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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Sep 05. 2022

<노스맨> 비극과 희망이 공존하는 바이킹의 심장

I will avenge you, Father!

복수해 드릴게요, 아버지!

I will save you, Mother!

구해 드릴게요, 어머니!

I will kill you, Fjölnir!

반드시 죽인다, 피욜니르!


아이슬란드의 왕 아우르반딜(에단 호크)은 그의 아들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전통 의식을 통해, 선왕들과 연결된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서로를 연결시킨다. 위그드라실은 오딘으로부터 연결되어있다. 그 의식을 치르며 선왕들과 하나가 된 순간에 벅차하던 암레스는 바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피욜니르(클라에스 방)가 자신의 형인 아우르반딜을 죽인 것이다.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까지 피욜니르에게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목격한 암레스는, 바다 건너 울면서 도망치며 저 말을 끝없이 되뇌인다.


잔혹하고 아름다운 복수극 <노스맨>은 절망에 빠진 암레스가 자신의 영혼을 복수의 화신으로 불태우면서 시작한다. <노스맨>은 햄릿의 원전으로도 알려진 <암레스 왕자의 이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원래 <암레스 왕자 이야기>는 13세기 삭소 그라디마쿠스가 집필한 덴마크 역사책 <데인인의 사적>의 일부분인데, 16세기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비교해 보면 놀라울 정도로 이야기 구조가 똑같다. 하지만 <노스맨>은 <암레스 왕자 이야기>를 기초로 하면서도, 거기에 여러 전설들을 더해 오히려 후에 쓰인 <햄릿>의 재탕처럼 보이지 않도록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햄릿>에서 보이는 여러 인물과 이야기가 겹쳐 보이지만, <노스맨>은 복수에 더 집중했고 거기에 북유럽 신화를 섞어 신비하고 아름답고 처절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특히, 원작과 <햄릿>에선 크게 느껴지지 않던 주인공의 어머니 구드룬에서 주인공의 연인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로 이어지는 서사는 복수와 신화가 여성의 이야기로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짐승이 되어 울부짖는 암레스의 모습에 슬픔이 서려 있다

냉철한 비극의 광전사

어린 소년이 가족을 한순간에 잃고 복수의 화신으로 태어나는 슬픈 이야기는 오히려 미우라 겐타로의 <베르세르크>를 연상시킨다. 마침 <베르세르크>라는 제목의 뜻이 버서커 Berserker, 즉 광전사라는 뜻이고 <노스맨>의 암레스는 바다를 건너가 바이킹들 사이에서 곰 가죽을 뒤집어쓴 채로 버서커로 다시 태어난다. 무언가를 미워하는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다. 복수라는 것도, 또 다른 일상이 생기고 시간이 많이 흐른다면 회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암레스는 그러지 않기 위해, 오로지 복수의 화신이 되기 위해 저 말을 주문처럼 끝없이 되뇌인다. 그에게 그다음은 없다. 처절하고 슬픈 되뇌임, "복수해 드릴게요, 아버지! 구해 드릴게요, 어머니! 반드시 죽인다, 피욜니르!"


버서커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몸에 방어구도 걸치지 않은 채로 마구잡이로 물어뜯고 몰살시키는 전투 방식으로, 아군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에 광전사, 즉 미친 전사로도 불렸다. 이런 광기를 가진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의 정신상태로는 불가능하고, 광대버섯 등과 같은 환각제를 이용했을 거라고 보고 있다. 끝없이 자신의 정신상태를 극한으로 몰고 가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암레스는, 광전사이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암레스가 처음으로 액션을 하는 장면이 날아오는 창을 잡아 다시 던지는 부분인데, 전투 중에도 아이나 여자를 마구 학살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광전사로써 몸을 갈고닦으며 때를 기다리는 일이다. 어릴 때 도망치던 암레스는 그저 울부짖었지만, 지금은 짐승 같은 몸을 가지 전사가 되어 냉정하게 되뇌이고 있다. 그것이 더 무섭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 계획을 실행하려 하는 것이니.


보통 일반적인 영화를 보면, 빌런들이 악마와 겹쳐진다. 그러나 <노스맨>에서는 주인공이 바로 악마다. 현대라면 연쇄살인마가 되어 돌아와 피비린내 나는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하는 그런 인물이 될 차례인 것이다. 암레스는 그들에게 한없이 불타는 복수심과 냉정한 계획으로 악몽을 꾸게 하려 한다. <노스맨>은 영화의 연출로도, 광기 어리고 무지막한 액션으로 채운 것이 아니다. 절제된 화면과 대사로, 예언과 신화 안에서 어떻게 암레스가 어떻게 스스로를 발견하는지 보여준다. 마치 영화 자체도 '냉철한 광전사'같다. 신화나 동화적인 이야기라면 나레이션이 있을 법도 한데, <노스맨>에서는 그런 부분을 없애고 파편적이고 몽환적인 환상과 주인공의 대사들로 그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하 스포일러]



비극이 불러온 복수의 완성

암레스는 노예들을 아이슬란드로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암레스는 노예로 변장해 아이슬란드로 간다. 그는 피욜니르가 아이슬란드의 왕에서 변방의 족장으로 쫓겨난 걸 알게 된다. 암레스는 배에서 슬라브족 마법사인 올가를 만나게 된다. 아이슬란드로 도착한 암레스는 그곳에서 피욜니르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머니 구드룬을 보게 된다. 구드룬은 피욜니르와의 사이에서 아들 군나르까지 낳았다. 암레스는 이복형제에게는 연민을 느낀다.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마법의 검 드라우그를 얻고, 구드룬을 찾아간다. 하지만 거기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구드룬 자신은 노예였다가 아우르반딜에게 강간당해 임신해서 왕비가 되었고, 그 아이가 바로 암레스라고 말한다. 피욜니르가 왕좌를 위해 아우르반딜을 죽인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피욜니르에게 사주해서 죽인 거라는 이야기다. 자신은 아우르반딜을 전쟁밖에 몰라서 미워했고, 피욜니르는 자신을 정말 사랑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암레스를 저주한다.


어머니를 구하고 복수를 완성하려 한 암레스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잡혀가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았냐는 암레스의 물음에, 구드룬은 "웃고 있었지!"라며 암레스를 조롱한다. 그리고 다시 이상하게도, 피욜니르를 죽이고 군나르도 죽이면, 구드룬 자신이 암레스의 왕비가 되겠다며 유혹하며 키스한다. 멘탈이 붕괴된 암레스가 그 키스를 살짝 받아들이자, 구드룬은 그의 칼을 빼앗으려 하다 실패하고 "네 아빠처럼 더럽구나!"라며 조롱한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암레스는 옆방에서 자고 있던 피욜니르의 아들 토리르를 죽이고 심장을 훔쳐간다.


이 장면은 처음 볼 때는 충격이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계속 곱씹게 되는 장면이다. 무언가 좀 이상하다.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드룬의 역할을 맡은 니콜 키드먼의 연기가 돋보이는 장면인데, 왜 이런 식의 반전을 넣었나 하는 점이다. 원작 <암레스 왕자의 이야기>에서도 <햄릿>에서도 여왕은 왕을 죽인 동생과 결혼을 하지만, 노예였다가 왕에게 강간당해 주인공을 낳았다는 설정은 없다. 여왕은 타국의 공주였다가 결혼한 것으로 나온다.


현대에 와서는 구드룬과 겹치는 인물인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 페미니즘적 인물로 재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노스맨>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 여기서는 원작과 달리 삼촌과 재혼한 어머니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정황상 어머니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잡혀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구드룬은 복수를 하러 온 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갑자기 낱낱이 밝히며 아들을 자극했을까. 암레스가 이복형제인 군나르를 아낀다는 것도 구드룬은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결국 자신이 한 말들로 토리르가 죽었고, 나중에는 칼을 들고 암레스에게 덤벼서 암레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가.



영화의 첫 대사는 구드룬이 어린 아들 암레스에게 "옷 갈아입을 때 들어오지 말랬지!"이다. 이 대사 하나로, 암레스가 종종 어머니가 옷 갈아입을 때 들어왔었던 것과, 암레스에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했었다. 그리고 복수하러 온 암레스 안에 감춰진 오이디푸스를 꺼내 조롱했다. 강간으로 낳은 아이라서 끔찍했고 죽었어야 했다고 여기더라도,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돌아온 그에게 이 정도로 자극하는 말이 필요했을까? 자신과 아들이 위험해지는데. 아직 복수는 시작도 안 했는데.


난 이 부분이, 원작에서는 별다른 이유 없이 남자들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를 하는 주인공의 어머니들 캐릭터에게 새로운 서사를 부여했다고 느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분명 구드룬은 피욜니르에게 잡혀갈 때 들쳐 업혀져 비명을 질렀고, 그걸 어린 암레스가 봤다. 그런데 구드룬이 비명 이야기를 하자, 마치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을 거라는 생각인지 '웃고 있었다'라는 말로 변명을 한다.

2. 자신이 암레스 아버지의 죽음의 배후라는 사실을 알리는 순간, 자신과 자신의 새아들조차 암레스의 복수의 대상이 될 터였다. 지금은 구드룬을 구하러 온 거였지 죽이러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드룬이 저렇게 절체절명의 순간에나 할법한 고백을 하고, 심지어는 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자극해서 조롱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암레스가 죽도록 싫고 지금의 행복을 잃기 싫었다면, 오히려 암레스에게 애원하거나 자결하는 시늉으로라도 부탁 혹은 겁박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피욜니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암레스가 생각하던 복수의 의미가 희석되는 것이니까.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자면, 그녀가 고백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 왜 거짓말을 해서 암레스를 자극했을까? 구드룬은 암레스가 어설프게 이복동생은 살리고 자기는 구하고 복수를 할 것을 염려했고, 피욜니르의 부인이 되어 그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행복한 척 살았던 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번 과감하게 해석을 해 보자면 구드룬의 행동을 다음처럼 생각할 수 있다.


실제 원전에서 구드룬은 공주로써 아우르반딜과 결혼했다. 하지만 '나는 노예였고 강간당해서 결혼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팍을 보여준 곳에는 노예의 표식이 있었다. 그런데 위 논리처럼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노예 표식은 진짜다. 그러면 피욜니르가 지금은 구드룬을 아끼고 아들의 어머니로 대하지만, 초반에는 강제로 잡아갔고 노예의 표식까지 하며 조롱하고 강간해서 낳은 아이가 지금의 새 아이인 군다르일 수 있다. 즉 지금 이야기를 아우르반딜로 바꾸어 이야기한 것이다. 그럼 왜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피욜니르와 군다르 다 죽이지 않고 자기까지 복수의 대상이 되도록 거짓말을 했을까. 분명 구드룬의 마지막 발악은 죽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또 마지막에 암레스가 구드룬의 심장을 단번에 찔러 죽였을 때, 구드룬은 갑자기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 심장을 찔러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죽는다. 만약 암레스가 구드룬에게 저 정도의 적의를 표현할 정도로 싫은 대상이었다면, 이 부분도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위의 해석대로라면 어느 정도 들어맞지 않을까.



<노스맨>은 원전을 그대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재해석한 영화다. '여성이 부정적인 방식으로라도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일환이던 시절은 좀 지나갔다. 요새는 그것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과 대상화가 들어있다고 느낀다. 위처럼 구드룬이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그녀는 이복동생과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조차 없어야 왕국의 복수를 완성하는 거라는, 한때 왕비였던 그녀의 마지막 정치적 책임감을 보여주는 게 아니었을까. 어설픈 복수는 또다시 복수를 낳고 참극을 낳는다. 내 해석이 맞든 틀리든, 그녀의 일갈로 인해 암레스의 복수는 완성되었다.


물론, 영화에서 보인 그대로 해석해도 이야기가 완전히 어그러지는 건 아니다. 영화 초반 어린 암레스가 하던 전통의식에서 아우르반딜이 여자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처럼,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게 연출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몇 가지의 단서들 때문에 이 이야기가 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건 그만큼 깊이가 있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여왕의 탄생과 발할라

원래 암레스는 구드룬의 이야기를 듣고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지만, 그렇게 생각했을 때 되도록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복수도 할 수 있던 대상인 피욜니르의 맏아들 토리르(구드룬을 취하기 전에 얻은 아들)만을 죽였다. 그리고 아직 잡혀있던 올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 잡혔고, 가까스로 도망치고 나자 이제 복수는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올가도 암레스의 복수심을 달래며,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런 그가 다시 복수를 다짐한 것은 올가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위그드라실의 환영을 보게 되는데, 자신의 뒤를 이어서 남녀 쌍둥이가 태어나고 그중 여자아이가 왕이 되는 모습을 본다. 그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복수와 가정, 둘 다 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실상은 임신해서 대를 잇는 자신의 사명은 다했으니, 복수를 하러 떠난다는 뜻이 된다. 위드그라실에 나타난 자신의 자손에 대한 환영은 올가 혼자서 이루기는 너무나 힘든 것이다. 강인한 왕자인 암레스가 옆에 있어야 가능한데도 그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미래를 보자마자 떠나버렸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올가에게 맡긴 채로. 암레스 자신은 사랑이라 생각했겠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어머니 구드룬처럼 무책임한 책임감이었다.


올가의 임신은 또한 암레스의 복수를 완성 짓는 하나의 조각이었다. 구드룬이 남성에게 휘둘리다 책임감으로 자결을 택한 구시대의 여성이라면, 올가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 허락하지 않는 스스로 일어서는 새 시대의 여성이다. 왕비는 죽고 그녀에게서 여왕이 탄생한다.


발키리의 치아는 치아교정기가 아니라, 바이킹들이 치아를 갈고 채색했다는 고고학적 발굴을 고증한 것이다.
주술사로 특별출연한 비요크. 아이슬란드 출신인 그녀에게는 남다른 영화였을 것 같다.


그리고 복수를 도와주는 주술사들과 오딘과 발키리가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그의 양 손에 달린 복수와 희망을 저울질하며,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그를 지켜주고 선택을 맡긴다. 오딘은 넓은 챙을 쓴 반지의 제왕의 갠달프같은 모습으로, (실제 갠달프의 모티브가 오딘이다) 발키리는 그를 죽음에서 끌어내 도망치도록 하는 환상으로 나타난다. 까마귀는 오딘의 심복이다. 발키리는 원래 마지막 전쟁인 라그나로크를 대비하기 위해 싸우다 죽은 자를 발할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 역할이지만, 발키리는 여성이다. 이 내용에서 남성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직선적이고 하나만 생각하는 바보 같은 인물들이지만, 여성들은 머리를 쓰고 이성적으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완성 짓는다. 실제로 암레스라는 이름의 유래가 고대 아이슬란드어 어원인 Amlóði, 바보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지옥의 문에서 마지막 복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암레스는, 자신도 역시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발키리가 자신을 발할라로 데려가는 환상을 본다. 암레스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오로지 지옥의 문을 향했다. 비극과 희망이 공존하는 암레스의 이야기는 오로지 내내 귓가에 울리던 북소리처럼, 영화가 끝나도 죽지않는 복수의 화신인 바이킹의 심장을 나에게 전해 주고 있다.


I will avenge you, Father!

복수해 드릴게요, 아버지!

I will save you, Mother!

구해 드릴게요, 어머니!

I will kill you, Fjölnir!

반드시 죽인다, 피욜니르!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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