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서워요. 모두가 내 탓을 해요. 아니, 실제로 내 탓인 것 같아요. 내가 실수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의사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모두가 내 잘못이죠. 나는 죄인이고, 모두에게 민폐덩어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싶어요."
보(Beau/ 호아킨 피닉스)는 정신과 의사에게 사소한 잘못을 고백한다. 가글을 삼켰다는 것이다. 의사는 괜찮다고 말하며, 정신과 약을 처방해 준다. 꼭 물과 함께 먹으라는 지시와 함께.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정신적으로 심약한 상태인 주인공 보가 겪는 일상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해주는 영화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보가 엄마의 집으로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물리적 심리적 사건들이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보이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로 인해, 그 모든 것이 엄마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상황과 사건들, 앞뒤가 맞지 않는 일, 현실을 초월한 전개가 합쳐져서 현실과 환상, 그리고 내적 변명까지도 모두 뭉뚱그려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진짜 일어난 일이고 어떤 것이 환상이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보에게 있어서 진짜로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재미있어진다. 이건 특정 정신병이라기보다는 더 보편적인 이야기다. 사람마다 누구나 우울증 등 심신 미약에다 가스라이팅 당하는 상태가 되면, 세상이 이렇게 느껴질 테니까.
영화의 시작은 보가 태어나는 장면이다. 태어나고 나서 머리를 부딪힌 게 아니냐, 울지 않는다고 엄마가 소리치는데 의사는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한다. 그리고 어린 보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엄마는 거기에서 아이는 왜 때리냐고 소리친다. 신생아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울음을 터트리기 위함이지만,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사회적으론 처벌의 의미도 있다. 왜 아이를 때리냐고 항변하는 엄마의 울부짖음에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처벌받는 삶이 곧 보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죄책감과 변명
보는 엄마에게 줄 선물에 편지를 쓰는데, 자신의 이름을 적을 때 마침 볼펜의 잉크가 다 되어서 잘 써지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써지지 않다가, 서랍을 열어 새 볼펜을 꺼내면서 다시 이름을 선명하게 쓸 수 있다. 이것은 자기가 싫은데도 해야 할 것들, 자신이 실제로 잘못한 것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보의 마음상태다. 보 Beau라는 특이한 이름은 사실 영어에서는 남자친구 Boyfriend의 준말이다. 그의 이름은 엄마가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엄마는 아들을 평생 '남자친구'라고 부른 셈이 된다. 보는 계속해서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고 엄마를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잉크가 흐려져서 이름을 못쓰게 되는 것은 '내가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은 영화 내내 일어나는데, 우선 보의 집 밖은 완전한 무법천지다. 알몸의 살인마가 돌아다니고 있고, 자살하고 싸우고 섹스하고 소리치는 많은 것들이 넘쳐난다. 집 밖에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다. 집의 벽 뒤에서 조차 시끄럽게 싸우고 보를 탓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안식처는 집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편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약을 먹어야 하지만 약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물과 함께 먹으라고 했는데 수도 고장으로 물이 안 나온다. 물을 사러 나가야 하는데 열쇠가 없다. 엄마를 보러 가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계속해서 음악을 틀지 말라고 하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비행기 시간에 늦는다. 살인마가 자신을 찌르고 차에 치인다. 엄마를 보러 갈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이 이상한 사건들에서 공통된 것들이 있다. 사건 자체로 보면 보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모두가 보의 탓을 한다. 그 이유조차 말이 안 되는 것들 뿐이다. 해야 할 일들을 가로막는 사건들은 보의 탓을 한다. 왜냐하면, 보는 어린 시절 엄마의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끝없이 가스라이팅 당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좋다, 싫은 것을 싫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엄마가 싫어할 것 같은 욕망은 감추고,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은 외부의 탓으로 돌린다. 끝없는 죄책감에 쌓여있고, 그것을 견디기 위해 '나는 잘못이 없지만 사람들이 내 탓을 하는' 심리적 방어벽을 쌓은 것이다.
그런 심신 미약 상태가 되면, 외부의 것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조롱하거나, 모든 것이 인과가 성립하지 않은 어떤 외부의 인물 때문이라는 환각 환청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대표적으로 조현병이 그런 상태다. 누군가 CCTV나 도청으로 나를 계속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창문을 막고 틀어박히고 경계한다. 영화에서도 미래까지 녹화된 CCTV는 그런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보의 욕망
보는 사실 엄마로부터 벗어나서, 자신과 비슷하지만 닮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족을 꾸리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은 그가 숲 속에서 만난 '숲 속의 고아들'유랑단이 하는 연극에 자신을 투영하며 나타난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만난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그런 욕망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엄마가 그에게 악랄한 것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보의 아빠도, 할아버지도, 다 사정을 해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 그 때문에 보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후반부 장면에서 나오지만, 그 이야기는 보의 마음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혀 흉측한 모습의 괴물이 되어있다.
아빠가 누구인지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빠를 찾는 보에게 엄마는 '사정 후 심장마비'라고 둘러대고 다락에 가둬 벌 준 일들로 인해, 보는 그때부터 '욕망하는 자신'과 '엄마가 원하는 자신'을 분리시켰다. 꿈속에서 계속해서 되뇌는 그 장면을 '자신과 똑 닮은 쌍둥이를 가두는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기에 자신이 무언가를 욕망할 때마다, 외부의 사건들로 그것을 치환시킨다. 가스라이팅 하는 엄마는 이제 없는데도, 보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가스라이팅한다.
연극에 자신을 투영해서 한참 연민에 빠져 즐기다가, 거기서 깨져 나오는 장면은 정말 우습다. 자신은 한 번도 여자와 섹스를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세 아들이 있지? 엄마는 누구지?라고 생각하는 장면. 그리고 이것이 그냥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거기에서 빠져나온다. 아무리 행복한 상상을 하려 해도,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엄마가 심어놓은 '섹스에 대한 금기'다.
장례식 이후의 사건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난 집에 겨우겨우 도착한 보는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여러 사진들과 물건을 보고, 소파에서 잠이 든다. 하지만 무슨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깨는데, 이때 어린 시절 만났던 첫사랑 일레인(파커 포시)을 만나게 되고, 갑작스레 섹스를 하고 사정까지 한다. 사정을 해도 죽지 않았고 그게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일레인은 마치 인형처럼 굳어져 버렸고, 죽은 줄 알았던 엄마가 등장한다. 엄마는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끝없이 보의 탓을 한다. 결국 보는 의도치 않게 엄마를 다시 죽이게 되고,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난다. 큰 동굴로 들어가니 거기는 물속에 잠긴 콜로세움 같은 곳이고, 보에 대한 재판이 이뤄진다. 보는 유죄가 되며 보트가 뒤집힌다.
마지막 파트가 이렇기 때문에 이것을 진짜 사건으로 해석해서 엄마가 살아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앞의 이야기와 맞춰 해석하면 소파에 누웠을 때 이미 잠에 들어 엔딩까지는 모두 보의 마음/꿈 속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엄마가 죽었기 때문에 '사정을 하면 죽는다'라는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그동안 고환이 부을 정도로 참고 있던 몽정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라오는 죄책감은 환상 속의 엄마로 나타났고 보는 그것과 처음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다시 자신을 탓하는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도망간 것이 자살인지, 혹은 가스라이팅이라는 꿈에서 벗어나 새로 태어난 것인지는 명확지 않다. 아마도 영화의 처음 자궁 속에서 태어난 소리와 비슷한 소리로 '심판의 자궁'경기장에서 빠져나간 것을 보면, 그는 어떻게든 새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예수라면 어떨까?
아버지 없이, 실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태어난 사람. 혹은 아들을 보(애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들이 곧 남편이라는 것. 아버지와 아들이 같지만, 실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모순적인 인물은 누굴까? 바로 예수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에서 보가 겪는 일들은, 모두 예수의 일생과 겹친다.
우리는 예수를 신성화한 책을 보며 그를 고귀한 존재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예수가 겪었던 삶은 어떨까? 모두가 그에게 어떤 큰 일을 바라고 있고, 결국 자신들의 죄를 예수에게 덮어서 예수를 죽이려 한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험한 세상에서 이유도 없이 자신을 탓하며 죽이려고 쫓아오는 보와 너무도 닮지 않았을까? 보는 영화 속에서 알몸 살인자에게 칼이 찔리는데 옆구리가 뚫리고 손바닥을 마구 찔린다. 인간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손과 옆구리에 구멍이 난 것과 유사하다. 또, 보는 도망치느라 유리문을 깨고 나와 유리파편이 이마에 박혀있다. 예수도 죽기 전에 가시관을 써서 이마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앞뒤가 맞지 않은 환상으로 쓰인 연극/동화는 성서와 비교할 수 있다. 그의 실제 삶이나 감정과는 다르게써졌을 수도 있는 이야기. '사정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들이 셋이나 있지?'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이브의 첫째 자식인 카인이 누구와 결혼했는지, 카인이 세상을 떠돌 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데 그들은 누구인지 인과가 맞지 않는다. 신학적인 해석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해석'일뿐이다.
보의 첫사랑인 일레인은 은근히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거나, 엄마가 cunt라는 식으로 말하고 보의 유일한 성적대상이라는 게 성경의 막달라 마리아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는 설은 잘못 알려진 것이고 교황청에서도 그것을 정정해, 실제로는 사도급 여제자였다는 게 정설이다. 또 살면서 한 번도 섹스를 안 한 것으로 알려진 예수와 보도 겹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는 설 또한 애매하게 그린 것이 비슷하게 겹친다. 마지막 콜로세움과도 비슷한 경기장에서 군중들에게 심판을 받는 장면은 예수가 유대인들과 빌라도에게 심판받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많은 모티브에서 보가 예수와 같이 그려지는 것에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크나큰 사랑으로 자신이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인간이 모든 죄를 예수에게 뒤집어씌우고 죽였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아비를 모른 채 태어난 한 아이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던 것은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본다면, 조금 또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을 같이 보면 더 재미있다. 여기에서 예수의 역할은 역시 호아킨 피닉스가 맡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보의 선한 마음이다. 비록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해도, 보는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으므로 상담을 계속 받고 있고, 약을 열심히 먹고, 환각과 환청을 일상처럼 경험하면서도 항상 민폐를 끼칠까 염려한다. 조현병이나 정신지체, 자폐 등 많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삶 속에서 살고 있는지 이해하려 해 보기도 전에, 겉모습이나 행동에서 조금만 위화감만 와도 두려워하거나 혐오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욱 세상에 나오지 않고 숨어버리고 있다. 세상이 그들에게 가지는 편견은 또한 그들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게 만든다. 너희들은 피해를 끼칠 거라고. 잘못할 거라고. 잠재적인 죄인이라고.
세상이 보를 조금만 보듬어주었으면 보가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어느새 세 아들을 키우면서.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