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우려와 기대 속에, <토르: 러브 앤 썬더>가 개봉했다. 제작 과정에서는 토르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토르: 라그나로크>를 만든 타이카 와이티티가 다시 맡는다는 것과, 연기의 신인 크리스천 베일이 합류한다는 것만으로 화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토르의 엉덩이 노출씬의 예고편으로, 기대된다는 사람들과 우려가 된다는 사람들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뚜껑을 연 토르의 반응은 정말 극과 극이다. 어떤 사람은 이터널스보다도 못한 최악의 마블 영화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고도 한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으로 일단락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페이즈 3은, 마블의 엄청난 흥행을 이끌어냈지만 더불어 커진 사람들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잘 만들어진 히어로들을 새로운 히어로로 교체해야 하는 시점에, 마블은 잘 자리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꽤나 멋진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샹치>는 준수한 편, <이터널스>와 <닥터 스트레인지 2>는 그런 혹평을 피하기 힘들었다.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는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감성을 이어가면서도, 후대에 이어질 이야기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미래의 희망이며, 아스가르드의 희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구전설화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미 타노스와 싸우며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 토르의 무던한 여정에 코르그가 함께하며 지켜봤고, 그 여정의 증인으로써 코르그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토르의 전설을 들려준다. 그것이 이 영화의 컨셉이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구전동화'로써의 토르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보여준 토르가 가지고 있는 진지함, 슬픔 등을 왜 이렇게 풀어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구전동화라는 것은 말하는 화자의 성격에 따라 양념이 들어가고, 어느 부분은 과장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취향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코르그의 성격을 이해한다면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시종일관 개그 투성이인지. 또한 이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동화이자 전설이고, 실화가 아니라 다시 써지는 신화라는 것에 대한 암시는 몇 군데 있다. 뉴 아스가르드에서 벌어지는 맷 데이먼이 만드는 연극이 그렇다. 거기서 헬라는 원래 예쁘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모습으로 나온다. 역사는 승자의 언어로 써지는 것을 말하고, 이 영화 역시 그렇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 이것은 단지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어린이 취향 영화인가? 사실은 그 안에 꽤나 여러 개의 어른을 위한 층이 숨겨져 있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훨씬 재미있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붓다를 대변하는 신을 죽이려는 자, 고르
고르(크리스천 베일)는 딸이 죽어가는 와중에 자신의 종족이 섬겼던 신 라푸에게 딸을 살려달라고 빈다. 그러나 답이 없고, 딸은 죽고 만다. 그러다 나중에 신을 만났지만, 신은 자신을 섬기는 종족의 죽음에 별 관심이 없다. 고르는 신에게 크게 실망한다. 그때 옆에 있던 네크로소드의 부름을 받고 자신의 신을 죽인다. 네크로소드는 명령한다. 이터니티를 찾아가라고. 이터니티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존재로, 찾아온 사람의 소원은 한 가지 들어준다고 한다. 네크로소드는 암흑을 다루는 힘을 고르에게 주고, 고르는 모든 신을 죽이는 '신을 죽이는 자'가 된다. 이 영화에서 고르는 원작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냥 밋밋한 삭발머리를 하고 있고, 옷은 허름한 천을 감고 있다. 그런데 이 이미지,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불교 승려의 모습이다.
영화 속 고르는 불교의 붓다와 비슷한 점이 많다. 붓다도 처음 고통받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목격한 후, 삶은 고통이라는 생각에 그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하여 깨달음을 위해 정진한다. 붓다는 힘든 수행과 명상 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한다. 해탈을 한다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모든 삶을 공(空)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불교는 힌두교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지만, 대부분의 종교에서 갖지 못한 굉장히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간이 깨달음을 통해 신조차 하는 윤회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비어있는 상태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힌두교는 불교를 배척했다. 불교는 자신들의 신을 하찮게 여기고, 모든 신들이 없는 궁극적인 공(空)의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득 참'을 강조하는 기독교와, '비어있음'을 강조하는 불교는 서양 미디어에서 대립하는 존재로 많이 차용되어왔다. 대표적인 게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다. 네오는 노골적으로 재림한 예수를 표방한다. 그렇다면 스미스는 누구인가? 스미스는 매트릭스 프로그램 자체를 없는 것으로 돌리려고 한다. 스미스는 붓다를 표방한다.
그저 우스갯소리로 라는 생각이 아니라는 확신을 준건, 영화의 끝에 이터니티를 만나고 나서다. 이터니티는 전 우주적인 존재로, 몸 안에 우주를 품고 있으며 영원성과 시간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역시 고르처럼 원작 코믹스와 디자인이 좀 다른데, 영화의 이터니티는 가부좌를 틀고 머리 부근 맨 위에서는 빛이 나고 있다. 힌두교에서 머리 위의 빛은 최상위 차크라인 사하스라라를 나타내고, 몸 안에 우주를 품은 가장 큰 우주적 존재는 범천, 즉 창조신 브라흐마를 나타낸다. 실제로 마블 코믹스의 설정에서도 이터니티는 인피니티, 엔트로피와 함께 창조 유지 파괴를 셋이서 관장하는데 힌두교의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이터니티의 모티브가 브라흐마고, 영화에서는 그걸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스토리상 가장 큰 우주적 존재를 만나서 한다는 게 소원을 비는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기복신앙으로 점철된 낮은 수준의 종교철학을 보여주지만, 어쨌든 고르의 소원일 것이라 생각하는 게 모든 신을 없애는 것이었으니 그것 역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와 흡사하다. 티벳 불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파드마삼바바가 쓴 <티벳 사자의 서>에서, 죽은 이가 중간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신이 나 자신을 하나씩 녹여 없애는 명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이 영화는, 사랑도 고통도 모두 다 공(空)이라고 외치는 붓다처럼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승이 수행을 하는 과정이고, 바이킹의 신인 토르는 그 깨달음에 이용되는 셈이다.
극명하게 갈린 빛과 어둠, 칼라와 흑백은 그런 신화의 대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혜인 스님은 불교신문의 칼럼에서, '마음을 닦는다는 건 내 안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했다. 어둠에서는 색이 없다. 시신경에서 원추세포가 아닌 간상세포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를 상징하는 고르는 색이 없는 어둠 속에서 힘을 더 발휘하는 것이다.
토르와 제인, 묠니르와 스톰 브레이커의 4각 관계
그에 반해, 북유럽의 신인 토르는 사랑의 대변자다. 토르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랑과 관련이 있다. 토르와 제인은 연인이었지만 헤어진, 좀 불편한 ex애인관계고, 묠니르는 이제 제인을 따른다. 토르는 묠니르를 불러보지만, 묠니르는 미동도 않고 스톰 브레이커는 그것이 못마땅한 듯 어디선가 나타나 가만히 토르를 바라본다. 토르에겐 묠니르도 ex무기 인 셈이다.
이런 기묘한 4각 관계는 관객에게 웃음도 주지만, 사랑이 이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대등한 관계다. 토르와 제인은 신과 인간이지만, 연인으로써 그들은 평등했다. 묠니르와 토르도 주인과 무기의 관계지만, 묠니르가 주인으로 인정해야만 토르는 묠니르를 다룰 수 있었다. 이들은 사랑으로 끈끈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사랑은 평등하지만, 자칫하면 집착과 광기를 불러온다. 고르가 신을 죽이려는 이유도, 너무도 사랑한 딸이 신의 무관심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미 떠나버린 전 여자 친구와 묠니르에 대한 집착이, 토르에겐 가장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영화 뒷부분에서 토르에게 스톰 브레이커를 빼앗은 고르가, 이터니티에게 가는 열쇠로 바이프로스트를 부르기 위해 스톰 브레이커를 설치하는데, 스톰 브레이커는 곧이곧대로 바이프로스트를 소환한다. 난 이 부분이 처음에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톰 브레이커는 토르에게 삐졌던 것이다. 그 묠니르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으면 스톰 브레이커가 고르의 명령을 듣지 않고 멀리 있는 토르에게 당장 날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묠니르나 스톰 브레이커에 인격이나 감정을 넣지 않았으면 되는 거 아니냐 하겠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 중에는 에로스 적인 사랑도 있지만, 동료 간의 사랑과 책임 등도 있다. 엔드게임에서 토르는, 캡틴과 서로 묠니르와 스톰 브레이커를 바꿔 들었을 때 "아니, 큰 거 줘. 너는 작은 거 갖고." 이런 말을 하며 새 무기에 대해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러면서, 죽은 줄 알았던 묠니르가 돌아오자 '아가야, 아빠에게 오너라'라면서 다정하게 부른다고? 이건 묠니르에게도 스톰 브레이커에게도 할 짓은 아니다. 실제 인간 팀 동료, 혹은 자식에게 대입해보라. 스톰 브레이커의 삐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토르와 제인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의 관계다. 비록 상황이 여의치 않아 헤어졌지만, 토르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그렇게 사랑을 가진 두 사람이니 고르와 대비되어 강렬한 색채로 옷을 입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갈고닦아 수행해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고대 기복신앙의 신 - 토르는, 내면이 아닌 외면으로 표현하는 신이기에 강렬한 색상이 더 자신의 힘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도 웃긴데, 제인이 마이티 토르로써 멋진 투구와 갑옷을 입자 자신은 더 화려하고 원색인 갑옷으로 바꾼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선 수컷이 암컷보다 더 화려해야 하듯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수탉처럼 치장한 것이다.
버려진 신들
영화에서 나오는 신화 속 신들은, 너무 나태하고 무기력하다. 왜 이들이 신인지조차 모를 정도다. 특히 제우스의 모습은 아주 우스꽝스러울 정도다. 신들은 한 곳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제우스는 쇼나 하고 있다.
토르가 위험하다고 토로하지만, 제우스는 모르는 척하다가 귓속말로 다가와서 고르의 행적과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소름 돋지 않은가? 제우스는 과연 제우스였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특히나 고르가 토르를 이용해 이터니티에게 갈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 제우스가 그리 간단하게 자신의 썬더볼트를 빼앗긴다고?
뒤에 보면 알 수 있지만, 토르가 가슴을 관통시켜 죽은 것처럼 보였던 제우스는 죽지 않았다. 토르가 싸울 때도 뭔가 이상하지 않았는가? 제우스는 그 앞을 무대라 했고, 등장할 때부터 그랬지만 완벽한 쇼맨이었다. 그는 토르가 썬더볼트를 훔쳐 혼자 해결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귀찮은 일이니까. 그래서 썬더볼트를 주기 싫다고 하기 전에, 썬더볼트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싸움 기술을 순식간에 다 보여준다. 그게 그저 개그 씬이 아니다. 토르에게 썬더볼트 사용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 전체가 굉장한 연회의 여흥 같지 않던가? 쓰러진 제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인들의 부채질을 받으며 징징거리며 이 수모를 갚겠다고 한다. 그 전체가 하나의 연극인 셈이다.
그런데 고르의 신인 라푸도 그렇고 제우스도 그렇고 왜 다들 놀고만 있나? 마지막 제우스의 말에 답이 있다.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이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대로 섬기지도 않으며 거의 잊혀 지낸다. 사실 인간들에게 버려진 셈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썬더볼트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연극을 빌미 삼아, 인간들에게 다시 신이 얼마나 무서운 지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집착과 번뇌를 버리고 사랑을 낳다
여기서 토르와 고르는 이름만 비슷한 게 아니라 처한 상황도 비슷하다. 둘 다 사랑을 잃었다. 고르는 아예 딸이 죽어버렸지만, 토르는 잃었던 사랑을 다시 찾았는 데 죽어가는 것이다. 둘 다 제발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나 내 옆에 있는 것이 진짜 그 사람을 위한 사랑일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상대방을 가두는 건 아닐까?
토르는 제인에게 자신의 옆에서 더 오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한 사랑임을 알고 집착을 버리게 되었다. 죽음을 알고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바로 피에타(Pieta)다. 제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토르는, 기독교의 오랜 주제인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순간 그 모습을 보며 고르도 딸이 죽을 때 그렇게 했다는 걸 기억해낸다. 딸이 죽어서 신을 죽이던 것이었는데. 이 모든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과적으로 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딸을 살려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르의 딸이 살아나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 여기서 사랑의 계승이 일어난다. 제인은 토르가 돌봐줄 것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제인의 유언이고, 토르는 받아들인다. 고르는 소원을 빌고 딸은 살아난다. 딸의 이름은 사랑, 즉 Love였다.
이 이야기는 신들의 이야기다. 모든 신들 중에 사랑을 가장 중요시하는 신은 누굴까? 바로 예수와 붓다다. 예수는 복잡한 기존 구약 율법들을 다 퉁쳐서,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가르친다. 붓다가 중요시하는 것도 '자비'다. 자비 역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이 모든 집착과 번뇌를 버린 후에, 결국 후대에 물려줘야 할 것은 딸의 이름이기도 한 '사랑'이다.
록 음악으로 쓰인 신화
이 영화는 시작부터 록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감독의 취향이어서가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후대에 계승되는 정신 - 즉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록 음악이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토르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모든 현실이 하찮은 듯 행동하고 명상을 한다. 넝마를 주워 입은 거 같은 모습과 치렁치렁한 머리는 60년대 히피 그 자체다. 토르가 명상에서 나와, 외계인 도적떼들을 해치우려 옷을 벗는 순간 그는 갑옷을 입은 게 아니라 락밴드 보컬 같은 차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콘서트를 하듯이 멋지게 전부 부숴버린다. 히피는 68 혁명을 이끌었고, 베트남 전쟁 이후 반전운동을 주도했다. 그들의 가장 큰 구호는 바로 '러브 앤 피스'다. 그리고 그 히피 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끈 음악문화는 바로 하드락 장르다. 락과 러브는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히피문화가 락에서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락은 '러브 앤 피스'를 외치고 있으니까. 물론, 토르는 피스와는 별 상관이 없다.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토르를 상징하는 음악은 레드 제플린의 <Immigrant Song>이었다. 그 음악은 그 자체가 북유럽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The hammer of the gods, Will drive our ships to new lands'라는 가사처럼 토르를 그대로 담고 있다. 레드 제플린은 60년대 말 70년대 초를 주름잡은 전설적인 하드락 밴드로, '마지막 히피 밴드'라는 별칭이 있다.
하지만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는 80년대의 초 인기 헤비메탈 밴드인 건즈 앤 로지즈의 음악이 주를 이룬다. 그 이유는 60년대 말의 하드락 밴드의 계보를 잇는 밴드가 헤비메탈 밴드이기 때문이다. 아스가르드의 미래인 아이들, 그 아이들의 대장격인 헤임달의 아들은 원래 이름이 아스트리드이지만 자꾸 자신의 이름이 액슬이라고 한다. 아스트리드의 방에 '건즈 앤 로지즈'의 포스터가 붙어있는 걸로 봐서, 지구에 와서 완전한 헤비메탈 덕후가 된 것 같다. 건즈 앤 로지즈의 리더 이름이 바로 '액슬 로즈'다.
즉 이 영화는 락의 계보가 하드락에서 헤비메탈로, 레드 제플린에서 건즈 앤 로지즈로 이어진 것처럼 조금은 다른 모습이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진다는 것을 락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 락 밴드의 음악이 무엇인가. 바로 전자음악이 아닌가? 일렉트로닉 기타로 연주하는 소리는 천둥소리와도 비견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러브 앤 썬더'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유치한 색감의 색과 영화 로고 디자인, 엔딩 크레딧의 배우 이름 디자인 등은 전부 하드락 밴드, 혹은 헤비메탈 밴드의 로고나 앨범 커버의 디자인과 일맥상통한다. 이제는 전부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사랑과 평화,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전부 신화처럼 빛바랜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러브 앤 썬더, 그들은 전설이 되다
이제 이 이야기들은 코르그의 구전으로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은 미래의 희망이다. 하지만 신화의 거대한 서사들은 대부분 훌륭한 어른들의 이야기다. 여기에서 아이들은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코르그는 그 이야기에 양념을 더해, 마지막 전투에 아이들의 힘을 빌렸다. 나는 그 장면이 정말 좋았던 게, 여태까지 토르가 무식한 전사의 이미지를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 비로소 신적인 면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토르도 오딘처럼 마법과 주문을 쓸 수 있었다. 거기에 제우스의 썬더볼트의 힘을 더해, 아이들에게 '오늘 한정'으로 힘을 나눠주고 싸우게 한다. 전설적인 판타지 만화 <베르세르크>에서는 사실적인 중세 전쟁 묘사로도 유명한데, 거기엔 용병단에서 아주 어린아이도 참전하는 모습들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전장에서 칼을 들면 훌륭한 전력이 된다"라며 싸우게 한다. 어린아이는 보호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전투인 것이다.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아니다. 7살 어린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육아를 해보면 알지 않은가? 지치지도 않고 무서운 짓을 끊임없이 해댄다. 거기에 토르의 능력을 받았다고 생각해보라. 섬뜩하지 않은가! 토끼 인형을 들고 번개를 뿜는 어린아이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이 동화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정신에 대한 서사다. 이 이야기를 듣는 어린이들이 바로 주체다. 마블 영화가 어른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투덜거릴 필요 없다. 그건 원래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이제, 토르는 러브를 데리고 그들만의 전장에 나아간다. 고르가 죽으면서 딸이 다시는 힘들게 죽지 않도록 빌었는지, 러브는 이터니티의 능력을 조금 이어받은 것 같다. 토르가 스톰 브레이커를 러브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묠니르를 가지는 것은, 새로운 세대에게 새 무기를 물려주는 것과 같다. 이제 토르의 신화는 새 이야기로 쓰일 것이다. 사랑과 함께.
*깨알 같은 개그 장면 몇 가지.
1 토르를 잡은 고르는 자꾸 도끼(스톰 브레이커)를 부르라고 한다. 영어로 "Call the ax!"라고 하는데, 사실 영어로 전여친을 지칭할 때도 ex-girlfriend라고 하고 줄여서 ex라고 하니까. 그래서 자꾸 전 여자 친구를 부르라는 걸로 들려서 웃음이 나왔다.
2 발키리가 무기를 챙기는 장면에서, 수류탄 같은걸 들길래 제인은 "그거 수류탄이야?"라고 묻자 "아니 스피커야" 이러면서 음악을 틀고 흔들흔들하는데, 사실 아스가르드 인이 블루투스 스피커를 쓴다는 게 좀 웃기지 않은가? 블루투스라는 이름은 사실 북유럽 덴마크를 통일한 중세 왕의 영어식 이름이다. 그리고 블루투스의 로고도 첫 글자를 딴 룬 문자다. 룬 문자는 아스가르드의 문자이고 아스가르드 인은 사실 초월적인 마법기술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들을 섬기던 인간들이 룬 문자를 토대로 만든 기술을 이용한다는 게 어쩐지 재미있어서 웃었는데 나만 웃었나...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