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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Jun 23. 2023

<플래시> 이제 제발 죽여줘

플래시는 1940년대에 등장했던 DC코믹스의 장수 캐릭터다. 빨리 움직이고 달리는 스피드스터 계열 히어로의 원조. 그 이후 수많은 리부트가 있었고, 드라마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솔로무비로 만들어진 적은 없었다. 그 인기와 역사와 힘을 생각하면 좀 의아할 정도다. 이번 영화 <플래시>는 플래시의 대표적인 이벤트인 <플래시 포인트>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플래시(에즈라 밀러)는 설정상 광속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미래와 과거를 오가며 평행우주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도 가능하며 멀티버스의 여행도 가능하다. 슈퍼맨처럼 날지 못하고 우주에서 숨을 못 쉬고 몸이 슈퍼맨만큼 강하지 못하다 뿐이지, 속도만으로는 슈퍼맨을 아득히 능가한다. 그런 플래시가, 어릴 적 죽은 어머니와 살인누명을 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이 <플래시포인트>의 내용. 게다가 이 영화에는 1989년작인 팀버튼의 배트맨(마이클 키튼)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꽤나 신선하고 감각적인 액션, 플래시의 캐릭터성을 잘 살린 연출은 식상해진 히어로물이 아닌 새로운 느낌을 준다. 스크린으로 전해지는 박력은 마치 엑스맨이나 스파이더맨이 2000년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 느낌과도 흡사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지점은, 이것은 영화의 외적인 교훈마저 담은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다중우주(멀티 유니버스)인가, 평행우주(페러렐 유니버스)인가?

원래 과학에서는 멀티버스와 페러렐 유니버스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멀티버스가 더 큰 개념으로, 여러 가지 이론이 있고 우주가 초창기부터 아예 다양한 차원에 무한히 많은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들이 멀티버스다. 현실 지구와 전혀 다른 개념의 차원과 우주가 존재하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 시리즈에서 설명하는 멀티버스가 원래의 개념에 더 맞다. <닥터 스트레인지>1편에서 나오는 도르마무의 '다크 디멘션'이나, 2편에서 통과하는 각양각색의 세계들이 멀티버스다.


평행우주는 많은 멀티버스 이론 중 '양자적 평행우주'의 개념으로, 수많은 선택지에서 다른 방향으로 선택되어 갈라진 역사가 만들어낸 우주다. <드래곤볼>이 대표적인데, 인류가 멸망한 미래의 트랭크스가 과거로 와서 그 원인인 손오공의 심장병을 고친다. 그러자 이 세계의 미래는 트랭크스가 살던 미래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트랭크스가 다시 자신의 미래로 갔을 때 인류가 멸망한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즉,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진 우주 하나가 더 갈라져 나타난 것이다. 고전 tv예능 중에 <인생극장>은 주인공이 어떤 지점에서 '그래 결심했어!'라며 각기 다른 선택을 한 미래를 보여주는 드라마 예능이었다. 그것이 평행우주다. 즉 시간이동이나 어떤 선택에 의해서 미래가 갈라지는 설정이 있다면 그것도 멀티버스긴 하지만 평행우주라고 말하는 게 더 엄밀하다. 미국에서는 보통 멀티버스와 페러렐 유니버스·페러렐 월드를 구분해서 쓴다.


플래시는 미국 코믹스에서 평행우주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례다. 원래 1940년대의 캐릭터였지만 (플래시 1세대가 1차 대전 헬멧을 쓰고 있다) 나중에 연재가 종료되고, 1950년대에 다시 설정을 바꾸어서 재탄생시킨다. 그래서 설정이 달라진 것에 대해 사람들이 묻자, '평행우주의 플래시다'라며 퉁친 게 지금까지 나오는 모든 DC와 마블 평행우주 설정의 시초다. 요새 사람들이 무책임한 멀티버스설정에 피곤해하는데 사실은 원조였다는 이야기. 영화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시간여행의 표현

<플래시>의 가장 개성 있는 점 중 하나는 바로 시간여행에 대한 표현이다. 다른 시간여행은 필름을 되감거나 빨리 감기 하는 방법, 혹은 웜홀과 같은 차원이동터널을 통과해 가는 표현을 주로 썼다. 이것저것 불편하면 그냥 암전 되었다가 원하는 시간대에 깨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플래시>에서는 시간여행과 동시에 그것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의 가짓수를 동시에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선 플래시가 점점 빠르게 달린다. 빠르게 달리면서 초광속으로 진입하면,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 자신을 따라잡지 못하는 특이점에 도달한다. (실제 물리법칙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영화적 표현이 그렇다는 말.)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하고, 그 주변으로 가능성 존재의 가짓수가 마치 콜로세움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는 포인트가 이전 영화들은 대부분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가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특정한 인물에 집중해서 그 인물의 과거를 따라가는 방식이다. 실제로 지구는 자전하고, 태양을 돌고 있으며, 태양은 우리 은하를 돌고 있고, 우리 은하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기에 장소와 시간이라는 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과거와 미래를 이동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간여행 영화는 이 부분을 퉁치고 넘어간다.


플래시가 달리고 있는 시간의 특이점에 가장 가까운 어느 인물이 플래시가 도달하려는 포인트에서 가짓수가 10개라면, 그보다 조금 먼 현실은 20개, 조금 더 먼 것은 40개, 이런 식으로 가짓수가 늘어나 보인다. 이것은 알파고의 바둑 두는 방법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바둑은 그 경우의 수가 너무나도 많아, 컴퓨터가 인간처럼 계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세돌과 두던 알파고는 경우의 수를 전부 계산하지 않고, 필요에 따른 가능성의 수를 계산하는 것으로 그 경우의 수를 낮추었다. 바둑을 둘 때 모든 곳에 둘 수 있을 것 같지만, 상대방의 수에 따라 둘 수 있는 돌의 위치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알파고는 인간의 기보를 학습하며 배웠고 그것으로 이세돌을 이길 수 있었다. 물론, 인간의 기보없이 스스로 학습한 그 이후의 알파고는 인간 자체를 뛰어넘어버려 바둑을 은퇴했지만 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내가 10분 뒤에 무엇을 할지 모든 경우의 수가 있을 것 같지만 물리적 심리적인 제약등이 작동해 사실은 그렇게 가짓수가 많지 않다. 그래서 지금 현실과 가장 가까운 과거나 미래는 가짓수가 아주 적고, 더 먼 과거나 미래로 갈수록 그 경우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플래시>에서 표현한 시간여행의 모습은 그 가짓수에서 특정한 부분을 선택해, 시간의 특이점인 구에서 빠져나와 이동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의 수를 이용한 시간이동의 모습은 정말 특이한 방식이다. 또한, 플래시가 초광속으로 이동할 때 피부의 질감을 일부러 떨어트려 마치 마네킨 같은 느낌을 줬다. 플래시가 초광속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빛의 굴절이나 감각이 달라지는 것을 표현했다고는 하는데, 이것은 호불호가 많이 갈려 플래시가 혹평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이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은 캐릭터 살리기

사실 마블이나 DC드라마를 좀 보다 보면 느끼는데, 배우와 캐릭터는 한정적인 상태에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려다 보니 그럴 때 멀티버스 개념이 정말 편리하다. 죽은 줄 알아서 아쉬웠던 캐릭터가 다시 나타나줘서 반갑고, 그 캐릭터는 또 조금씩 달라져있어서 약간 덜 지루해지기도 한다. 코믹스에서는 워낙 오랜 시간 이어지고 시대에 맞게 변주하려다 보니 그렇게 대대적으로 설정을 갈아엎는 이벤트도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걸 비슷하게 가져오는 건 너무 안일한 설정 아닐까?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캐릭터는 반드시 적절한 퇴장이 있다. 퇴장이 없이 끝나고 지나가버린 캐릭터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추억이 있는데 억지로 불러와서 되살리는 건 그 추억에도 못할 짓이다. 영화 <플래시>가 그런 점에서 재미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런 무분별한 평행우주를 온몸으로 비판하고 있다.


먼저, 플래시는 자신의 엄마를 구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한다. 현실과 상관없는 다른 차원의 멀티버스로 여행하는 것과 달리, 과거로 간다면 과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쳐선 안된다. 영화 <나비효과>처럼 아주 작은 하나라도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어머니를 구할 방법으로, 토마토소스를 카트에 넣는 것을 생각해 낸다. 토마토소스가 없었기에 아버지가 사러 집을 나갔고, 아버지가 없었기에 누군가에게 엄마가 살해당했다고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자신이 사는 미래와는 다른, 또 다른 평행우주를 만들어버린 셈이 되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비튼 시간보다도 과거지점에서부터 바뀌어 보였다. 완전히 새로운 브루스 웨인(마이클 키튼)의 출현, 슈퍼맨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갇혀있던 슈퍼걸 카라 조엘(샤샤 카에)이 등장하는 현실 등이다. 시간의 꼬임이라는 것은 하나의 갈라짐이 아니라 과거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브루스 웨인은 설명한다. 브루스 웨인의 모습으로 보아, 이곳은 1989년 팀버튼의 <배트맨> 세계의 미래다.


89년작 <배트맨>은 그동안 실사 코믹스영화의 판도를 바꾸었을 정도로 대단한 영화였다. 마이클 키튼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화제가 되었으니. 하지만 <플래시>가 바꾼 이 평행세계의 미래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이 세계에선 지구를 테라포밍 해서 지구인들을 다 죽이고 크립톤인들의 행성을 만들려는 그의 계획을 막을 수가 없다. 결국 슈퍼걸도, 배트맨도 최후를 맞이한다. 과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룰을 깨고, 이 세계의 플래시와 원래의 플래시는 계속해서 과거로 가 배트맨과 슈퍼걸을 구할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어느 것으로 보나 결과는 똑같다. 과거를 바꿔도 운명처럼 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지점, 이곳이 그곳이었다. 배트맨은 죽어가면서 플래시에게, 죽어가는 것을 보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로 돌아가는 힘이 생겼다고 해서,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되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너를 만들었고, 너는 나를 먼저 만들었다

배트맨은 왜 그런 교훈을 알고 있을까? 팀버튼의 <배트맨>이 바로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원래 조커와 배트맨의 설정과는 달리, 조커가 그저 갱이었던 시절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죽이게 된다. 브루스 웨인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배트맨이 되어 악당을 처치하는 다크히어로가 되고, 배트맨은 그 와중에 그 갱을 화학 약품에 빠트려 얼굴이 일그러진 조커가 탄생했다. 조커는 배트맨을 미워하며 미치광이처럼 더 악행을 저지르고 사람들을 죽이는데, 배트맨은 조커의 만남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너를 만들었고, 너는 먼저 나를 만들었다."


세상은 인과 연으로 얽혀있다. 과거로 돌아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바로잡으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지점들도 과거의 잘못된 선택에서 올 때가 있고, 과거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선과 악은 나눠져있지 않고, 성공과 실패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원래 2차 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독일처럼 분할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만주와 사할린을 점령하고 일본으로 내려오는 와중에, 일본은 절묘하게 항복을 선언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지점이 한반도가 되어 한국이 분할되었고, 한국은 아직도 분단국가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을 분할했다면, 한국은 아마 소련의 지배아래 있다가 다른 소비에트 연방국가들처럼 90년대쯤 독립했을 것이다. 무엇이 더 나은 세상인가?


삶은 단순하지 않다. 내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있지만 내가 영향을 준 일들도 있다. 미친 범죄자 조커를 만든 것은 배트맨이지만, 배트맨을 탄생시킨 건 조커였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가 얽혀있다. 누가 누구를 처단한다고 한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영화의 큰 교훈을 알려주기 위해 팀버튼의 배트맨이 가장 적절했다.



과거는 과거 속으로

영화 산업에서 CG분야는 근 20년 사이에 정말 크게 발전했다. 요새는 AI를 이용한 딥페이크도 너무나 발전해서, 고가의 3D CG가 아니더라도 순식간에 그 배우의 얼굴, 목소리, 노래 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촬영 중 배우가 사망한 경우, 부득이하게 일부장면에서 그런 특수효과를 사용하기도 했다.


한 인간의 삶이 소중한 것은 그것이 한번뿐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죽어갈 때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되살리지 못하기에 그들의 희생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숭고하며 자치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슬픈 과거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현재에 있는 나를 만든 근간이다. 나는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슬픔과 교훈을 얻어 살아간다. 스티브 잡스도 그렇게 말했다. "삶의 최고의 발명품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키고 새로움이 낡은 것을 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새 마블과 디씨를 중심으로 한 코믹스 실사영화에선, 코믹스에서 인기 캐릭터를 수십 년간 우려먹는 장치인 '멀티버스'와 '페러렐 유니버스'설정을 아무 고민 없이 편리하게 가져다 쓰고 있다. 인기 캐릭터가 생각보다 초반에 죽으면 멀티버스에서 다시 불러낸다. 미국 코믹스는 수십 년간의 역사와 수백 편의 회차와 작가가 존재하지만, 영화는 그 정도는 아니다. 멀티버스가 영화의 양념정도로 등장해서 '추억 되살리기'로 이용되면 좋겠지만, 요새는 아예 그게 주제가 되어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무분별하게 '멀티버스'라는 이름으로 죽은 캐릭터를 되살리면 캐릭터들의 죽음에 슬퍼할 감정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캐릭터의 성공과 실패,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에 감정이입이 덜된다. 왜? 어느 곳에서는 다르게 사는 같은 캐릭터가 있을 테니까. 다중우주와 평행우주 개념은 편리한 장치지만, 캐릭터의 고유함을 떨어트린다.


<플래시>도 결국, 자신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꾸려고 한 시도가 모든 것을 바꾸었고 결국 인류의 멸망을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과거로 가서, 토마토소스를 되돌리려 한다. 하지만 평행우주의 플래시는 당연히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슈퍼걸과 배트맨을 되살려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어야 어머니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해 시간의 특이점 안에서 평생을 살며 수천수만 번을 되풀이해 살려내려 애쓴다. 그는 그 안에서 시간을 마구마구 흩트리며 결국 모든 평행우주를 깨트리는, '다크 플래시'가 되어버렸다. 세상을 구하려 한 행동이 세상을 멸망시킨다. 플래시는 다크플래시를 만들었다. 그럴 힘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것을 되살릴 수는 없다. 때론 죽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보내줘야 한다.


플래시, 배리 앨런의 엄마는 죽었다. 하지만 엄마가 죽었고 아빠가 그 일로 감옥에 갇혔기에 법의학자가 되었고, 약품과 함께 번개를 맞아 플래시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플래시 포인트>나 넷플릭스 드라마 <플래시>내용에 따르면 사실 엄마의 죽음은 플래시와 그의 숙적 '리버스 플래시'의 싸움 중에 죽게 된다. 엄마의 죽음은 플래시를 만들었고, 플래시는 엄마의 죽음을 만들었다. 과거와 미래는 하나로 엮여있는 것이다.




되살아난 팀버튼의 배트맨은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그는 죽어야 했다. 평행세계 너머로 보이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 만들어질 뻔했던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 역시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과거는 과거로 남겨둬야 소중하고 가치 있는 법이다. 그런 영화를 만들 힘이 생겼다고 해서 추억을 마구 되살리고 마구 겹치게 만든다면, 플래시가 슈퍼걸과 배트맨을 되살리기 위해 수없이 반복한 일들로 평행우주가 서로 겹치며 깨지고 소멸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추억과 과거는 깨어져버린다. <플래시>는 바로 그런 지점을 말하고 있다. 죽은 것들은 죽게 내버려 두라고.


바야흐로 각종 '유니버스'의 시대다. 멀티버스나 페러렐 유니버스뿐 아니라, 큰 세계관(유니버스)을 공유하는 영화, 만화, 드라마들이 넘쳐나고, 서로 콜라보를 통해 주인공들이 겹쳐 출연한다. 또한 과거에 죽었던 캐릭터들을 되살려 출현하는 것도 모자라, 멀티버스를 PC에 이용하기도 한다. 캐릭터 자체의 서사나 소중함은 온데간데없고, 상업적인 논리에 따라 캐릭터와 영화를 생산한다.


무분별하게 과거를 되살리는 영화 관계자들은 알까? 자신들의 모습이 바로 캐릭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크 플래시'의 모습이라는 것을.











*1대 플래시와 더불어서 슈퍼맨들 갈라진 평행우주의 틈 사이로 플래시들을 바라본다. 옛날 영화장면을 필름처럼 그대로 쓰지 않고 왜 이런 새로운 장면을 직접 촬영해 사용했느냐 하면, 플래시는 당연히 그 초광속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인물이고 슈퍼맨도 그렇기 때문이다. <저스티스 리그>에서 슈퍼맨은 초광속의 플래시의 움직임을 따라잡는다. 뿐만 아니라 사실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날아서 지구의 자전을 거꾸로 돌려(...) 지구의 시간을 통째로 과거로 가게 하는 능력도 있었다. 즉, 슈퍼맨은 그 우주의 깨짐을 눈치채고 시간의 특이점에 있는 플래시를 느끼고 바라본다는 설정이어서 더욱 소름이 돋았다.


*크리스토퍼 리브는 평생을 슈퍼맨으로 살아온 배우였다. 그의 슈퍼맨을 기억하는 세대는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슈퍼맨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가 낙마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을 때도 삶에 대한 의지나 그가 보여준 긍정적인 모습은 슈퍼맨 그 자체였다. 그가 평행우주의 세계 저편에서 플래시를 응시하는 그 모습은 잠깐일 뿐이었지만 우리가 그리워하던, 어딘가에 살아있을 슈퍼맨 그 자체였으므로 눈물이 핑 돌았다.


*결말에 대해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특히 왜 마이클 키튼의 브루스 웨인과 카라 조엘이 재판이 끝나고 축하해 주는 장면을 찍었음에도 생뚱맞게 조지 클루니가 브루스 웨인으로 등장하도록 끝냈냐는 것. 하지만 여기서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이 살아있다면, 영화 전체적인 주제가 흐려지게 된다. 죽음을 죽음으로 보내야 한다는 교훈은 없어지고, 여전히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캐릭터가 있으니 죽이지 마'가 되어버린다. 관객의 그러한 요구들이 또 멀티버스를 무리하게 만드는 영화가 난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멀티버스는 관객을 피로하게 만들고 있지만, 관객이 그 멀티버스를 만들기도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조지 클루니 브루스 웨인의 결말은 아주 마음에 든다. 최고 흥행 배트맨 마이클 키튼에서, 최악의 흥행으로 평가받는 조지 클루니의 배트맨으로 변한 세계. 본드로 억지로 붙여놓은 이빨처럼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그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 무언가를 바꿔버린 플래시는 이빨 빠진 그 모습처럼 말 그대로 망한 것이다. 누군가의 말 대로, 에즈라 밀러를 조지클루니의 배트맨 유니버스에 유배보냈다는 해석도 재미있다.


*플래시를 맡은 에즈라 밀러의 범죄행각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잘나와서 강행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역대급이다 아니다의 호불호가 또 갈린다. 이야기나 배우이슈등에서 안좋은 부분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년 올해 밋밋했던 마블 DC의 액션을 되살렸다는 평을 할만은 하다고 생각한다. 액션연출이나 타격감, 카메라 무빙은 정말 훌륭했다.


*엔딩 크레딧에서 떨어지는 개 장면. 자신을 구하려다 지나치는 플래시를 보며 짓는 표정이 웃긴데, 실제로 개의 동체시력은 인간보다 훨씬 좋다. 또한 인간은 초당 24프레임이 넘으면 실제처럼 인식하지만, 개나 고양이는 최소 초당 60프레임 이상이어야 실제처럼 인식한다. 인간이 못느끼는 형광등의 플리커 현상도 개는 느낀다. 따라서 플래시의 동작을 개가 어느정도 인식하며 보고있다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어느정도' 과학적인 셈.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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