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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Mar 14. 2023

<똑똑똑> 종말을 대하는 가장 찝찝한 이야기

누군가 행복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에 문을 두드린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7번의 노크에 찾아온 4명은 3명의 가족과 함께 7명이 되어 앞으로 다가올 종말에 대해 선택을 해야만 한다. 나이트 샤말란의 스릴러 <똑똑똑>은 무언가 이상하고 불친절하고 찝찝하다. 공포 소설 <세상 끝의 오두막>을 각색한 이 영화는, 구성이나 전개는 비슷하지만 결말과 메시지가 완전히 다르다. 극적인 종말도, 극적인 구원도, 극적인 반전도, 극적인 깨달음이나 설명도 없다.


7살인 웬(크리스틴 추이)은 메뚜기를 병에 담아 잡다가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덩치 큰 남자와 마주한다. 그는 외모와 다르게 말투가 지적이며 친절하다. 그는 웬에게 친구라고 말한다. 하지만 곧 이상한 무기를 든 사람들이 옆에 등장하게 되고, 웬은 집으로 도망간다. 집에는 웬의 아빠들, 에릭(조나단 그로프)앤드류(벤 알드리지)가 있다. 그들의 오두막에, 4명은 거리낌 없이 침입한다. 이상한 친절과 불친절함의 사이에서.


갑자기 찾아온 4명은 자신들도 서로 누구인지 모르며, 환상을 보고 누가 이곳에 있는지 모르며 이곳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선 이 오두막에 있는 가족 중 한 명이 스스로 기꺼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똑똑똑>은 이들의 말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계속 의심하게 만든다. 왜 자신들이 선택된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받는다.





완벽한 것이 없는 완벽한 세상

<똑똑똑>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은 하나도 없다. 가족은 두 백인 남자지만 게이이고, 자식 웬은 입양한 동양인이다. 웬은 인중이 벌어지게 태어난 구순열이 있어서 인중을 이어 붙이게 수술을 받았다. 찾아온 4명도 그렇다. 유럽에서 가장 차별받는 빨간 머리 레드먼드(루퍼트 그린트), 멕시코 출신 요리사 아드리안(아비 퀸), 흑인 간호사 사브리나(니키 아무카-버드), 문신 가득한 덩치 큰 혼혈 아저씨 레너드(데이브 바티스타). 심지어는 티비 쇼핑채널에 잠깐 등장해 오븐을 파는 아저씨(나이트 샤말란)도 이상하다.


이 영화는 단순하게 PC적인 것을 넣고 싶어서 캐릭터를 억지로 이렇게 설정한 것 같지 않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완벽한 가족'이나 '숭고한 사랑'같은 것이, 기존에 흔히 알던 '남자 아빠, 여자 엄마, 둘 사이에서 낳은 자식'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웬의 구순열 수술 자국은 그런 이미지다. 벌어져 있는 것을 억지로 붙인 자국이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이인 것은 아니다. 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한 부부지만, 둘의 사랑이 여느 남녀부부와 다른 것은 아니다. 억지로 붙였어도 입은 입이다. 억지로 부부가 되었어도 부부는 부부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사회는 우리에게 이상적인 모습,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제시하고 강요하지만, 그것만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완벽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게 살고 있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이 세상은 바로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한 세상이다.




[이하 영화와 원작소설 스포일러]





찝찝한 우연과 필연

인간의 뇌는 믿고 싶은 것들을 믿도록 만들어졌다. 두 정보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면 뇌는 그것을 채우려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눈에 있는 맹점이다. 우리 시신경에는 시신경 세포가 없는 커다란 맹점이 있다. 하지만 눈은 계속해서 조금씩 시야를 바꿔서 정보를 수집해, 그 사이를 메꾼다. 그래서 우리는 두 눈으로 아무 구멍이 없는 시야라고 느끼는 것이다. 점 세 개가 있는 형상을 보면 '사람 얼굴'처럼 인식한다. 서로 다른 두 정보가 왔다면 그 사이를 메꾸고 싶어 한다. 내가 쾌변을 하고 나왔더니 하늘에 무지개가 펼쳐진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4명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재앙이 오는 뉴스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분명 특이하고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허점도 많고 의심할만한 구석들도 많다. 일단 '왜 이런 재앙이 오고 선택을 해야 살아남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다. 정말 신, 혹은 그에 준하는 누군가의 의지가 있는가? 이들은 정말 신의 사자인가? 사이비에 빠져 스스로를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우연과 상상들이 겹쳐서 필연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신이 이런 사랑과 희생에 대해 시험을 하는 것이라면 너무도 잔인하다.


이 영화는 내내 그런 식으로 관객 스스로의 생각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앤드류를 치료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브리나는 마치 성화 속에 그려진 성모 같다. 저녁노을빛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사브리나를 비춘다. 레드먼드가 죽을 때 창문 뒤로 빛이 비치는 것은 계시 같다. 성경을 알고 있는 앤드류는 그들의 직업과 요한계시록을 짜 맞추어 그들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4마리의 말을 탄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4개의 봉인을 풀어 나타나는 그것들은 각각 정복, 전쟁, 기근, 전염병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그 해석은 조금씩 뒤틀려있고 각각 딱 들어맞지도 않는다. 또 묘하게 순서도 틀린 데다 요한계시록에 이 4마리의 말을 탄 자는 7개의 봉인중 4개일 뿐이고, 그 7개의 봉인 후에 7개의 나팔과 7개의 대접의 재앙이 더 있다. 맞추려면 맞출 수 있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사실 그냥 끼워 맞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레드먼드는 왜 이름을 속였을까? 다들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하며 믿도록 하고 싶어 했는데. 그리고 왜 그 증거가 될 물건들은 가지고 오지 않고 차에 두고 있었을까? 찝찝하다. 마지막까지 가서도 이것들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더욱 찝찝하게 만든다.





가장 찝찝한 종말의 해결

사실 이 영화는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싸인>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영화 <싸인>은 의미 없어 보이던 모든 것이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 사이에서 신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신부인 주인공이 그것을 느끼는 것에 관객도 따라가게 된다. 무의미한 것의 유의미. 그때의 나이트 샤말란은 그런 이야기를 담았다.


하지만 <똑똑똑>은 세상 의미 있어 보이는 것은 잔뜩 넣었지만, 거기에 정말 의미가 있었는지 끝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세상이 끝날 것 같았지만 그게 단지 부부 중 한 명이 죽는 것으로 해결된다고? 이렇게 어려운 선택을 하며 세상을 구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게다가 레드먼드는 정말 누구인가. 4명의 침입자들은 오늘 처음 만났다고 하면서 사실은 온라인에서 소통하던 사람들이었지 않은가. 그들이 한 말들이 진실이었다고 해도, 사진 몇 개와 증명서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사실 정말로 종말의 전조였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은 영화 시작에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웬은 큰 병에 메뚜기를 채집하고 있다. 보통 종말 - 메뚜기를 연결시키면 출애굽이나 요한계시록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웬의 대사다. 웬은 병에 담긴 메뚜기들을 보며, 잠시 관찰한 후에 놓아줄 것이라고 말한다. 메뚜기의 입장에서 병에 갇힌 것은 맥락이 없는 종말의 전조다. 그저 거기에 있었을 뿐인데 어린아이의 손에 잡힌 것이다. 그리고 웬이 착해서 잠시 관찰하다 놓아준다 한 것이지, 어떤 아이들은 의미 없이 날개나 팔다리를 뜯기도 하고, 잠자리에게 먹게 하기도 하고, 병에 가둔 채 잊어버리고 떠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닥친 인류의 종말도 비슷하다. 만약 이것이 진짜라면, 누군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맥락으로 그 선택의 과정을 지켜보는 실험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들을 이토록 괴롭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이들을 관찰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감독과 관객이다. 우리는 그 선택의 고통과 싸움을 즐기러 영화관에 갔고, 감독은 그 이야기를 재미있다고 영화로 만든 장본인이다. 영화 초반 빛이나 환상 등의 연출을 통해서 종말을 해결한 이들에게 좀 더 구원의 상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그런 것처럼, 불행과 행복은 소리소문 없이 찾아왔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그저 사라져 버렸다. 병에서 풀어준 메뚜기처럼 어리둥절할 수밖에. 영화라는 매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감독이 의도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수많은 상징과 이야기들을 엮어서,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진실은 그저 흩뿌려놓은 우연의 조합일 수도 있는데.



<똑똑똑>은 참으로 찝찝하다. 하지만 찝찝해서 더욱 큰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관객에게 이해시키지 못하고 찝찝한 수익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찝찝하다. 이해받지 못하는 찝찝함은 그저 찝찝함일 뿐이다. 그래서 글을 쓰다 보니 이런 말을 하며 마무리하고 싶어 진다.


"오, 완벽할 만큼 찝찝해!"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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