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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피 Sep 03. 2018

레포츠의 천국이라며?

외지인의 도시 산힐, 왠지 의심스러운 첫인상


가파른 오르막길 가까스로 도착한 산힐


덜컹거리는 미니 밴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4개의 엉덩이만을 수용할 수 있는 밴의 맨 뒷자리에는 수용 인원을 초과한 5개의 엉덩이가 구깃구깃 들어앉아 있었다. 두 좌석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진 두 쪽의 엉덩이, 목이며 어깨며 하물며 잔뜩 굽어진 다리까지. 이렇게 잠드는 게 나을까, 저렇게 잠드는 게 나을까. 조금씩 몸을 뒤틀 때마다 엉덩이인지 허리인지 모를 딱딱하고 뾰족한 그 부근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태울 사람이 있으면 세우고 내릴 사람이 있으면 또 세우는 콜롬비아의 독특한 대중교통 시스템에 그새 익숙해진 걸까.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까지 숱하게 멈춰 사람을 내리고, 또 태우는 미니 밴의 분주함에도 감긴 눈은 쉽게 뜨이지 않았다.


앞줄에 앉은 여자아이는 차가 멈출 때마다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꾸벅꾸벅 조는 우리를 향해 손 인사를 건네왔다. 감긴 눈꺼풀을 중간중간 천천히 밀어 올릴 때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을 맞추던 소녀는 이 여정이 지치지도 않는지, 언제나 생긋 웃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스르륵 잠에 빠지기를 몇 번째. 드디어 아르카부코에 다다랐다.



비야 데 레이바 터미널에서 산힐행 버스표를 구매할 때였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았던 우리는 매일 아침 터미널을 찾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작은 마을의 작은 터미널에는 아침 일찍부터 이 사람 저 사람이 모인다. 마을에 막 도착한 사람, 마을을 막 떠나려는 사람,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사람,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가는 사람. 그중 마주친 눈길을, 어색하고 어눌한 언어로 걸어오는 대화를 외면하는 이는 없었다. 


“끼에로 이르 아 산힐!(산힐에 가고 싶어요!)”

“돈데 뿌에도 꼼쁘라르 엘 볼레또? 빠라 산힐!(표는 어디에서 살 수 있죠? 산힐로 가는 거요!)”

터미널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이에게 달려가 묻는다. 보고타에서 비야 데 레이바로 넘어오며 우리가 익힌 말이고 태도다. 버스 회사별로 각각 창구를 운행하는 콜롬비아 터미널은 복잡하고 낯설다. 길게 늘어선 줄 중 어떤 줄을 선택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는 도움을 청하면 된다.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이는 없다.


단 몇 마디면 주변의 열댓 명은 우리의 목적지를 알게 되고, 너덧 명은 여기가 맞네 저기가 맞네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를 꼭 맞는 창구 앞까지 안내해 준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들의 호의에 오히려 우물쭈물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우리였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우리에게 그들은 단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다. 버스 운전 기사에게 다시 한번 우리의 목적지를 확인하는 것까지 놓치지 않는다. 


정말이지 고마운 사람들.



잠에 취해 횡설수설 아르코부코가 맞냐고 묻는 우리가 영 못 미더웠는지, 기사 아저씨는 짐을 내리며 앞에 보이는 큰 버스를 거듭 가리켰다. 그러니까 저 버스를 타야 산힐에 갈 수 있다는 말이지? 터미널에 정차해 있는 버스는 아저씨가 거듭 산힐이라고 가리키던 한 대뿐이었음에도 뭐가 그리 불안했는지, 연신 문 앞을 서성이는 우리에게 한 커플이 다가왔다. 


“이거 산힐 가는 버스 맞을 거예요.”

“이 버스밖에 없으니까 맞겠죠? 그냥 조금 불안해서요. 저희가 버스 스케줄을 잘 몰라서요.”

“우리도 산힐 가거든요. 금방 출발하지 않을까요?”

동행자가 생겼다는 안도감에 마음 편히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안은 이미 먼 길을 달려온 것인지 담요를 푹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이들의 피로로 가득했다. 큼지막한 버스의 좌석은 푹신했고 제법 포근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사방은 금세 어둑해지고 에어컨을 틀어 놓은 버스 내부에 한기가 몰려왔다. 안팎의 온도 차가 심한지 창문에 습기가 잔뜩 끼어 시야가 온통 뿌옇게 흐렸다. 흘러내려 간 담요를 목 바로 아래까지 추슬러 올린 채 다시 눈을 감았다.


“내려야 해! 산힐이래!”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기사 아저씨가 우리를 깨우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나쳤을 거다. 헐레벌떡 가방을 챙겨 들고 내렸다. 거리 한가운데, 정말 거리 한가운데 뚝 떨어졌다. 상점도 빛도 사람도 없는 곳. 호스텔을 구하지 못해 우리를 따라나서겠다는 아르카부코 커플의 말에 올바른 목적지로 안내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라도 생긴 걸까. 큰 키에 긴 다리로 척척 뒤따라오는 그들의 앞을 종종거리며 서둘러 걸었다.


터미널에서 마을로 진입하는 길에는 인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건 정비소와 사람이 없는 노점, 달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한참 차도를 따라 걷다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새까만 강이 하나 나온다. 그리고 강을 가로질러 나있는 합판으로 만들어진 다리 하나.


과연 저 다리가 다섯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합판은 지나치게 연약해 보였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강은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고 있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밤, 거리는 고요했다. 반쯤이나 왔을까 싶었다. 걸어서 20분, 가뿐한 거리라 생각했건만 역시나 배낭과 함께 걷는 건 아직 벅찼다. 게다가 눈 앞에 펼쳐진 이 경사는 또 무언가. 


엄청난 오르막길을 네 블록이나 걸어 올랐다. 배낭 무게에 뒤로 넘어가는 건 아닐까, 절로 무릎에 손이 갔다.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비로소 잔뜩 굽은 허리를 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위로 비죽 솟은 배낭에 뒤통수가 닿아 쉽지 않았지만.



‘레포츠의 천국이라며!’

평화롭고 고요한 작은 마을, 저렴한 가격으로 물에서도 하늘에서도 놀 수 있는 마을. 모두가 들리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마을이라던 산힐의 첫 인상은 그저 어두컴컴한, 안전하게 레포츠를 즐기는 게 가능할까 의심이 드는 곳이었다.


길고 길었던 오르막길의 끝에는 반짝이는 조명으로 치장한 예수의 얼굴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 간간히 지나가는 오토바이. 어딘가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풍경에 고요는 왜인지 께름칙한 존재가 되었다.

여기는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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