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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웅 Aug 15. 2022

103 북동포루는 왜 안팎 지붕이
다른 모양일까?

覘正祖之圖 : 정조를 엿보다-103

북동포루는 왜 안팎 지붕 모양이 다를까?-후편


전편에 이어 지붕 재료 "기와 공급" 문제부터 시작합니다. 


셋째, "기와 공급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을묘원행 시 임금이 보아야 할 시설물은 장안문, 팔달문, 화홍문, 남수문, 서장대, 북동포루, 북서포루로 정해져 있다. 을묘년 1795년 2월까지 만 1년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혹서기와 동절기 공사 중지를 감안하면 불가능한 일정이다. 실제 여름 보름과 겨울 5개월을 중단(停役)하였다. 


건설공사는 시작이 매우 어렵다. 초기에 각종 준비가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측량, 지질조사, 배치설계, 인력 모집, 인부 숙소, 치석소, 치목소, 벽돌 공장, 가설도로 등 건설, 공사용수, 운반장비 등 준비가 꽤 많다.


본 공사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임금의 방문이란 중대 이벤트 때문에 장안문과 팔달문은 9월 5일과 16일에 누각을 완공하였고, 서장대는 9월 16일 상량(上樑)이 있었다. 그리고 북동포루와 북서포루는 9월 23일, 24일 완공되었다. 


왜 여러 자재 중 기와만 공급에 문제가 생겼을까? 

북동포루와 북서포루 지붕공사 전 대규모 장안문과 팔달문 지붕공사를 하였다. 

성(城)과 육축(陸築) 공사에는 석재가, 문루에는 목재가, 지붕 공사에는 기와가 쓰인다. 지붕공사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8월 25일부터 9월 15일까지 진행되고, 이어서 북동포루와 북서포루가 9월 16일부터 9월 24일 사이에 시공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기와 공급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유를 보자.


첫째, 기와공사 시기가 장안문과 팔달문이 겹치고, 북동포루와 북서포루도 겹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8월 25일부터 9월 24일까지 1개월 이내에 몰려있다. 그만큼 기와 수요가 집중되었다는 말이다. 같은 시기에 함께 시공한 장안문과 팔달문 지붕공사는 조선 최대 규모였다. 그것도 짧은 시간 내에 완성해야 했다. 이 말은 단기간에 조선 최대의 기와 물량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당시 기와 제작기술이 낮았고, 숙련된 인력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동원 인원을 보면, 석공이 642인, 목수가 335인, 와벽장이 150인으로 화성에 동원된 직종 중 3위를  차지했다. 책임자 편수(邊首)는 목수 편수보다 오히려 2명이 더 많았다. 가뜩이나 없는데 숙련 인력이 많이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셋째, 당시 기와 굽기에 시일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방식은 "가마 1곳에 대략 800 내지 900장이 구워진다. 불을 붙인 뒤 4일 만에 불을 끄고(起火四日), 또 6일 만에 가마를 열고(及又六日開釜), 다시 2일이 지난 뒤에 가마에서 꺼내었다(又歷二日然後出釜中)"라 설명한다. 즉 제작 공정이 길었다는 의미다. 


가마 1곳에 12일이 걸려야 기와 850장이 나오니 1일 70장 꼴이다. 팔달문과 장안문 2곳에 기와 12만 장이 같은 시기에 동시에 필요했다. 가마가 1개 경우 1,700일, 즉 4년 반이 걸린다. 지금과 제작 방식과 규모에서 차이가 있어 생산에 시일이 많이 걸렸다. 

당시에 기와를 만드는 방식이 지금과 달라 생산량이 미미했다.

이를 감안하면 착공하자마자 기와 제작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굽는 것뿐 아니라, 6, 7, 8월은 장마철이라 기와 재료인 흙을 채취하고, 보관하고, 성형(成形)하고, 건조하는 기간도 많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기와 공급에 하루하루 피가 말랐을 것이 눈에 선하다.


팔달문과 장안문에서 기와 공급이 지체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곧 시작될 북동포루와 북서포루의 지붕공사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에 북동포루와 북서포루 담당 감동은 지붕 한쪽을 우진각에서 맞배지붕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도 적의 방향이 아닌 성안 쪽 지붕만 바꾼 것이다.


이렇게 북동포루 맞배지붕이 탄생한 것이다. 그야말로 임금이 못 박은 완공 날자를 지키려는 고육책(苦肉之策)이었다. 같은 날 착공한 팔달문이 장안문보다 11일 늦게 완공된 것도 기와 때문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맞배지붕으로 바꾼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기와 수요를 몇 장이라도 줄여보려 안간힘을 쓴 것이 느껴진다. 한쪽이 맞배인 북동포루에 기와가 2,900장이 투입되었다. 양쪽이 우진각 지붕인 남포루에 4,800장, 동포루에 5,000장이 투입되었다. 차이가 2,000장, 즉 1 눌(訥)이다. 덜 쓰인 2,000장은 가마 1곳에서 굽는데 만 29일이 걸린다.


정리하면, 장안문, 팔달문, 북동포루, 북서포루는 파일럿 프로젝트의 대상이고, 목표는 1년이었다. 착공 1년 후를 정조의 "을묘원행" 날로 정한 것이다. 대규모 장안문, 팔달문 지붕공사로 기와 공급에 문제가 생겨 목표일을 맞추기 힘들어졌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성안 쪽 우진각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바꾼 것이다.

한쪽 맞배지붕인 이형 형식은 포루 자체로 따져 볼 문제가 아니다.

한쪽이 맞배지붕이 된 몇몇 다른 이유도 상정할 수 있다. 이유와 타당성을 살펴보자.


하나는, 디자인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을 가능성이다. 흔히 당시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북동포루 이후 조선에서 이런 이형(異形) 디자인을 한 지붕이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조(營造) 규범이 계속 잘 지켜졌다. 이때 르네상스라 불린 것은 디자인보다 실학 영향으로 중국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성안 내탁(內托)을 활용하는데 문제가 안 생기도록 지붕을 수직으로 깎았을 가능성이다. 정조도 내탁을 "말 5 필과 수레 2채가 다닐 정도의 넓이로 만들라"하였다. 내탁 위로 말이 달리고 수레가 오가는데 돌출된 우진각 지붕이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 또한 타당성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맞배지붕이던 우진각 지붕이던 처마가 내탁부로 침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쪽이 우진각 지붕인 서포루, 남포루, 동포루 모두 지붕이 내탁부로 돌출되지 않았다. 


또 다른 하나는, 목재 공급이 지연됐을 가능성이다. 하지만 타당성이 약하다. 왜냐하면 목재는 시일이 소요되는 굽는 과정이 없고, 공급처도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로 다변화되어 공급 리스크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북동포루의 맞배지붕의 출현은 을묘원행, 화성 파일럿 프로젝트 시행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북동포루와 북서포루의 맞배지붕 문제는 포루 자체 문제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래서 지금껏 풀지 못했던 미스터리로 있었던 것이다. 60개 시설물 중 장안문과 팔달문 다음으로 완공된 시설물이란 특수성, 착공 후 1년 이내에 완성해야 했던 점, 대규모 지붕공사가 몰린 점 등 다각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북동포루 맞배지붕의 변경 이유를 을묘원행에서 찾아보았다. 행행(幸行)의 1차 목적은 아버님 능 참배이다. 2차 목적은 봉수당 진찬연(進饌宴)과 득중정 매화(埋火) 놀이로 어머니와의 기억을 남기고, 낙남헌 방방(放榜)과 양로연(養老宴)으로 수원 백성과의 추억을 만드는 것이었다. 


3차 목적은 군사훈련인 서장대 성조(城操), 야조(夜操)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최종 목적은 "을묘원행"을 화성 성역 "파일럿 프로젝트 목표일"로 정한 것이다. 당시 정조의 최상위 관심은 오로지 "화성성역(華城城役)"이었다. 


북동포루와 북서포루 맞배지붕에서 정조(正祖)의 "을묘원행(乙卯園行)" 최종 목표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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