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대대적으로 광고하던 <1899>. 사라진 여객선 프로메테우스호가 나타나고, 그 배를 구조하기 위해 가는 여객선 케르베로스 호. 그리고 그에 반발하는 승객들과 선원들, 승객 하나하나가 가진 기묘한 이야기들. 유령선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그것과 완전 다른 이야기였다.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스포일러가 너무도 필수적이라, 어쩔 수 없이 전부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우선은, '나는 저렇게 스릴러를 만들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드는 드라마였다. 어쩐지, 순위에도 없고 리뷰도 없더라.
[이하 스포일러 포함]
주인공 모라 프랭클린(에밀리 비첨)은 뇌를 연구하는 의사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뇌에 대한 내레이션을 하고,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는 말들과 짧게 편집된 정신병원의 모습들, 잠에서 깨어나며 시작한다. 사실 어지간한 가상현실 SF를 봐 온 사람들이라면, 첫 부분만 봐도 쉽게 눈치챌 수가 있다. 아, 1899년에 여객선을 타고 미국으로 가는 이 현실 자체가 가상현실이구나.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것 말고도 미국으로 여행하고 있는 배 전체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엄청나게 암시를 주고 있다. 배에 표시된 역삼각형의 표식이 승객의 귀걸이나 기모노의 등에도 그려져 있다. 같을 리가 없는 표식을 보여주면서, 사실은 여기가 그 표식과 관련된 무엇이 통제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너무나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이 그것을 눈치채기까지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SF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지루하고,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다가 배신을 당하는 느낌이 들게 된다.
가상현실 자체가 중요한 반전 소재라는 것은 90년대까지만 통용되던 공식이다. 매트릭스 이후, 가상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할 것인가, 혹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와 비교할만한 것은 애플티비+의 <세브란스: 단절>이다. <세브란스: 단절>은 세계가 나눠지는 것을 설명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두 세계가 겹치는 지점이 붕괴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음모에 대해 파헤쳐지는 지점이 엄청난 액션이나 스펙터클이 없어도 굉장한 긴장감을 전해준다. 그러나 <1899>에는 그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반쯤 오면, 등장인물 각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인트로마저 만들어진 기억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가상현실에 대한 암시를 주지 않고 이야기를 끌고 가던지, 아니면 가상현실이 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마지막 회에서 몽땅 몰아서 풀어주었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회에서 알려준 것은 1화에서 이미 눈치챈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보뿐이었다. 이 드라마는 그 실험자들로 무슨 메시지를 주려 했는가? 주인공은 왜 실험을 하고 있으며 자신은 왜 갇혀있었는가? 시스템은 왜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동되고 있었으며, 그걸 멈출 사람이 밖에 있었는데도 왜 놔두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몇 가지 흥미로운 세계관 설정 외에는. 계속 반복되는 장면과 모티브도 나중에는 지겨워졌다.
역삼각형은 버뮤다 삼각지대에 대한 모티브이기도 하지만, 정사면체와 더불어서 삼각형이 입체가 되고, 그것으로 가상현실에서 벗어난 실제 현실 차원이 있다는 암시를 주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들이 왜 긴장감을 가지고 서로 열쇠를 찾으려고 하는 이유가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데. 뭔가 있어 보이려고 질질 끄는 연출을 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이 꽤 있는데, 내 취향이 아니다. 더군다나 시작부터 이미 다 알게 되어 버린다면. 뭐가 더 있겠지 하고 끝까지 본 게 아까웠다. 그저 삼각형 계산기처럼 생긴 만능 패드와, 스팀펑크 디자인의 장치들만 볼만 했다. 이것을 볼 바에야, 애플티비+를 결제하고 <세브란스: 단절>을 정주행 하시길.
아, 나는 절대 스릴러를 이렇게 만들지 말아야지. 누구나 알법한 반전을 최대의 반전인 것처럼 쓰고 묘사하며 실제로도 그게 전부인 이야기 말이지.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