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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시간 - 003] ‘에브리띵 이즈 파인’

지나치게 괜찮은 순간, 의심해야 할 문장 '에브리띵 이즈 파인'

by 나무를심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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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 보이는 그림과, 평범해 보이는 일상으로, 평범하지 않은 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평범한 듯 표현하는 작품이 있다. 모든 것이 좋을 것만 같은 작품 속 세상은 어째서인지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긴장되고 불편하면서도 묘한 이끌림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그런 작품이다.


영국 작가 마이클 버첼의 웹툰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큰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지나치게 단정하고 안정적인 화면, 부자연스러운 웃음기가 고정된 얼굴들, 규칙적인 일상과 반복되는 대사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이질감을 천천히 증폭시킨다. 그리고 그 이질감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감은 어느 순간 ‘작품 속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나는 『에브리띵 이즈 파인』을 단순한 디스토피아 웹툰이나 장르적 실험작으로 소비하는 데서 벗어나, 이 작품이 어떻게 현대 사회의 정치·사회적 시스템을 정서의 차원에서 해부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밝은 얼굴 뒤의 폭력적 시스템’이라는 핵심 명제를 중심으로, 감시와 동조, 정서 규범이 웹툰이라는 매체 문법과 어떻게 결합되어 작동하는지, 그리고 이 작품이 글로벌 웹툰 생태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단계적으로 살펴보며 고찰해 보면 어떨까 한다.


평범함이라는 위장, 『에브리띵 이즈 파인』의 세계와 외형


『에브리띵 이즈 파인』의 첫인상은 놀라울 정도로 무난하다. 선은 단순하고 색채는 부드럽다. 화면 구성은 정갈하며, 인물들은 과장되지 않은 일상적 공간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집, 직장, 이웃과 거리를 통해 보여지는 작품 속 세상은 우리가 이미 수없이 접해 온 ‘일반적인 사회’의 풍경과 거의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를 방심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시작된다. 디스토피아 장르가 흔히 택하는 극단적 설정이나 파괴된 세계관, 폭력적 이미지 대신,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지나치게 안정적인 외형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곧 끝없이 이어지는 불안의 원천이 된다. 모든 인물은 웃는 얼굴의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으며, 그것은 꾸밈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 규칙이다. 웃지 않는 얼굴은 곧 규칙 위반이며, 규칙 위반은 설명 없이 처벌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벌의 방식이다. 이 세계에서 폭력은 공개적으로 행사되지 않는다. 폭력은 말해지지 않고, 보여지지 않으며, 다만 ‘사라짐’의 형태로 암시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불편함을 상상하도록 강요하며, 그 상상은 언제나 실제 장면보다 더 큰 공포로 이어지게 된다.


작품은 특정 문화권의 역사나 정치적 사건에 깊이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정서적 압력’을 전면에 내세운다. 2021년 영어 연재를 시작으로 빠르게 글로벌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 보편적인 외형에 있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고, 누적 조회 수 1억 뷰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단순한 흥행 수치가 아니라, 작품이 다루는 비밀스러운 불안의 형태가 국경을 넘어 공유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감정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관리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웃음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며, 긍정은 태도가 아니라 규칙이다. 이러한 설정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강화되고 있는 정서 규범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종종 밝음과 긍정을 미덕으로 요구받으며, 불안이나 분노, 슬픔은 개인의 결함처럼 취급된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며 극단화함으로써,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얼마나 폭력적인 구조 위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웹툰이라는 형식 역시 이 세계관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컷과 컷 사이의 여백,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스크롤을 내릴수록 이어지는 동일한 풍경은 독자를 작품 속 세계의 주민으로 만든다. 독자는 어느 순간 세계관의 규칙을 이해하게 되고, 심지어 그것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불편함은 최고조로 심화된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이 만들어내는 공포는 모든 것이 괜찮을 것만 같은 세상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가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감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의 1차적인 성취는, 평범함이라는 외형을 통해 독자를 안심시키고, 그 안심 위에 서서히 균열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작가는 처음부터 세상 속 일상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 유지 자체가 폭력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쯤에서 이 ‘유지되는 세계’가 어떤 정치·사회적 메커니즘 위에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웹툰 문법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분석할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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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는 어떻게 웃음이 되었는가? 동조와 정서 규범의 정치학


『에브리띵 이즈 파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공포는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징후가 아니라, 감시자가 보이지 않음에도 모두가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이 세계에는 CCTV나 명시적 권력자의 얼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표정을 의식하고, 웃음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타인의 얼굴을 살핀다. 감시는 외부에 있지 않고, 이미 내부화되어 있다.


이러한 감시의 양상은 미셸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의 작동 방식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전통적인 감옥이나 학교, 병원과 같은 제도적 공간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감시는 일상의 가장 사소한 장면 속에 스며 있다. 출근길의 인사, 이웃과의 대화, 직장에서의 잡담. 모든 장면은 평온하지만, 동시에 규범을 점검하는 시험대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기분 좋은 태도’라는 점이다. 법을 어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제나 밝아야 하고, 긍정적이어야 하며, 불안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즉, 이 사회는 행위를 통제하는 수준을 넘어 감정 자체를 통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강화되고 있는 정서 관리의 정치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의 세계에서 동조는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 제시된다. 웃지 않는 얼굴은 곧 위험 신호이며, 질문을 던지는 태도는 ‘분위기를 망치는 행위’로 간주된다. 따라서 인물들은 체제에 저항하기보다 체제에 적응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이 과정에서 폭력은 더욱 은폐된다. 처벌은 설명되지 않고, 제거는 조용히 이루어지며, 남은 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웹툰이 가지는 형식적 선택은 이러한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한다. 반복되는 컷 구성과 유사한 장면의 나열은 독자로 하여금 서사적 진전을 기대하지 않게 만든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독자는 ‘이 세계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규칙을 학습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 인물들이 체제의 불합리를 인식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상태와 평행을 이룬다.


캐릭터의 평면성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의 인물들은 복잡한 내면 독백이나 극적인 감정 변화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서사의 약점이 아니라, 감정 표현이 억제된 사회의 결과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을 표현하지 않는 법을 학습한 존재들이다. 이 침묵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인 셈이다.


작품이 불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는 악당을 명확히 지목할 수 없다. 폭력의 주체는 보이지 않고, 피해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모호함 속에서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해짐이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번역된 불안, 한국 사회의 정서 규범과 『에브리띵 이즈 파인』의 재독해


2022년 12월 말,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네이버웹툰을 통해 한국어 번역 연재를 시작했다. 이 시점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수용 맥락을 고려하면 상징적이다. 팬데믹 이후 한국 사회는 ‘회복’과 ‘정상화’라는 언어를 앞세우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었고, 동시에 개인에게는 이전보다 더 강한 정서 관리가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외국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체감되고 있던 현실의 은유로 읽히기 시작한다.


한국 독자들이 이 작품에서 즉각적으로 포착한 것은 거대한 정치 시스템보다도,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미세한 압력이었다. 회사에서의 표정 관리, 학교에서의 분위기 읽기, 온라인 공간에서의 감정 조절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경험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이 웃는 얼굴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 사라지는 장면은, 한국 사회에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변부로 밀려나는지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감정 노동의 문제는 『에브리띵 이즈 파인』을 한국적으로 읽게 만드는 핵심 키워드다. 서비스직 노동자뿐 아니라, 사무직과 플랫폼 노동자, 심지어 학생들까지도 일정한 태도와 감정을 요구받는 사회에서, 웃음은 자발적 표현이 아니라 업무의 일부가 된다. 작품 속 웃는 가면은 이와 같은 현실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한 장치로 기능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독자들의 반응이 이 작품을 명확한 메시지로 해석하기보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댓글과 커뮤니티에서는 작품의 설정을 분석하기보다는, “이상한데 계속 보게 된다”, “왜인지 모르게 숨이 막힌다”와 같은 반응이 반복된다. 이는 작품이 의도적으로 서사를 열어두고,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투사할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행위 역시 이 수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영어 원작이지만, 한국어 번역을 통해 새로운 정서적 결을 획득한다. ‘괜찮아’, ‘문제없어’와 같은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자주 사용되며, 때로는 대화를 종결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작품의 제목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의 언어로 변환된다.


이처럼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번역을 통해 의미가 약화되기보다 오히려 증폭된다. 이는 글로벌 웹툰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특정 문화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새로운 공명을 일으키며 재해석되는 과정은, 웹툰이 가진 확장성과 유연성을 잘 보여준다. 한국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외국 작품을 본다’기보다는, ‘우리 이야기를 해외 작가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이 지닌 가장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이 작품이 특정 문화권의 특수한 경험을 다루면서도 글로벌 독자에게 보편적으로 읽힐 수 있는 언어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이 보편성은 추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구체적인 일상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출근길의 대화, 이웃 간의 인사, 직장 내의 잡담처럼 누구에게나 익숙한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독자는 이 세계를 ‘낯선 디스토피아’가 아닌 ‘조금 과장된 현실’로 인식하게 된다.


영어권 창작자가 웹툰이라는 형식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이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은, 웹툰 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상징한다. 한때 웹툰은 한국의 새로운 디지털 만화 형식으로 인식되었으나, 이제는 글로벌 플랫폼 위에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교차하는 스토리텔링의 서사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이러한 전환기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이 2021년 영어 연재를 시작한 이후 다양한 국가의 언어로 번역되며 상당히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인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글로벌 독자들이 이 작품을 ‘영국 작가의 이야기’로 소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작품의 5회 차 정도를 읽은 동안은 한국의 괜찮은 신인이 등장했구나.. 싶었다.


웹툰이라는 형식 역시 이 글로벌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통적인 그래픽노블이나 만화책과 달리, 웹툰은 플랫폼을 통해 즉각적으로 번역·유통되며, 연속 스크롤이라는 공통의 읽기 경험을 제공한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이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문화적 맥락이 달라도 동일한 리듬과 긴장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각 언어권에서 작품이 읽히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겠겠지만, 공통적으로 포착된 정서는 ‘설명되지 않는 압박감’이라는 점에 주목할만 하다. 이는 웹툰이 단순히 디지털화된 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 언어 체계임을 보여준다.


글로벌 웹툰 생태계에서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장르적 실험과 대중적 접근성을 동시에 확보한 드문 작품이다. 과도한 설명이나 메시지의 강요 없이, 불안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며, 각 문화권의 독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투사할 수 있는 여백을 남긴다. 이러한 전략은 앞으로의 글로벌 웹툰이 나아갈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2022년 미국 하비상 ‘올해의 디지털 도서’ 부문 노미네이트는 이러한 성취를 제도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다. 하비상은 전통적으로 만화와 그래픽노블, 시각 서사를 예술적·문학적으로 평가해 온 상이다. 이 무대에서 웹툰 작품이 주목받았다는 사실은, 웹툰이 더 이상 주변적 형식이 아니라 현대 서사의 중요한 축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의 노미네이트는 특정 작품의 성공을 넘어, 웹툰 매체 전체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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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괜찮다는 말의 잔혹함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끝까지 친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명확하게 규정해 주지 않으며, 체제를 전복하는 통쾌한 장면도, 거대한 각성의 순간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문장을 반복한다. 모든 것이 괜찮다는 말, 아무 문제도 없다는 말,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는 말. 그리고 바로 그 말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조용히 증명해 보인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이 동시대 웹툰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폭력을 감정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웹툰이 그려내는 폭력은 개인의 성격이나 선택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스템의 문제이며, 정서 규범이 제도처럼 작동하는 사회의 구조적 결과다. 웃음은 더 이상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 되고, 긍정은 미덕이 아니라 검열의 언어가 된다. 독자는 읽는 동안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쉽게 페이지를 닫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계가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독자를 관찰자가 아니라 공모자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웹툰 산업과 비평 담론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괜찮다’는 말로 문제를 덮어 왔는가. 얼마나 많은 침묵과 순응을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해 왔는가. 만일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더 큰 고통과 좌절에 대한 공포를 감추기 위해 현재의 상태로 괜찮은 수준으로 수용해도 좋은가에 대해서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독자가 스스로의 현실을 돌아보도록 만든다.


이 시점 조금씩 성장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아직까지 다양한 해외 작품들이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월드 웹툰 어워즈’의 풍경을 떠올려 보면, 『에브리띵 이즈 파인』과 같은 작품이 그 무대에서 논의되고 평가되는 날을 기대하게 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잘 만들어진 웹툰이 아니라, 웹툰이라는 형식이 어디까지 사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괜찮다는 말이 의심받아야 할 시대에, 『에브리띵 이즈 파인』은 그 의심을 가장 조용하면서도 집요하게 제기하는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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