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봉사, 맹인, 장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는 다 시각장애인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의 감각 중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율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은 무언가 특별하다. 영화 <올빼미>는 낮에는 볼 수 없고 밤에는 볼 수 있는 주맹증을 가진 시각장애인을 모티브로 했다. 이 영화는 내내 눈에 집착한다. 눈알 그 자체에 대한 묘사와 집착부터, 시야에 대한 이야기까지. 단순히 주맹증이 소재라서가 아니라, '눈'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담으려 한다.
사람이 아닌 사람
사극의 CCTV라고도 불리는 돌쇠의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요"와는 다르게, 조선시대 양민 천민들은 자기보다 윗전의 행실을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했다. 양반을 섣부르게 음해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천한 것들은 보아도 보지 말아야 했고, 그러기에 그들은 양반들에게 사람이 아닌 존재였다.
<올빼미>에서도 천경수(류준열)는 분명 시각장애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마치 청각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과 같이 취급한다. 분명 소리가 들리는 상황임에도 "쟨 소경이야"라며 무시한다. 천경수도 필요할 때는 일부러 자신의 지적능력이 좀 떨어지는 척 연기를 한다. 천경수가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것일 뿐 다 듣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비밀을 주고받는다. 그건 단순히 아래 것이라서가 아니라, 아래 것이자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사람, 현대에서도 장애인은 그런 존재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을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쉽게 오해한다. 굳이 장애판정까지 받지 않더라도,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던가 말투가 조금 어눌하다던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기만 해도 그런 취급을 받는다. 학급에서 사회에서 그런 사람은 쉽게 왕따를 당하고 고통받는다.
얼핏, 천경수가 밤에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살면서 숨겼을까 의문이 든다. 평소에도 밤에 볼 수 있다는 걸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으면 덜 무시당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낮에 볼 수 없다는 건 비장애인에겐 굉장한 리스크가 된다. 천경수는 경계선에 선 사람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선에 있는 사람은, 양쪽에서 차별받는다.
확실하고 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이야 사실 말할 것도 없지만, 애매한 장애를 가진 경계선에 선 사람도 말 못 할 고통이 크다. 경증 틱장애나 언어장애가 있어 장애판정도 받지 못해 특수학교에 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일반학교로 가게 되면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고 학폭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쪽에서는 장애인이라며 놀리고, 다른 쪽에서는 비장애인이라며 거부한다. "사람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천경수의 말은 그런 뜻이 담겨있다.
천경수는 거기에서 장애인을 택했다. 완전한 시각장애인으로 살면 오히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대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선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사건을 경계선이라는 능력으로 해결하려 고군분투하게 된다.
못보다, 보이다, 바라보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 후, 소현세자(김성철)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다. 이 둘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달라져있다. 인질로 잡혀가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지만, 청나라와 다양한 서양 문물을 접한 소현세자. 그는 지구의를 들고 와 인조에게 더 넓게 보자고 한다. 실제로 소현세자가 천주교를 들여왔다는 설도 있다. 소현세자는 자신에게 보이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조(유해진)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이마가 깨질 때까지 세 번 절을 한 후, 그 굴욕과 공포가 온몸에 새겨진 듯하다. 인조 자신도 광해군을 반정(쿠데타)으로 폐하고 왕이 된 인물이기 때문에, 언제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 올까 두려워한다. 그는 두려움에 시야가 닫혀있다.
천경수의 상관인 내의원의 만식(박명훈)은 큰 눈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눈치도 없고 길눈도 밝지 않다. 사람 하나는 좋지만 그처럼 보이는 것도 못 보는 사람은 주변에 실없는 사람으로 타박받기 마련이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식이지, 보이는 데도 못 보는 사람은 출세하기 어렵다.
천경수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는 반은 감고 있고 반은 뜨고 있다. 보이는 것을 못 본 척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기에 가늘고 길게 살아남았다. 보이는 것을 다 말하지 않고, 자신을 속여도 그려려니 하고 넘어간다. 사실 시각장애인도 눈동자가 안 움직이진 않는다. 다만 시선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뿐이지. 천경수는 어둠이 드리우면 눈동자를 굴려 사물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것들과 마주친다. 하지만 경수에게도 사물과 사람은 그저 흐릿하게 잠시 보일 뿐이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잠시 벗어나 능력을 발휘할 때, 편지를 쓸 때 정도로만 쓰며 살아왔다. 그 밖의 것들은 여전히 보고도 못 본 척한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그렇다. 경수는 궁에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일을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처지다. 경수에게는 자신과 병든 동생만이 중요하다.
[이하 스포일러]
소현세자는 보이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경수는 돌아온 소현세자의 기침을 치료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똑바로 보려 하시니 아픈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보이는 것에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반은 소경으로 살고 있는 경수에게, 청에서 가져온 확대경을 준다. 세상을 더욱 똑바르게 바라보라고. 확대경을 받아 든 경수는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거기엔 자신을 이해해 준 소현세자와 원손에 대한 연민이 있다.
그는 결국 바라보기를 택한다.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집으로 가 동생과 함께 할 수 있었음에도, 그 순간 날이 밝아오며 다시 소경이 되었음에도, 소현세자와 원손에 대한 연민으로 그는 본 것을 못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소경이 된 모습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애처롭게 말한다.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몸으로 드러나다
<올빼미>에서는 독특하게 그들의 병은 각각의 캐릭터 성격과 일치한다. 영화 초반, 경수는 침의를 구하러 온 이형익(최무성)이 테스트를 할 때, 소리만 듣고 단번에 풍을 알아맞힌다. 풍에 대한 설명으로 '급한 성격이 풍을 불러온 듯하옵니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한의학에서는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이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경수의 동생 경재(김도원)는 천식이다.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일반 서민의 삶을 대변한다. 경수의 주맹증은 보고도 못 본 척, 조금은 세상을 알면서도 무지한 사람인척 살아가는 조금 능력을 가진 서민들을 대변한다. 내의원 만식은 눈을 뜨고 잠드는 '토안증'을 갖고 있다. 이는 그가 그렇게 큰 눈을 가지고도 눈치가 없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원손은 야뇨증을 가지고 있다. 부모가 없이 커서, 몸보다 마음이 덜 큰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소현세자는 폐병으로 기침을 한다. 한의학에서 기침은, 몸에 울화가 쌓여있을 때 등이 긴장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마음속의 것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인조의 풍, 구안와사는 그가 이중인격, 악마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특히 인조의 왼쪽은 악을 의미하는데, 구안와사는 인조의 왼쪽 얼굴을 마비시켜 자꾸 왼쪽 눈을 잡고 가리게 된다. 마치 악마가 꿈틀거리며 태어나려는 것을 가리려는 것처럼. 그가 소현세자를 죽인 범인이라는 악이 드러나게 되자, 그의 왼쪽은 활개를 친다. 문틈으로 밖을 엿보며 조용히 하라는 희번뜩한 인조의 눈은 왼쪽 눈이다. 또한 그가 글씨체를 달리해서 소현세자를 죽이라 명하는 글을 쓰는 손은 왼손이다. 결국 마지막에 인조가 칼을 들고 설치며 그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날 때, 그는 넘어져 이마가 깨지며 왼쪽 얼굴과 눈을 피로 물들인다.
<올빼미>는 많은 지점에서 영화 <관상>과 비교할 수 있다. <관상>역시 얼굴로 드러난 그 사람의 성격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올빼미>는 병으로 드러난 인물들의 성격을 보여준다. 또 <관상>은 보이는 대로 말하며 출세가도를 달리다 결국 보이는 대로 말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올빼미>는 보이는 대로 말하지 않고 살다가, 보이는 대로 말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던 반은 소경인 경수. 악으로 눈을 막고 보이는 것만 보며 살았던 인조.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 일가를 모두 죽이고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를 경멸하던 궁의 신하들 눈빛이 계속해서 아른거린다. 인조는 말년에 점점 정신까지 피폐해져, 계속해서 '저 눈깔 좀 봐라'라며 자신을 보는 눈을 두려워한다. 그런 인조에게 침을 놓으러 간 경수는 인조에게, 아니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사는 것인지.
"무엇이 보이십니까?"
이 영화에서는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만, 소리 역시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 침을 맞은 사람의 침이 가늘게 떨려오면서 마치 방울뱀이 꼬리를 흔들 듯 소리가 들려오는데, 상황과 사람에 대한 긴장감과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소름 끼치게 전해준다. 음악으로써 과한 개입은 배제하고, 극 중 감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훌륭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더군다나 음악과 대사가 많이 겹치지 않도록 많들어, 대사도 여타 한국 영화에 비해 잘 들리는 편이다. 눈에 띄게 좋은 멜로디나 주제가보다는, 음악과 소리 자체가 영화에 녹아들도록 잘 설계했다. 미장센, 소리, 시나리오, 연기 모든 밸런스가 좋다.
미로 같은 궁, 조선의 소품들을 이용한 트릭과 흔적 긴장감 등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극 스릴러'장르로써 굉장히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안태진 감독은 <왕의 남자> 조감독 출신으로 17년 만에 자신의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앞으로도 보여줄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