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뿌리 박은 비전
훈민정음 서론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아래의 내용은 훈민정음 서론의 일부이다.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日用耳.
그리고 이것은 그 번역이다.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만들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참고로 출처는 아래와 같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훈민정음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훈민정음 서론을 보면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시대적 상황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즉, 훈민정음 서론에는 문제 인식과 그로 인한 해결책이 매우 명료하게 나와 있다.
훈민정음의 문제 상황은 이렇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으니, 백성들이 제 뜻을 이야기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도 명료하다. "그래서 백성들이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정한 문제 상황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비전을 품고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한글이다.
복음도 비슷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인간의 비참함, 곧 죄 인식이 복음보다 앞에 나온다. 이것은 문제 인식이다. 문제를 인식해야 그 해결책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의 죄성을 모르고 문제 인식이 안 되는 사람에게 아무리 해결책을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자와 복음주의자들이 그렇게 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는 거다.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복음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복음은 결국 유사 복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 번영신학이니 치유의 복음이니 뭐니 하는 걸로 말이다.
마찬가지로 비전이라는 것은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다.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게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만드는 것이 비전이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보자.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꿈꾸는 게 비전이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비전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전을 가지려면 현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 인식이 전혀 안 되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비전이 없어요"라고 말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비전을 심어주려면 먼저 아이들에게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한동안 청소년들에게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지는 못하면서)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말만 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청소년들이 자라서 "교회에서 비전 좀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 같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사실, "비전을 품어라"라는 말이 통하던 때가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 중 극소수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문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모범이 되었으니, 비전에 대한 촉구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뭐, 사역자가 문제 인식을 대신 해줄 수는 없는 일이긴 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사역자들이 아이들의 상황을 완전히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역자들이 아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책임을 지겠는가 말이다. 셋째로, 사역자라고 해도 결국 타인인데 아이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존재한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대개 "너네의 삶의 자리에서 비전을 찾아야 한다"며 촉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보니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문제 인식 없이 뜬구름 잡는 비전을 품어야 했다. 그 결과 비전을 품는답시고 가진다는 게 좋은 대학 가는 거나 신학교 가는 게 전부였다. 문제 인식이 안 된 상황에서 학교만 다니는 아이들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학교 밖을 모르는 아이들이 가지는 문제 인식이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게 청소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인식하는 힘을 교회가 키워줘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 성도가 알아서 문제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성도들은 문제를 인식할 능력이 없었고, 결론적으로 부자되기나 성공하기라는 나름의 비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성도들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대다수의 목사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삶을 모르고 현실을 모르니 문제를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비전과 목회 철학을 이야기할 때 “큰 사람이 되는 것”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는 것” “말씀” 같은 구름을 노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전혀 삶에 연결할 수 없는 공허한 말이다.
이 상황은 목회 철학을 보면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목회 철학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말씀 중심>이 그것이다. 심지어 유학을 다녀오고 박사 과정을 마친 목사들도 이 수준에 머무른 경우가 많다. 말씀을 전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뭐, 1970년대라면 이게 시대의 필요가 낳은 목회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말씀이 희귀하지 않았는가.)
아래의 링크를 보면, 구체성이 없는 목회 철학은 실패한 목회 철학이라고 말한다. 현실을 모르니 비전이 없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게 없으니,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그냥 말씀 중심 목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 중심 목회가 아닌 목회가 있던가?
거북선을 생각해보자. 오늘날 한국인들은 거북선이 그냥 시대적 상황과 상관없이 그냥 대단한 전투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래의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거북선도 시대적 산물이었다.
이걸 목회 철학으로 바꾸어 보자. "전투에서 승리하자"라는 게 이순신의 비전이었다고 해보자. 목회 철학으로 바꾸면, "전투에서 승리하자 = 말씀 중심 교회를 만들자"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떻게"가 없다. 어떤 승리할 것인가? 여기에는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전투에서 승리하자"라는 건 적군과 아군 상관 없이 모든 군인이 가져야 하는 당연한 비전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친다면, "과연 이 사람이 이길 생각은 있는 건가?"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순신은 세키부네(일본의 배)와 일본군이라고 하는 주어진 상황과 문제에 거북선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세키부네와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거북선과 같은 배가 필요하다 라는 게 이순신의 방법론이었다. 마찬가지로 시대를 읽고, 이 시대에 대응하는 목회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그냥 "말씀 중심"이라는 맹한 소리만 하는 거다.
비전을 가지기 위해서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를 인식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이 있을 때 비로소 비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때로는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어", "온 세상의 가난함을 없애겠어", "온 세상의 아이들이 학대를 받지 않게 하겠어" 같은 거창한 문제 인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 인식은 허무맹랑하다. 그렇다면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비전이 없는 걸까?
저렇게 거창한 말만 하고 아무 것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전이 없는 거다. 그냥 입만 산 거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주변의 학대 받는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온 세상의 아이들이 학대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아이의 학대를 끊겠다"는 구체성이 있다면 비전대로 살고 있는 거다.
반대로 구름 위를 거니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친구에게 전도도 하지 않으면서 "선교를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거창한 꿈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거창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도대체 그 사람이 말하는 "선교"와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