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길 꿈꾼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멋진 인생, 하고 싶은 것을 해낸 그런 성공한 인생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노력을 해도, 성공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따라줘야 한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주변에서 나를 갉아먹으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달려도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도착하기는 커녕 더 멀어지는 것 같다. 내가 열심히 달리지 않아서인 것 같다. 계속 달리고 달리다, 그러다 쓰러진다.
남궁선 감독의 <힘을 낼 시간>은 성공하지 못한 채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 은퇴한 아이돌들의 이야기다. 수민(최성은), 태희(현우석), 사랑(하서윤)은 화려한 무대에 서는 것,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보는 게 좋았던 청년들이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연습생을 시작해 그 흔한 수학여행도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참에 '같은 처지'의 친구들끼리 수학여행을 간다 생각하고 제주도로 온 것이다. 남들 다 해보는 것을 하고, 남들 다 가보는 곳을 가자고. 하지만 이 여행은 시작부터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다 틀어진다. 어찌 보면 산다는 것도 다 그런 거다. 내가 필요한 만큼 다 가지고 시작하면 좋겠지만, 삶은 실수들의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애초에 잃어버린 채 시작한다.
이미 나도 남부럽지 않은 힘든 인생을 살고 있었기에, 고작 20대 중반의 청년들이 겪는 아픔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감이 될까 생각했었다. 너희들은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해 보기라도 했잖아라면서. 하지만 점점 이야기가 흘러가며 나오는 그들의 아픈 이야기들,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망가진 몸,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을만한 고통들은 나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터덜터덜 걷거나, 실없이 웃거나, 실수하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괜찮다고 서로 토닥이는 태도들은, 이야기가 뒷부분으로 흘러갈수록 너무나 수많은 아픔을 받았기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로드무비지만 그 잔잔함의 바닥 속에는 격렬한 물살이 흐르고 있다. 아이돌들의 화려한 무대나 해맑은 웃음 뒤에 감춰진 차가운 비바람. 그건 마치 정말 은퇴한 아이돌에 빙의된 듯한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기도 하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위로가 될 수는 있어도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보긴 힘들다. 아픔을 가진 이 세 사람의 여행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건, 그들을 알아본 팬인 소윤(강채윤)을 만나면서부터다. 소윤은 조금은 눈치가 없지만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다. 소윤은 이들이 가진 추억과 아픔과 기쁨을 정면으로 드러내게 한다. 그들이 그렇게 쉼 없이 달려 만들었지만 그다지 인기 끌지는 못했던 노래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노래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그들은 자신이 뿌려놓은 것들로 인해 자신이 다시 되살아나는 거니까.
내가 여기에 있다.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고 알리고 싶었기에, 나도 오래도록 힘든 시간 사람들에게 뿌렸던 하찮은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몰랐다. 그런 것들이 결국 별처럼 모여서 나를 살려줄 손이 되어줄 줄은. 이 영화에서 소윤은 이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저 잠깐 '힘들지만 수학여행이나 가볼까?' 정도의 여행의 의미가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잠깐 길을 잃어버려도, 멀리 돌아가도 돼. 힘이 들면 잠깐 멈춰 서서 쉬어도 돼. 잠시 쉬고 주위를 둘러보면 이젠 힘을 낼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나도 오래 쉬었다. 이젠 힘을 낼 시간이다.
*아트나인에서 열린 GV에 참석했는데, 마지막 인사 때 남궁선 감독님께서 우셨다. 정작 힘을 낼 시간은 감독님에게 필요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