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의 여정 중에서
새로운 인간을 낳는다는 것은, 군중의 기대를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양치기가 되어서도 무덤 파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 다시는 군중과 말하지 않으리라. 죽은 자와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와 함께하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초인에 이르는 계단을 보여주리라. 혼자 있는 은둔자와 둘이서 지내는 은둔자에게 나의 노래를 들려주리라. 그리고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것을 들을 귀를 가진 자의 마음에 나의 행복을 가득 채워주리라. 나는 나의 목표를 향해 나의 길을 가련다. 머뭇거리는 자와 게으른 자는 뛰어넘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리라.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이 문장은, 스스로의 존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단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양치기처럼 군중을 돌보는 역할도, 죽은 자의 기억을 파헤치는 묘지기가 되는 일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는 과거의 가치와 타인의 시선을 떠받치는 삶에서 벗어나겠다는 고백이며, 더 나아가 군중이 기대하는 역할 자체를 거부하는 의지의 발언이다. 군중과 죽은 자는 모두 이미 굳어버린 세상의 상징이고, 그는 그 세상과 말하기를 끝내겠다고 결심한다.
그 대신 그는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는 자들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한다.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와 같은 이들은 정지된 세상이 아니라 생성으로 가는 길에 발 딛고 있는 존재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무지개, 즉 새로운 가치의 다리를 보여주고, 그 다리가 초인으로 이어지는 계단임을 알려주고자 한다. 무지개는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빛의 현상처럼, 기존의 세상에서는 감히 붙잡을 수 없지만 새로운 감각과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가능성의 표식이다.
그의 노래는 혼자 있는 은둔자뿐 아니라 둘이서 지내는 은둔자에게도 들려준다. 이는 완전히 고립된 외톨이뿐 아니라, 공동체를 떠나 조용한 삶을 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가치가 스며들 수 있음을 암시한다. 중요한 것은 고립의 정도가 아니라, "들어본 적 없는 것을 들을 귀"를 가진 마음이다.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귀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의 속삭임을 감지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그는 자신의 길을 향해 단호하게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길은 머뭇거리는 자와 게으른 자에게는 몰락의 길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잔혹한 말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타인을 심판하는 데 있지 않다. 새로운 가치의 길은 기존의 안락함 속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길은 누군가를 떨어뜨리기 위한 길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를 넘어서는 자만이 걸을 수 있는 길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다짐하는 것과도 같다.
차라투스트라의 깨달음은 전체적으로 ‘자기 초월’을 향한 단단한 결심의 기록이다. 그에게 있어 삶은 정지된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하는 운동이며, 그 운동 속에서 인간은 과거의 가치 속에서 사라져버린 존재가 아니라 자신만의 색을 지닌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가 말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따라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욕망, 아직 등장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손을 뻗는 감수성만이 그 길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는 그 길을 걸으며, 들을 귀를 가진 이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들려주려 한다.
결국 이 여정은 단순히 한 인간의 독백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조용한 초대를 의미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가치에 기대어 살아가며, 어떤 세계를 향해 내딛기를 바라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차라투스트라가 건넨 물음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도 다시 태어난다. ‘너는 지금의 너를 넘어서려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스스로의 답을 만들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더 단단한 자기 자신이 되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눈을 뜨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종종 더 나은 변화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곤 한다. 간혹 ‘과거의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 것도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창조 역시 만족과 위로의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느낀다. 익숙한 공동체의 균열, 기존 가치의 붕괴,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고독을 경험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성의 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