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엔 말보다 눈빛이 먼저 마음에 닿았었다.”
요즘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려면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단어를 골라야 하고,
뉘앙스를 조심해야 하고,
표현을 고민해야 하는 사이
마음은 자꾸 늦어진다.
그런데 어릴 적,
아빠와 나는 별다른 말 없이도
참 잘 통했다.
기억난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오랜만에 보는 시험에서
수학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한 채
백지를 내고 나왔던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고
작은 식탁 앞에 앉아 있던 나는
괜히 숟가락을 쥔 채 밥만 툭툭 쳤다.
그날따라 아빠도 말이 없었다.
엄마는 외출 중이었고,
따뜻한 국물 소리만
주방에 자근자근 흘렀다.
아빠는 조용히 내 앞에 국을 떠다 놓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내가 겨우 한 입을 떠먹었을 때,
아빠가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그 한 입이면 충분하다고.
그 한 번의 고갯짓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왜 그랬어?”
“다음엔 잘하자.”
그런 말은 없었지만,
그때 아빠는
누구보다도 나를 믿고 있다는 걸
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아빠와 나 사이엔 자주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시절.
슬퍼도 말하지 않았고,
기쁘다고 떠들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과 숨소리로
감정을 읽던 시간들.
지금처럼 메시지를 보내거나
긴 통화를 하지 않아도
하루의 끝에서
한 눈빛만 마주해도
우린 충분했었다.
이따금,
요즘처럼 마음이 무거운 날이면
나는 그때의 감각을 다시 떠올린다.
소리 없는 위로,
말 없는 다정함,
침묵 속에서도 흐르던 온기 같은 것들.
지금은
그걸 전하려면 말이 필요하고,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를 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더 늦어지고,
때론 닿지 못한 채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 모든 말들이 없던 시절,
우리가 얼마나 잘 통했는지를.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닿던 그때를.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줄 수 있는 사람.
아빠가 그랬듯이.
말보다 먼저 눈빛이 마음에 닿고,
그 마음이 따뜻한 공기처럼 퍼져
오늘 하루를 살게 해주는 존재.
그건 여전히,
내가 세상에서 가장
닮고 싶은 다정함이다.
아빠,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 저녁,
저는 사실
그 눈빛 하나로 다 알았어요.
당신이 얼마나
내 편이 되어주고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