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는 히어로 장르가 대세다. 마블 코믹스의 어마어마한 성공에 힘입어, DC코믹스도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영화화를 성공시키려 하고 있다. 마블은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후 페이즈 4로 넘어가며, 드라마와 영화에서 기존 히어로의 속편과 새로운 히어로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 코믹스의 주요 장르인 히어로물은, 보통 초인이 악당을 때려잡는 이야기다. 일본 만화가 주로 읽히는 한국 만화시장에는 진입하지 못해서 한국인은 잘 모르지만, 미국 코믹스 시장이나 팬덤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아주 예전부터 헐리우드는 코믹스의 영화화에 힘써왔다. 한국에서는 어린이나 보던 특촬물, 전대물 같은 장르가 미국에서는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였고, 촬영 기법이나 특수 효과 등도 그에 맞게 엄청나게 발전을 한 것이다. 돈이 있는 곳에 발전이 있다.
하지만 코믹스 기반 히어로물이 너무 돈이 되다 보니,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서로 다른 영화끼리의 세계관 연결도 너무 많아진다. 시리즈가 이어지는 영화들은 CG발달과 더불어 리부트를 거듭하고 있다. <배트맨>만 해도 몇 번이나 배트맨이 탄생하는 걸 각기 다른 배우로 봤는지 모른다. 현재 미국의 히어로물을 꽉 잡고 있는 마블과 DC는 영화적으로 너무 큰 성공을 거두어서 자본적으로 헐리우드 영화의 아주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코믹스에서는 아직 캐릭터도 세계관도 훨씬 방대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할 거리는 넘쳐난다. 이젠 너도 나도 히어로에 초능력자다. 헐리우드 영화의 거대 자본이 이런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히어로 물을 즐겨보는 내 입장에서도 달갑지만은 않다.
코믹스 히어로의 성공
90년대 말에는 단순히 크로마키 촬영을 이용한 특수효과를 넘어서서 컴퓨터로 만든 3D를 입히는 기술로 예전에 만들었던 히어로를 다시 부활시킨다. 최신 촬영기법의 코믹스 기반 블록버스터 히어로물 스타트는 <스폰>이었다. <스폰>은 악마와 계약해서 힘을 얻게 된 히어로를 그리는데, 코스튬이나 싸우는 방식 등 여러모로 일반 특수 의상을 입으면 유치한 모습이 되기 뻔했다. <스폰>은 캐릭터가 변신하는 모습, 휘날리는 망토를 CG로 만들어 당시 최고의 비주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온전히 다 재미있으라는 법은 없다. <스폰>은 흥행에 참패했다.
진정한 코믹스 히어로물의 성공과 시작을 알리는 작품은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맨 트릴로지>다. 게다가 브라이언 싱어는 <엑스맨>이라는 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에 영화적인 디테일을 불어넣었다. 캐릭터 간의 관계, 캐릭터의 심리를 단순하고 빠른 컷과 대사로 보여주는 연출은 현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의 공식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배우 ‘휴 잭맨’과 ‘울버린’의 싱크로나이즈가 너무도 완벽했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엑스맨 트릴로지>는 성공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2편까지 찍고 DC가 야심 차게 준비한 <수퍼맨 리턴즈>를 찍으러 가버렸다. <수퍼맨 리턴즈>는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등이 성공으로 이어져, 마블의 코믹스의 실사 영화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거대한 하나의 세계관으로 넣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물론,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은 영화 판권이 ‘마블 스튜디오’가 아니라 당시엔 ‘소니 픽쳐스’에 있었으므로 아이언맨과 더불어서 <어벤저스>로 합쳐지기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은 <어벤저스>와 따로 독자적인 시리즈로 만들어지다가, <어벤저스 2>에서 극적으로 스파이더맨의 판권을 빌려와 스파이더맨이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메가 히트 <어벤저스:인피니티 워>와 <어벤저스:엔드게임>이 만들어진다.
순탄하지만은 않던 이 일련의 과정들은, 헐리우드에서 히어로물이 성공해가는 과정 중에 점점 더 커져갔다. TV에서도 <히어로즈>, <미스핏츠>와 같은 히어로, 능력자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대히트를 했다. 이제 히어로물은 상업적인 성공뿐 아니라 영화적 완성도와 재미 등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켜주었다.
기독교의 구세주와 히어로
서양 신화에서는 신이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계에 개입한다. 그 소재가 꽤나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해서, 북유럽 신화나(토르, 로키), 메소포타미아 신화(길가메시), 그리스 신화(아마존, 제우스)등을 종종 모티브로 가져다가 만든다. 하지만 그중 서양인들의 마음속에 가장 크게 박혀 있는 것은 역시 기독교의 성경이다. 다른 것들은 ‘신화’라는 이름 아래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지만, ‘예수’나 ‘하느님’은 신격 모독이라고 해서 영화나 코믹스 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히어로’라는 장르 자체가 ‘재림해서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주는 신’, 즉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기독교 세계관과 가르침을 가장 크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DC 코믹스의 <수퍼맨>이다. 다른 일반적인 히어로들과 다르게 수퍼맨은 외계인이다. 어릴 적 지구로 떨어져 지구인 손에 길러지고, 각성하고 나서도 인간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목숨 바쳐 인간을 도와주고 구해준다. 이러한 모티브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히어로물은 ‘구세주 신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그토록 히어로물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실제 종교와 세계관을 반영하니까.
그러한 ‘구세주 신화’는 비단 히어로물뿐 아니라 일반적인 SF물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E.T.> 같은 경우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벽화 속 아담과 이브를 모티브로 했다. 손가락을 서로 맞닿으며 주인공 E.T. 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강림한 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매트릭스>의 네오는 정말 대놓고 예수를 모티브로 하는 캐릭터다. 또 다른 영화들에서도, 작고 힘없는 주인공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 거대한 운명을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스토리 등은 모두 기독교의 ‘구세주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히어로들이 잔뜩 나온 시점에서 이미, 코믹스나 영화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히어로가 변주되고 있긴 하지만 그 변주조차 원래 ‘구세주 신화’에 반기를 들어 나오게 된 작품들이다. ‘구세주 신화’는 그들이 가진 세계관을 너무 일방향적이고 단순하게 만든다. ‘안티 히어로’와 같은 다양한 방식의 히어로물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도 역시 ‘히어로’가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어떻게 변주하든 그건 구세주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의 차이
그렇기 때문에 히어로물은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데 반해, 동양에서는 그게 쉽지가 않다. 서양 기독교의 세계관은 직선적이고 선과 악이 뚜렷하며 일방향적이라면, 동양의 세계관은 순환적이고 선과 악이 공존하며 순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SF에서 이런 동서양의 세계관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 중 대표적인 성공작은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이고, 실패작은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이다.
<컨택트>는 애초에 중국인이 쓴 원작 소설이다. 내용부터 '직선적인 시간과 세계관을 가진 인간'에게 '순환적인 세계관을 가르쳐주는 존재'의 이야기다. 거기에는 지구를 지배하려는 악이나 지구를 구하려는 선도 없고, 나를 해한다고 악당이 아니며 가족이 죽는다고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존재들도 인간에게 어떤 선민의식이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자세히 뜯어보면 ‘이런 소재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긴 한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테드 창은 완벽하게 순환적 세계관을 서양인들에게 '선물'해 주었으며, 감독 드니 빌뇌브는 아름다운 영상과 뛰어난 연출로 그것을 재창조해냈다.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은 얼핏 보면 권선징악이 뚜렷한 중국 무협영화의 공식을 따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래 동양의 세계관은 절대선, '절대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동양의 고전 히어로물인 <서유기>만 봐도, 주인공 손오공은 초반 악마에 가까웠으나 나중에는 세계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삼장법사와 여행을 떠난다. 선은 지고지순한 절대가치를 지니고, 악은 퇴치하고 없애버려야 할 존재가 아니다. 또 악마가 선으로 뉘우치는 일도 필요 없다. 윤회하는 세계관에서는 네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관인 ‘주역’과 ‘베다 철학’은, 음과 양이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순환하는 세계를 그린다. 그래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고전들은 선과 악보다는 개인의 성찰, 깨달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샹치: 텐 링즈의 전설>에서는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동양의 대표적인 무술을 대표하면서도, 동양 철학은 겉핥기로만 가져다 쓴 모습이 역력하다.
특히나 태극권은 음양의 조화가 그 몸동작에 드러나는 무술이고 그걸로 인해 홍가 철선권을 쓰는 웬우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스토리의 핵심인데, 갑자기 후반부에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이어지는 용의 모습을 한 악마가 튀어나온다. 이런 부분은 헐리우드가 얼마나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아직도 갇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히어로물의 한계
하지만 히어로물이 많아지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재미있고 인기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우선, 히어로물에 너무 많은 자본이 모이다 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안전하고 성공이 보장된 기존 캐릭터를 ‘리부트’하는 방식을 자꾸 선택하고 있다. ‘소재 고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헐리우드는 이미 추억 속에 묻어둬야 할 작품들도 자꾸만 다시 꺼내 리부트 하거나 속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물론, 기존 영화의 팬으로서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영화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기존의 영화를 리부트 해서 더욱 멋지게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2000년도 초중반에는 그것이 먹혔지만, 요새는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대표적인 게 ‘죽은 네오 불알 만지기’라는 욕을 먹은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아닌가. 워쇼스키 자매는 자꾸 속편을 만들어달라는 영화사에 화가 났던 게 분명하다. 이미 내용이 완벽하게 끝난 작품을 자꾸 소환해서 시리즈로 만들려는 제작자의 횡포를 그대로 영화 대사로 넣어버리고, 마치 ‘망쳐도 내가 망친다’라는 일념으로 영화를 완벽하게 망쳐버렸으니까.
계속해서 같은 캐릭터를 재창조하고, 코믹스에서 발굴해서 가져다 쓰고, 근래에는 정치적 중립성을 무리하게 지키려다 보니 기존의 팬들도 등을 돌리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영화팬들도 수많은 히어로들과 비슷한 이야기 구성에 지쳐간다. 이런 상황에서도 헐리우드는 그 방식을 바꾸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최근에는 연결된 다른 드라마와 영화를 다 찾아보지 않으면, 아예 영화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조차 없게 만들고 있다. 마블의 최신작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재미있게 봤지만 그건 내가 마블의 다른 드라마나 샘 레이미 감독을 잘 알아서였지, 일반 관객은 이해 못 할 구석이 너무 많았다. DC 역시 마찬가지다. 점점 세계관을 그렇게 확장하는 것은 돈벌이야 되겠지만, 모든 관객이 히어로물의 팬덤은 아니다.
관객들은 이제 수많은 히어로에 피로감이 쌓여있다. 최근 한국 컨텐츠가 유행인 것만 봐도 그것을 반증한다. 세계시장을 주름잡던 헐리우드의 거대 자본은 지금 자신들의 히어로 복제품을 더 예쁘게 만드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는 걸로 보인다. 헐리우드는 히어로 그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컨택트>에서 헵타 포드가 인류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생각 밖에도 세계는 있고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법들이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히어로 불알 만지기’나 계속하고 있다면, 오지 않는 구세주를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과 같다.
헐리우드에는 사실 히어로가 아닌 좋은 영화도 많고, 창의성과 작품성이 뛰어난 감독도 많다. 예술영화가 아니더라도 90년대에는 그런 좋은 영화들, 오리지널 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많았다. 하지만 자본은 여전히 점점 한 방향으로만 몰리고, 예전에도 지금도 돈이 된다싶은 히어로를 반복 재생산하는데 너무 많은 인력과 자본이 들어간다. 거기에서 나와야,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분명 헐리우드는 그것을 벗어날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각성하지 못한 히어로처럼,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