이 난 복음을 믿게 되면, 잘못된 신앙을 만들어갈 수 있다. 변질된 복음을 믿기에 변질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게으른 신앙

아까도 말했지만,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게으른 신앙에 빠질 수 있다. 구원파적 구원론 수준으로만 복음을 알 경우, 그 사람에게 구원은 이미 쟁취하고 끝난 이야기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교회에 가야 할 이유도 헌금을 해야 할 이유도 봉사를 해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 그러다 천천히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다. 코로나 이후 많은 성도들이 이런 게으른 신앙에 빠졌다. 이중에 많은 사람들이 결국 신앙도 잃어버렸다.


아래의 링크를 보면 잘못된 신앙이 잘못된 예배를 형성하고, 잘못된 예배가 다시 잘못된 신앙을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잘못된 신앙 -> 쇼핑몰 예배 -> 대형교회 예배 -> 코로나 시대의 온라인 예배 -> 가나안 성도 -> 신앙을 잃어버림으로 발전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앙을 격려하기 위한 도구 - 번영신학과 기복주의 신앙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잘못된 복음을 가르쳐서 성도들이 이런 게으른 신앙에 빠지고 만다. 복음에 문제가 생기니까, 그 신앙에도 문제가 생기는 거다. 안타깝게도, 복음을 제대로 모르면 복음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 고치려는 시도들이 한국 교회에 있어 왔다. 게으른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사용되었던 도구가 바로 번영신학과 기복주의 신앙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에 새로운 미끼를 주는 거다.


번영신학은, “빨리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아서” 라고 말하는 게 바로 번영신학이다.
기복주의 신앙은, 예수를 열심히 믿고 교회에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며, 복을 받기 위해 전도와 헌금을 강조한다. 이 사람들은 건강의 복, 관계의 복, 다양한 복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복음보다 복을 더 좋아하다 보면 이상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번영신학과 기복주의 신학은 복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새로운 걸 추가한 거다.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하는 이유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또는 복 받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신앙을 격려하기 위한 도구 - 상급론과 은사주의

게으른 신앙을 교정하기 위한 또 다른 절못된 도구는 상급론과 은사주의이다.


상급론의 경우, 이미 구원을 받은 신자가 내세의 복을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신앙생활해서 천국 가서 상급 받을 수 있냐”는 거다.
은사주의의 경우는 큰 믿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을 가지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믿음 외의 또다른 믿음, 큰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큰 믿음을 가지면 치유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 그리고 방언  등을 가질 수 있다. 때로는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은사를 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하고,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만하게도 은사를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실수가 생긴다.


고린도전서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

고린도전서를 보면 은사를 가지고 자랑하고, 서로 자기가 잘났다며 교회가 분파로 나뉘게 된다. 은사가 교회를 분열시킨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너네가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게 맞아?”, “너네가 복음을 알면 이럴 수 없어”라고 말한다.


지금 바울은 이미 복음을 알고 교회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에게 “너네가 복음을 잘 몰라서 그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인사이트가 있다.


첫째, 우리는 은사를 말할 수는 있지만, 은사주의에 빠지면 복음이 변질된다.

둘째, 구멍난 복음을 믿는다고 지옥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킨다. 이제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나야 한다.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는 케이스들

개혁주의에서는 알미니안과 율법주의 같은 믿음 또한 복음을 잘 알지 못하다고 본다. 물론 알미니안에도 구원이 있다. 알미니안 교회에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알미니안, 율법주의가 이해하는 복음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자칫하다가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위에 보았던 칼빈주의는 게으른 신앙에 빠질 위험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칼빈주의 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칼빈주의를 배격한다.)




알미니안

먼저 알미니안의 경우 구원을 받기 위해 기도 생활, 예배 생활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 만나려면”, “은혜 받으려면” 기도 생활, 말씀 생활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구원을 받기 위한 방법론에 빠진다.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만약 열심히 했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거나 자기 자신을 정죄하게 된다. 오늘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역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예수를 만난 느낌,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예수를 믿으려고 기도도 열심히 해보고, 봉사도 해보고, 헌금도 해보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다. 내 힘으로 믿는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구원과 믿음은 은혜로 주시는 거지, 내가 노력으로 쟁취하는 게 아니다. 이게 잘못되면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정죄한다.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 말씀보지 않아서 그래, 새벽예배 오지 않아서 그래.." 같은 말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쉽게 정죄한다.




율법주의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 율법주의에 빠진 어떤 사람들은 주일에 교회를 빠지거나 십일조를 빼먹으면 구원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복음을 알지만, 복음의 정수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거다.




새로운 복음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교회들도 있다. 어떤 침례교에서는 이미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그건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며 새로운 복음(?), 새로운 구원을 가르치기도 한다. 마치 자기들 교회 외의 교회들에는 구원이 없는 거 같다.


기존에 들었던 복음 외에 새로운 어떤 지식, 어떤 감정, 어떤 느낌을 가져야만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며 기존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새로운 복음, 새로운 구원을 말하면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헷갈리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결국 이 사람들은 분명 복음을 들었지만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해 인간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지만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구원에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구원받지 못한 건 노력이 부족해서야” 라는 생각에 갇히고, 어떠한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노력 -> 실패 -> 절망 -> 노력


이런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복음

그렇다면 개혁주의가 말하는 복음과 구원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개혁주의가 말하는 복음은 성경 전체다. 성경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으니 개인주의 신앙이 나오고, 교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되는 거다.




구원 - 구속사와 구원의 서정

구원은 두 가지 면이 있는데, 하나님의 편에서 보는 구속사와 사람 편에서 보는 구원의 서정이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 편파적으로 보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구원파적 구원론 같은 구멍난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이다.

구속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부터 칭의, 성화, 영화를 포함한다.




신앙과 행위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앙은 행위를 강조하지 않을까? 앞의 잘못된 신앙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아니면 더 큰 은혜를 누리기 위해 행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받지 않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아무리 개차반으로 살아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지 않느냐. 그러니까 착하게 살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느냐” 이렇게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개혁주의 신앙은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 이를 위한 동인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감사하기 때문에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감사가 없다면 복음을 제대로 아는 게 맞는지 스스로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둘째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님을 닮고 싶어서이다. 양자된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닮기 위해 선한 행동을 한다.


셋째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의 나라가 없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것은, 의사가 뭔지 모르고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 내용에 대해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자.)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천국 시민으로서의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천국을 열망하지 않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결국, 복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만약, 반응이 없다면 우리가 제대로 복음을 아는지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이 어느새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론 - 순종하는 자녀


결국 개혁주의 신앙은 그냥 자녀가 아닌 순종하는 자녀가 되라고 촉구한다.

[벧전1:14-16]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이해해야 한다.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마느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예배하거나, 열심히 제사를 드리면,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예수가 오기 전, 구약의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예수를 믿는 너희는 이미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자녀답게 살라고 말하는 거다.


옛날에 어떤 노예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노예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어릴때부터 천대 받고 노예생활 하면서 그렇게 늘 억눌리고 학대 받고 매 맞고 살아왔다. 아버지가 노예였으니, 자기도 노예이고, 또 자기가 낳는 자녀도 자기처럼 노예가 되어서 영원히 이 노예의 집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이 휴가도 없고, 월급도 없는 그런 종노릇을 평생, 대대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 나라의 왕이 이 노예를 고귀한 왕자로 입양했다. 그런데 이 노예가 고귀한 왕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노예처럼 손으로 밥 먹고 주눅 들어 살고 있었다. 신분이 뒤바뀌었는데 여전히 노예처럼 살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귀한 왕자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고귀한 왕자처럼 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고귀한 왕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비천한 노예처럼 살면 왕자가 되는 게 뭐가 중요하냐는 거다.


결혼식보다 결혼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구원의 시점보다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정리하며

이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겠다.


첫째로, 잘못된 구원론이 잘못된 신앙을 형성한다.


둘째로, 결혼식의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배우자와의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구원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회복이다. 그런데 잘못된 구원론은 결혼식에만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사랑보다 “어떻게 하면 결혼을 쟁취할 수 있을까”에만 과도하게 관심을 기울이면 그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야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지 결혼식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를 넘어 성경이 말하는 총체적인 복음 -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지체들에 대한 사랑에 열망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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