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주변과 상생하는 방법을 모르고, 타지에 들어가 낯선 이가 있으면 경계하고 전쟁하여 몰살시켜왔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렇게 자라왔다. 그러기에 낯선 누군가가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경계를 한다. 내 것을 빼앗으려, 나를 죽이러 왔다고 생각한다. 바로 우리 인류가 다른 생물들에게 그렇게 해 왔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400미터가 넘는 커다란 웨지감자가 12대나 지상에 나타났다면, 그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패닉이 일어나고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인류는 그렇게나 어리석다.
2017년에 한국에 개봉한 <컨택트(Arrival, 2016)>는, 사람마다 해석의 여지가 다르고 충분한 설명이 되어있지 않은 데다 원작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도 다르게 만들었으며, <인터스텔라>나 <그라비티>를 생각하던 관람객에겐 실망을 안겨줄 연출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제목을 비롯해 생각 없는 번역들이 더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담담한 이야기 속에서, 영화판 컨택트는 원작을 새롭게 해석해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천천히 흐르는 그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담으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영화는 원작과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에 사실상 프리퀄 정도로 봐도 무색할 정도라서, 원작식의 해석보다는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의 해석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 이하 스포일러 ]
헵타포드와 인류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미확인된 거대 물체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것이 착륙했다 라고 표현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사실 이것들이 우주에서 날아와 착륙하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랬다면 나사에서 먼저 알아챘을 것이고 뉴스에서 대서특필 했을 것이다. 제목이 Arrival 이어서 착륙이라고 생각하고 한국 마케팅 회사에서 “그건 좀 별론데"라고 생각해서 예전 명작인 콘택트를 떠올릴 수 있게 컨택트로 지은 것 같다. 하지만 난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건 뒤에 설명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이 거대한 웨지감자 같은 물체와 그 안에 있는 생명체 헵타포드는 누구인가. 충분한 설명이 없어서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일단 그들은 문어와 비슷한 종족에서 진화한 생명임에는 틀림이 없다. 두족류처럼 생긴 형상, 7개의 다리, 먹물을 쏘는 능력, 헤엄치는 모양까지. 다만 그들은 아주 밀도 높은 대기 속을 헤엄치는데 그게 현재의 지구와는 다른 환경에서 사는 생물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실제로도 문어는 지능이 꽤 높은 편이다. 어쩌면 나는, 이 생물체들이 머나먼 우주에서 온 것이 아니라 지구의 먼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주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넓은데, 사실 외계인이 이 지구를 굳이 찾아와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인간 중심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헵타포드가 7개의 눈을 가졌다고 나오는데, 몸에 사방으로 눈이 나 있어서 그들의 몸은 앞이나 뒤가 따로 있지 않다. 그건 그들의 순환적인 세계관과도 일치한다.
이 생물체들이 지구의 미래에서 왔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많은 수수께끼들이 설명이 된다. 일단 헵타포드는 도착하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3000년 뒤에 있을 어떤 사건을 위해 자기들을 도울 수 있게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처음부터 ‘루이스를 데려와라!’라며 말을 할 수 있었을 테고, 어쩌면 그 정도의 과학기술과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면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먼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땅바닥에 내려앉지도 않고 이상할 정도로 가만히 관찰자처럼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어느 곳에 갔을 때 그렇게 관찰자처럼 지켜보고 있는 이유는, 그곳에 최대한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할 때 하는 행동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가 해야 할 일처럼. 과거로 돌아가 잘못 밟아 죽이는 쥐 한 마리가 후세에 인류가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3000년 후의 인류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루이스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3000년 후의 미래에 특별한 돌연변이나, 어떤 실험으로 인류와 문어의 융합 등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새로운 지적 생명체가 탄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다. 혹성탈출에서도 원숭이에게 언어를 가르쳐 그렇게 지적인 수준을 높일 수 있지 않았던가. 인간이 소리를 내서 주변과 소통할 수 있다면 문어는 먹물을 내 뿜으로써 소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루이스에게 언어를 가르친 것은 3000년 후에 있을 헵타포드의 탄생에 영향을 주는 인물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설명이 된다. 그들은 미래를 볼 수 있다면서 어째서 폭탄이 터질 것을 방치해 두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동료 하나가 거의 생사의 기로에 있게 될 것을 알았음에도 말이다. 루이스와의 접촉이 그들의 삶에서도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 접촉으로 인해서 시간을 선형적, 인과적으로 해석하는 의식에서 헵타포드처럼 시간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 인과관계가 하나가 되어버린 의식을 경험하고 바뀌어간다. 여기에서 사실 감독이 제목을 Arrival로 한 이유를 느낄 수 있었는데, 외계 생명체가 ‘도착’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Arrival은 구어로 '탄생'이라는 의미도 된다. 어떤 새로운 생명이 현세에 도착해서 나타나는 것을 탄생이라고 생각한 의미 같은데, 루이스는 지금까지의 인류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Arrival이라는 제목이 걸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Contact라고 하면서 그저 ‘외계인과의 조우’ 정도로 영화의 철학이 축소되어버리고 말았지…
Arrival은 인간이 3차원+선형적 시간으로써의 1차원적 의식구조를, 다른 차원을 인식하는 존재로써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의식의 진화와 탄생을 담고 있다.
특히나 마지막에 헵타포드 우주선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이게 우주 저편에서 나타나 착륙한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열고 사라진 느낌을 준다.
종교적 상징과 오마쥬
그 과정에서 컨택트는 굉장히 여러 종교적 상징들과 이전 명작 영화의 오마쥬를 채용하고 있는데, 우선 12척의 괴물체가 그렇다. 12라는 숫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상징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큰 태양의 주기를 나눈 절기를 의미해서 신의 사도 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12달, 12 지신, 12 사도, 황도 12궁 등이다. 그들은 숫자를 사용해서 자신들이 1/12라고 나타내기도 한다. 그들은 아주 중요한 사도로써의 임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숫자이다.
7이라는 숫자는 그리스도교에서 완전함을 상징한다. 헵타포드의 다리는 7개이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눈 역시 7개이다. 소설 속에서는 단지 눈이 7개라는 것이 ‘사방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묘사로 나오지만 사실 7개의 눈으로 유명한 생명체는 요한계시록에 ‘하느님의 일곱 양'이다.
“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느님께서 온 땅에 보내신 일곱 영신이십니다. …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요한 묵시록 5장 6절~9절)
즉 성경에서도 7개의 눈을 가진 어린 양은 자신을 희생해 민족, 언어, 백성의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한다-라고 되어있다. 영화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들이 세상을 구할 희생양이라는 상징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폭탄테러 이후 그들의 우주선은 상공 몇백 미터 위로 올라가 버려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는데, 나중에 루이스 혼자서 갔더니 거기에서 착륙선이 내려와 루이스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 부분은 좀 노골적으로 ‘성모승천'에 대한 상징을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애초에 루이스와 신의 사자처럼 묘사된 헵타포드의 접촉으로 인해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것부터가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상상하게 하기도 하고, 홀로 하늘로 올라가 모선에 들어가는 부분에서 그녀가 헵타포드어를 미래와의 연계로 더욱 깨우쳐 자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부분에서, 실제로는 그들의 공기의 밀도가 높아서 마치 물 속이나 안갯속처럼 그려져 있지만 그 모습은 흡사 바로크 시대의 ‘성모승천’ 성모화, 혹은 ‘원죄 없으신 잉태’ 성모화를 연상시킨다.
루벤스의 '성모승천'중 일부
그것은 루이스가 새로운 능력을 잉태하고 미래와 과거와 현실을 조망하는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인류로써의 탄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헵타포드의 우주선은 인류가 상상하는 대로 옆으로 긴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길게 솟아있는, 비석 같은 모습이다. 이 모습은 SF의 고전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나오는 모노리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모노리스는 인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미지의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 주변과 맞지 않게 생긴 기이한 모습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물체라는 느낌을 준다. 여기서 우주선의 모습도 그러한 상징을 지니고 그러한 모습을 전해준다. 하지만 인류가 공격을 시작하자 가로로 눕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너희가 상상하던 대로의 외계인처럼 대해주겠다'와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단지 각도만 바꾸었을 뿐인데도 위협적인 느낌을 전해 준다. 그러한 거석 상징은 고대 문명에서 종교적 의미로 많이 등장하는 것이라서, 단순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스럽고 인간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많은 영화미술 부분에서 지블라브 백진스키(Zdzislaw Beksinski)가 느껴진다. 안갯속에 쌓인 곳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거대한 헵타포드, 천천히 흐르는 공간, 텍스쳐 등. 공포와 환상의 이미지를 전해주는 미술가로서 백진스키만 한 사람도 없어서 수많은 만화와 영화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한층 더 그 이미지를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문과가 세상을 구한다’라고 말한다. (이과가 세상을 구하는 것은 인터스텔라…) 여기에 감독은 불교적인 이미지도 차용했는데, 사실 이 영화가 나타내고자 하는 깨달음이 동양적 우주론에 있기 때문에 그건 필수적이었다. 사실은 불교적 가르침이 세상을 구한다가 더 맞는 말이다. 헵타포드의 의식세계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따로 없고, 삶과 죽음 또한 그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것은 그들의 원형 모양의 문자로 드러나고 그것은 곧 루이스의 사고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영화에서 보이는 헵타포드의 문자는 불교의 선(zen)의 상징과 굉장히 유사하다. 헵타포드가 전해준 능력으로 인해 루이스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모든 시공간은 루이스의 안에 있게 되고 그것은 동양사상에서의 순환과 윤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무엇이 과거이고 무엇이 현재인가. 무엇이 인이고 무엇이 과인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될 때 인간의 사고는 윤회의 순환고리를 넘어서서 해탈할 수가 있다.
서양적 사고관에서는 보통 미래를 안다면 현재를 바꾸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영화 ‘타임머신’에도 나왔듯이, 그것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타임머신’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살리려고 타임머신을 만들어 과거와 미래로 가지만 죽음을 막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인과의 흐름 속에 있는데, 연인이 죽게 됨으로써 타임머신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루이스가 살게 되는 삶과 고통들이 이어져서 미래의 헵타포드가 과거로 와서 능력을 전해준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루이스는 깨닫고 고통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영화 초반부터 나오는 슬픈 루이스의 모습과 목소리는 그것을 나타낸다.
깨달음과 선물
그렇다면, 단순히 인류가 미래를 조망할 수 있게 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가. 여기에 최초의 sf소설이라 할 수 있는 ‘플랫랜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플랫랜드'는 2차원에서 사는 스퀘어 씨가 3차원의 스피어를 만나 사고관이 변하고, 0차원인 포인트까지 경험하며 다차원에서의 경험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사실은 그때 계급사회의 풍자가 들어가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2차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3차원을 경험했을 때, 사고관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사실 우리는 3차원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주적인 의미로 보자면 고작 지구 표면에 붙어있는 2차원 생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인류의 다차원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는 과학자들도 있다.
인류는 3차원+선형적 시간 1차원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의 차원이 1차원인 ‘선'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가 그렇게밖에 보지 못하는 생물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시간에서도 차원이 여러 가지고, 공간을 이동하듯 마음대로 보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사고관은 완전히 바뀌어버릴 것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헵타포드는 시공간에 관한 물리법칙은 너무나 쉽게 이해하는데 반해, 오히려 간단한 수학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숫자 1/12를 굉장히 어렵게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 사고관의 변화라는 것은, 플랫랜드에서 스퀘어가 스피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영화에서는 헵타포드의 원형적 문자 체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사고관을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 언어를 이해하고 머릿속으로 사고할 수 있다면,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하나로 인식하는 사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수행을 통해 도달하려고 하는 열반의 경지에,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가능해진다니 얼마나 인류에게 있어서 큰 깨달음인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꽤나 많은 것을 암시한다. 아이와 즐겁게 노는 루이스의 슬픈 표정이 그렇고, 루이스의 대사들이 그렇다. 아이를 낳고 나서 말하는 “come to me"와 아이가 죽고 나서 말하는 "come to me"는 시작과 끝이 연결되고 과거와 미래가 하나 되며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영화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막에서는 다른 말로 해석해버려서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 아쉽다.
또 영화에서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선물(Gift)과 무기(Weapon)로 혼동하는데, 그렇게 번역하면 안 된다. Gift라고 하면 선물의 뜻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SF나 미스터리 물에서는 그것을 ‘특별한 능력'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염력이나 텔레파시와 같이 엑스맨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능력’ 말이다. (샘 레이미의 영화 ‘기프트'가 그렇듯.) 그것을 선물로 해석해버리는 바람에 마치 외계인이 인류에게 어떤 새로운 사고관을 단순히 아무 바램 없이 ‘선물'해주는 것 같은데, 실제 대사 내용을 보면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자기들에게 나중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전해주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선물’이라는 것은 애초에 대가성이 없는 것 아닌가.
사실 이런 '외계생명체의 무차별적인 침입'은, 서구역사에서 바로 그들이 해왔던 제국주의 역사의 거울일 뿐이다. 본인들이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침입, 식민지화, 수탈을 해왔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본인들이 바로 그것에 큰 두려움을 느끼고 외계인을 그렇게 바라보며 소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SF영화는 작가가 동양인(테드 창)이어서 그런지, 불교적 사고관을 지닌 내적인 깨달음을 전해주는 영화다. 사실 여기에서 그들은 누구이고 왜 왔는가를 계속해서 인간들이 되묻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보게 된다면 나와 타인의 인과도 함께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한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을 얻으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의 내면의 두려움을 타인에게 비추어 공연히 살생과 살육을 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현재를 고통받을 필요도 없다. 그것이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 즉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기도 하다.
내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보게 되는 것, 내 인생의 큰 흐름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 그 이야기를 깨닫고 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