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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Jul 06. 2022

<로스트 도터> 잃어버렸던 엄마의 모습

한 사람의 정체성이 온전하게 하나의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건 언제부터일까. 근대산업사회까지, 사람은 온전히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 계급이 정해져 있고, 직업이 정해져 있었다. 하다못해 가족 안에서도 부모 자식으로서, 남자와 여자로서 존재했다. 그 계급과 지위와 직업에는 이름이 있었고 거기에는 그것에 걸맞은 정체성이 있었다. 귀족과 평민과 노예는 이래야 했고, 남자와 여자는 각각 그래야 했으며, 부모와 자식도 마땅히 그러해야 했다. 또한 그것을 지키는 것이 '도덕적인 사회'였다.


4차 산업혁명 사회로 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다를까? 혈액형, 별자리, MBTI별 성격유형을 나누는 것은 '나'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어떤 이름에 나를 집어넣기 위함이다. 현대인은 이분법적인 정체성을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갈라진 정체성에도 다 세세하게 이름 붙이기 바쁘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나'라는 외로운 섬은 두렵고 쓸쓸한 것처럼.


'엄마'라는 울타리의 이름이 있다. 엄마는 항상 그래야 하는 몸가짐, 마음가짐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인수대비가 아예 <내훈>이라는 책을 내며, 여자로서의 덕목을 7장에 나누어 서술했다. 여기엔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져야 할 덕목들도 있다. 인수대비는 어우동을 본보기로 처형한 다음 <내훈>을 냈고 조선에서 여성의 지위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서양에서는 특히 가부장제를 가장 중요시하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성가정과 어머니의 덕목들로 여성을 죄어왔다. 왜 그런 덕목들을 강조했을까?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로스트 도터>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람직한 엄마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인간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40년 전만 해도, 현모양처가 좋은 엄마였다. 항상 남편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무엇이든 받아주고 내어주다 자신의 이름도 없이 늙어가는 여자. 20년 전에는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맞벌이가 많아지면서 육아와 직장일을 모두 다 잘하는 슈퍼맘이 대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더욱 확산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엄마의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다. 엄마라고만 불리던 하나의 사람이, 자신만의 이름을 찾는 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체성이 다양해지고 변화하는 시점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들 모두가 고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가치관이 혼재되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만 더욱 커질 뿐이다. <로스트 도터>의 감독인 매기 질렌할은, 우리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서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녀가 배우로써 보여주었던 섬세한 연기가, 감독으로써도 매우 섬세하게 남아있다. 첫 연출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


허울 좋은 휴가지

레다(올리비아 콜맨)는 대학교수다. 주인공 '레다'가 간 곳은 그리스의 한 휴양지다. 그곳에는 이미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민박이나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서 부담이 없는 장소 같다. 바다가 보이는 집은 분위기가 소박하고 평안하다. 과일이 준비되어있고 주인은 늙었지만 친절하다.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잠시 뒤에 그 환상은 곧 서서히 깨지고 마는데, 자신만 있던 앞 해변에 다른 대가족이 휴가를 온 것이다. 조용함을 즐기며 연구를 하고 싶었던 레다는 조금씩 자신의 계획과 영역이 침범당하는 걸 느낀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것을 철저히 레다의 눈으로 바라봐서,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고 살아온 중년 여성의 두렵고 짜증 나는 시선을 그대로 담아냈다.


분위기 좋았던 숙소도, 잠든 머리맡에 매미가 발견되어 화들짝 놀라 조심스레 창밖에 버린다. 베개에 매미가 앉은자리엔 무언가 묻어있다. 거실에 나가 준비되어있던 과일을 집어 들자, 그 밑은 완전히 썩어있다. 분명 쉬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고른 휴가지와 숙소일 텐데, 처음과는 다르게 속은 그다지 좋지 않다.


우리가 사는 모습도 그렇다. 특히, 여성의 삶은 아름답게 포장되어있기 마련인데, 그 안에서는 치열하고 힘들게 싸우고 감내하며, 속이 썩어가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른 것들 보다도 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레다의 시선이 놀러 온 다른 가족의 어린 딸에게 박힌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속이 썩은 허울 좋은 것들이, 엄마의 삶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엄마와 딸, 그 안에 감춰진 그림자

레다는 두 딸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딸은 이미 20살이 넘은 성인이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젊은 시절의 레다(제시 버클리)가 육아하는 모습과, 해변에 놀러 온 다른 가족의 엄마, 니나(다코타 존슨)가 육아를 하는 모습이 교차되며 보인다. 여기서 보여주는 육아의 모습은 우리가 미디어에서 흔하게 접하던 귀엽고 아름답고 조금은 말썽 부리는 모습이 아니라, <금쪽같은 내 새끼>에 나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정말 전쟁 같은 모습이다.


그 안에서 레다는 남편과 섹스에도 문제가 있고, 육아와 자신의 일 사이에서 너무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남편은 육아를 반반으로 도와주는 것 같지 않다. 그냥 같이 놀아주는 것 정도가 아니라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는 아이의 모습은 육아하는 부모라면 크게 공감될 육아의 어두운 단면인 셈이다.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자연스레 엄마가 되고 엄마는 이래야 하는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엄마는 처음이다. 육아가 적성에 맞는 엄마 거나, 아이가 좀 더 얌전한 집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일반적인 기존의 이야기들은, 여기서 엄마가 잠시 일탈했다가 돌아오거나 아니면 슈퍼파워를 발휘해 사랑으로 다 해내고 자식과 화해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그런 것만 있지 않다.


사람은 다양하다. 아니 정말로, 정말 다양하다. 성향 자체가 결혼과 맞지 않는 사람도 있고,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도 있다. 시답잖은 섹스도 참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런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남자의 가슴에 털이 있어도 좋다고 쓰다듬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슴털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산후우울증을 견뎌냈다고 해서,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고통의 역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참을 수 있는 한계도 다 다르니까.


레다는 그런 삶을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고, 심지어 섹스도 좋으니 얼마나 해방감을 느꼈겠는가. 레다는 자신이 잘했다고 포장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이기적인걸 알았다. 그런 결혼생활에서 잠시의 일탈이 아니라, 그녀는 완전히 도망쳐버렸다.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혼자인 중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그렇게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혼자를 위해 살았으니, 레다는 대학교수까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레다는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려는 성격이 강하다. 누군가 함부로 호의를 베풀면 먼저 경계한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에겐 가차 없이 이야기한다. 그런 성격이, 젊은 여성 학자였을 때는 매력으로 보였겠지만,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녀는 그저 사람들에게 이상한 아줌마일 뿐이었다.


그 바닷가에 놀러 온 가족들, 특히 그중에서도 남자들은 시종일관 레다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뭔가 레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위협을 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레다의 시선으로 봤을 때, 남자들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두려운지 <로스트 도터>는 연출만으로 중년 여성의 감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젊을 때는 곧잘 남자들을 꼬시기도 했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의 레다는 그게 그렇게 여의치 않다. 아들뻘 되는 남자도, 아버지뻘 되는 남자도 작업이 잘 먹히지 않는다. 이젠 여성이 아닌, 누군가의 엄마, 아줌마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영화관에서 시끄럽게 구는 남자애들에게 소리쳐보지만 절대 먹히지 않는데, 나이 든 남자의 한마디에 남자들은 조용해진다. 나이 든 여자는 그렇게 철저히 무시당한다.


여성들에게는 또 어떤가? 그들은 육아의 선배나 인생 선배로써 무언가를 기대한다. 서로의 삶 자체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같은 점을 찾아 자신과 닮은, 혹은 닮고 싶은 모습을 찾는다. 남자에게서도, 여자에게서도 보이는 건 레다자신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특히 니나와 서로 공감하게 되는 듯하다가 돌변하는 모습은, 레다가 철저하게 일반적인 여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레다의 모습은 어딘지 이상하다. 딸이 둘이나 있고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어릴 때의 모습만 나오고, 통화하는 모습에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정말 딸이 제대로 커서 성인이 된 걸까? 아니면 딸들은 어릴 때 잃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일까? 왜 니나 딸의 인형을 돌려주지 않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레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를 싫어해서 학대하거나, 여자나 엄마라는 게 끔찍하게 싫다거나,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분명 자식을 사랑한다. 그녀가 쏟아낸 눈물처럼. 하지만 그것을 잘하기가 너무도 쉽지 않았던 것뿐이다. 레다는 어릴 때 아기 인형을 갖고 놀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가지고 있었을 만큼 아기 인형을 좋아했다. 어린이가 아기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은 '육아'놀이를 하는 것이다. 딸이었던 그녀는 엄마이기도 했고, 엄마인 그녀는 인형을 다시 가짐으로써 딸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짜증 내며 자기 일만을 생각하던 젊은 레다는, 자식을 사랑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택한 것뿐이었다. 완전히 집을 나가는 엄마의 등 뒤로 들리는 아이들의 무던하고 얌전한, '엄마 어디가'라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잊고 있던 나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5살에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짐을 싸고 이불을 보자기로 싸고 있을 때, 어머니는 나를 불러 보자기의 매듭을 묶기 쉽게 누르고 있으라 했다. 그리고 잠시 나를 안았다. 나는 TV에서 만화가 하길래 다시 방으로 뛰어들어가 TV를 보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혼하면 완전히 원수였다. 양육권이 없는 쪽을 자식이 만나러 가는 것 자체가 큰 죄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나온 사진을 모두 잘라내거나 버렸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아들 셋을 버리고 간 매정한 년이라는 욕을 들으며 자랐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아버지의 마초적인 성격이나, 할머니와의 고부간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아들 셋을 혼자 키우는 어머니는 얼마나 쉽지 않았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나 때문에 바람 폈다는 오해를 들으며 나를 떼려고까지 했었고, 낳고 나서야 내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걸 알고 안심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임신하는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을까? 그리고 딸일지도 모른다고 해서 낳았는데 아들인 내가 나왔을 때, 얼마나 상심했을까? 내가 이혼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 몰라도, 자식은 부모의 사이가 틀어지면 자기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레다의 두 딸이 엄마가 가는 것을 보고 힘없이 부르는 목소리에는 그런 자책이 담겨있었다. 그럴 만한 레다도 어른인 나는 이해를 하고, 자기 탓을 하는 딸들도 어렸던 나는 이해를 했다. 그리고 한 번도 그 일로 슬퍼한 적이 없었던 나는 그만, 40년 가까이 지난 이제야 눈물을 흘렸다.


레다의 딸들은 잘 자랐을까? 레다는 마지막에 다시금 딸과 통화를 한다. 그러면서 어릴 때 딸들에게 항상 보여주던, 오렌지를 뱀처럼 깎는 모습을 보여 준다. 레다는 지금도 엄마 노릇을 하려고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니나가 물어봤었지. 이 우울함이, 육아가 언제 끝나냐고.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 노릇은 사실 끝나지 않는다. 성인이 된 딸에게 아직도 오렌지를 깎아주는 것을 보면. 물론, 그것이 단지 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으로 바뀌긴 했지만.


레다는 영화 속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엄마, 우리 주변의 엄마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은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며 노력하는 것이고, 때론 거기에서 벗어나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엄마 노릇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힘든 사람들도 있다. 남녀 간의 사랑도 노력해야 유지되고 얻어지듯,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르고, 방법이 다르며 표현이 다를 뿐이다.


나와 같다면 공감하고 같이 울어주면 된다. 하지만 다르더라도, 나와 다른 모습들을 인정하고 다독여주자.

레다의 모습은 곧 우리들이 잃어버린 엄마의 모습이 아닌가.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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