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는 상태가 변해도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보존 법칙'이 여럿 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운동량 보존 법칙 등. 그래서 삶을 그것에 빗대어서, '행복 총량 보존 법칙'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비유하기도 하고, 한 사회 안의 구성원들을 비유하기도 한다. 모두가 조금씩 불행을 나눠가져야만 모두가 어느 정도 행복해진다. 나만 행복하려고 하다 보면, 누군가는 더 큰 불행을 떠안게 된다.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많다. 하지만 세상엔 헤피엔딩이란 없다. 학창 시절 지옥 같은 경쟁 스트레스의 끝은 수능인 것처럼 말하지만, 인생의 경쟁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연애의 해피엔딩은 결혼인 것처럼 말하지만, 결혼이야말로 전쟁의 시작이다. 은퇴나 이혼이 해피엔딩인가? 아직 삶은 많이 남았다. 그럼 호상이 해피엔딩인가? 죽는데 해피엔딩이 무슨 소용인가. 이쯤 되면, 과연 내가 행복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은 초고도비만으로 살 날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찰리(브랜든 프레이저)의 삶과 선택을 그린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언제나 기존에 사람들이 가지는 기독교적인, 혹은 평범한 구원이나 행복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한 인간의 내면에 가진 모순과 복잡성을 광기로 표현하는 데에 도가 튼 감독이다. <더 웨일>은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조용하고 평범한 인상을 주는 영화지만, 그 안에 인물 사이의 심리를 통해 벌어지는 칼날같이 예리한 '파고 듦'은 더 날카롭다. 그것은 마치 모비딕을 조여 오는 작살처럼, 관객의 슬픔을 조여 온다. 흔한 인간승리나 가족애 영화를 생각한다면 등에 칼이 꼽힐 것이다.
찰리는 대학 에세이 강사로,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다. 카메라를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검은 화면 속에 숨어서 수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그가 갑자기 심장이 아플 때 우연하게도 선교하러 온 토마스(타이 심킨스)가 발견해 집안에 들어오지만, 찰리는 종이를 내밀며 이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토마스는 글을 읽고, 찰리는 심호흡하며 이미 몇 번이나 읽었는지 다 외우고 있는 그 에세이를 따라 읽으며 안정을 되찾는다.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 있고, 평범하지 않다.
찰리를 돌봐주는 간호사 리즈(홍 차우)는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듯 담담하게 찰리에게 시한부 선고를 내린다. '울혈성 심부전'. 혈압으로 봐서,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죽게 된다. 하지만 찰리는 응급실로 가는 것을 거부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런 그에게, 리즈는 저녁으로 치킨을 쥐어준다. 리즈 역시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 수없이 설득하고 고치려고 했던 많은 날들은 다 지나가고, 둘은 간호사와 환자가 아니라 친구로서 마지막을 즐겁게 보내려는 것 같다.
사실 이 첫 장면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더 웨일>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세상을 보는 관점
찰리는 딸 엘리(셰이디 싱크)가 있다. 그리고 만나고 있지는 못하지만 딸을 굉장히 사랑한다. 하지만 딸과 행복하게 보내는 날들에 대한 회상은 없다. 그가 항상 떠올리는 장면은 딸과 바다에 놀러 간 날인데, 딸은 혼자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고 찰리는 멀리서 바다의 경계선에 발을 딛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물 밖에 나온 고래와 같은 존재다. 어딘가 항상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파괴된다. 메리(서맨사 모턴)와 결혼하고 나서 딸까지 가진 후에야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찰리는 자신의 남자 제자였던 앨런과 사랑에 빠져, 부인과 딸을 버리고 이혼하고 둘이 살게 된다.
찰리가 딸을 사랑하지 않았거나, 부인과 억지로 결혼한 건 아니었다. 또 정확하게 찰리가 양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나오지 않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다른 사람의 행복은 뒤로 한 채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커밍아웃한 두 사람이 동성혼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선 축하받고 응원받을 일이었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에게 그 일은 지옥과 같았다. 부인인 메리는 자기 남편이 남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아야 했고, 딸인 엘리는 더불어서 아빠에게 버려진 딸이 되었다.
그렇게 맺어진 찰리와 엘런이 행복하게라도 잘 살았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엘런은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단인 교회에 다녔었고, 아버지는 거기 목사다. 찰리와의 사랑으로 그곳과도 등을 졌지만, 그 교회의 가르침은 이미 엘런에게 깊은 죄책감을 심어놓았다. 엘런은 행복했지만 엘런 아버지의 관점에서 엘런은 죄인이다. 엘런은 결국 자신의 관점인 동성애자로써의 행복을 계속 누리지 못하고, 아버지가 깊이 심어놓은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엘런은 서서히 말라가며 죽었고, 찰리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폭식으로 초고도비만이 되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내가 이기적으로 굴며 행복을 추구한다면, 결국 어딘가에서는 불행해지는 사람이 생긴다. 또, 내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관점에 따라서는 누군가는 행복할 수도 있다. 몇천 년 만에 나라를 찾은 이스라엘은 행복하겠지만, 그 일은 팔레스타인 인들에겐 불행이었다. 수많은 클릭질로 임영웅 콘서트 자리를 따낸 것은 나에겐 행복이지만, 또 콘서트를 못 보게 된 다른 사람에겐 불행이다. 한국 전쟁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겐 불행이었지만, 일본에겐 자신들의 무너진 경제를 일으킨 행복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조차,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타인의 눈, 세상의 눈으로 행복을 바라보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입으면 좋을 거야, 이 대학을 가면 행복할 거야, 이 사람과 만나면 행복할 거야.'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내 행복일까? 당신들의 행복이 아니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설프게 이기적으로 행복하려 하다간, 찰리와 엘런처럼 되어버린다.
찰리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방법처럼, 병원을 다니고 다시 딸과 잘 지내고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엘런이 죽었을 때 죽었다. 남은 삶은, 온전히 딸에게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삶이다. 사실 그를 돌보는 리즈는 찰리의 죽은 애인이었던 엘런의 동생이다. 엘런을 죽게 한 것은 찰리였을까, 교회였을까. 어쨌든 그녀는 죽어서 강물에 떠내려온 오빠의 시체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찰리가 마지막으로 하려는 이기적인 행복의 결말을 위해, 이제 리즈는 아끼는 사람이 죽는 것을 눈앞에서 또 봐야 하고, 자신이 시체 처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리즈는 자신의 불행을 감내하려 한다. 찰리의 행복을 위해.
나의 관점으로 사는 삶
찰리가 늘 읽고 있는 그 에세이는 조금 독특하다. 누구나 명작으로 칭송하는 <모비딕>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모비딕>은 일반적인 소설의 관점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너무 많은 부분이 고래에 대한 설명을 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두껍고, 사람에 따라서는 당연히 지루할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모비딕>은 전문가들이 인정한, 미국 문학의 최고 명작 중 하나다. 그것을 비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를 써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모비딕>을 자신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멋지게 읽었는지 써야 한다고 보통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찰리가 읽고 있는 에세이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관점은 의식하지 않은, <모비딕>을 굉장히 주관적으로 바라본 에세이다.
찰리의 딸 엘리는 특별하다. 머리가 똑똑하고, 아빠인 찰리를 혐오한다. 틈만 나면 사진을 찍고 녹음한다. 그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SNS에 아빠 사진을 올려서 조롱하는 악마'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출했던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한 토마스를 신고하는 배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찰리는 엘리를 다르게 본다. 그 행동들이,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엘리의 주체성으로 인식한다. 찰리는 무한히 긍정적인 사람이고, 엘리는 무한히 비관적인 사람이다. 둘은 굉장히 달라 보여 섞이지 않고 계속해서 어긋나는 것 같지만 결국 엘리를 가장 잘 이해한 건 찰리였다. 계속해서 이상한 사진을 찍는 엘리의 행동은,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런 장점도 없어 보이는 사고뭉치 딸 엘리에게서, 찰리는 자신이 깨달았던 '관점의 주체성'을 엘리에게서 보았다. 시를 읽고 감상을 써보라는 이야기에, 엘리는 말도 안 되는 욕을 써놨지만 찰리는 거기에서도 그녀의 관점을 발견한다. 그것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엘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죽은 앨런의 방에는 성경이 꽂혀있다. 토마스는 우연히 그곳에 들어갔다가, 엘런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구원의 구절을 발견한다. 그리고 엘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퍼트리는 바람에 오히려 가출을 접고 용서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토마스의 관점에서 행복은 성경이었다. 그는 이 관점을 찰리에게 강요하고 싶어 한다. 이것을 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토마스는 어리고 찰리는 나이가 들었다. 토마스가 겪었던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왔고, 그 끝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찰리의 관점에서 토마스가 설파하는 모습은 그저 어린애의 장난, 엘런을 죽게 만들었던 교회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토마스에게 앨런의 성경을 준다. 그 성경은 앨런의 유품이므로 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토마스에게 주었을까? 찰리에게 그 성경은 저주와 같은 것이었고, 토마스에겐 구원과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을 찾으라'라고 한 것이다.
매번 피자를 문 앞에 배달해 주는 배달부도, 자신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았다. 문을 열지 않는 찰리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고, 호기심에 지켜보았다. 그 배달부에겐 작은 호기심일 뿐이었지만, 찰리를 발견하고 놀라며 떠나는 행동에 찰리는 또다시 광기의 폭식을 하게 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배달부의 호기심이, 찰리에겐 크나큰 불행이었다. 그걸 또다시 느낀 찰리는, 에세이 수업에서 다 집어치우고 진짜 솔직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며 자신을 보여준다.
찰리가 엘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것
찰리는 엘리에게 에세이 과제를 도와주겠다며 몇 번 만나게 된다. 결국 찰리가 에세이를 써주게 되는데,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건 진짜 좋은 에세이야!" 하지만 엘리는 돌아와서 엄청나게 화를 낸다. 그 에세이가 낙제를 받은 것이다. 엘리는 에세이를 읽지도 않았다. 사실 찰리가 연인을 잃은 슬픔 속에, 과식으로 초고도비만이 되면서도 남기고 싶었던 건 돈이 아니다. 그건 그 과정에서 일어난 부수적인 것이다. 찰리는 그 에세이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에세이가 정말 좋은 에세이라는 걸 알게 해 주고 싶었다. 엘리에게 준 에세이는, 다름 아닌 찰리가 항상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얻은 그 에세이였다.
찰리가 항상 읽던 그 에세이는 사실 엘리가 8학년일 때 쓴 에세이였다. 8학년이면 13~14살이다. 어린이가 <모비딕>을 읽고, 치기 어리게도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든다며 쓴 글이었던 것이다. 화를 내는 엘리에게, 그것이 정말 좋은 에세이라고 말하며 엘리에게 자신의 모든 잘못을 사과한다.
사실 타인의 행복을 위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타인의 행복을 위한다는 일도 사실은 내 마음의 안정이나 행복을 위한 것은 아닐까? 어차피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타인을 내 관점으로 물들이려는 것은 폭력이고, 그 사람에겐 행복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다. 또 내가 타인의 관점으로 산다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엘리의 <모비딕> 에세이처럼, 남들이 다 명작이라고 평가하는 그 책을 재미없게 읽었다면 <모비딕>은 나에겐 재미없는 책이다. 내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찰리는 그 에세이에서, 타인에게 물들지 않고 자신의 관점으로 삶을 사는 엘리를 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대단하다고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찰리는 자신의 삶에서 단 한순간, 연인과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순간 말고는 모든 것이 남의 기준에 맞춰 사는 불행이었다. 비록 그것이 주변인들에게 불행을 가져왔을지라도. 하지만 엘리는 어떤가? 자신의 관점대로 사는 행동이 오히려 어떤 이에게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주고 있지 않은가? 찰리는 마지막 순간, 온몸을 다해 그것을 전해준다. 다른 사람의 눈은 의식하지 않고,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정말 많은 것을 '타인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화나 책을 볼 때 전문가들이 '명작'이라고 하니까 어쩐지 재미없게 평가하면, 내 수준이 낮아질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또 반대로 내가 재미없게 봤다고 해서 타인에게 '그 영화는 쓰레기야'라며 나의 관점을 주입시키려 하고 있진 않을까? 내 관점대로 세상을 보는것, 그리고 타인에게 내 관점을 강요하지 않는 것. 삶의 행복은 그렇게 조금씩 만들어져간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