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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May 31. 2022

<세브란스:단절> 신과 인간의 단절

직장용 자아의 탈출기

<파친코> 덕분에 애플 TV+ 서비스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다. 나도 한참 망설이다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 여기서 드라마화되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었다. 그러다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남우조연상, 각색상 3관왕을 받은 <코다>, 에미상 2관왕인 <테드 라소>등 질적인 면에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가입을 했다. 물론, 가입하고 나선 <파친코>를 먼저 보았다. 그건 역시 최고였다.


하지만 그 뒤, 애플 TV+에서 무언가 볼 것이 없을까 하다가 눈에 띈 것이 <세브란스: 단절>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미 기본적인 내용 구조가 돌고 있어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영상으로 예고편을 보니 스타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파친코를 보고 나서 애플 TV+에서 뭘 볼까 망설이는 사람들은 꼭 이것을 보길 권한다. 시즌1이 끝난 지금, 파친코와 같이 올해 최고의 미국 드라마로 꼽히지 않을까 예상되는 작품이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8%, 관객 점수 93%)


이 드라마의 연출은 코미디언 겸 감독 벤 스틸러다. 벤 스틸러는 다수의 코미디 영화들과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주연이자 감독으로 유명하지만, 공동 연출인 아오이프 맥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인데, 뮤직비디오 Jon Hopkins - Open Eye Signal 와  U2 - Every Breaking Wave를 만든 뮤직비디오 감독이고, <세브란스>가 첫 드라마 연출이었다. 뮤직비디오 스타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드라마 <세브란스>에서 보이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롱테이크 장면들은 그녀의 영향인 듯하다.



단절(세브란스) 시술

이 드라마의 주 소재는 세브란스라고 불리는 단절 시술이다. 한국인은 '세브란스'하면 먼저 '세브란스 병원'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세브란스(Severance)'는 '단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헷갈려할까 봐, 한국 제목을 <세브란스: 단절>로 지은 것 같다.


주인공 마크는 '루먼(Lumon)'이라는 기업에 다니는데, 이 기업에는 '단절'시술을 한 사람만 일할 수 있는 '단절층'이라는 곳이 있다. '단절'시술이란, '단절층'에 가면 거의 모든 기억이 지워져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는 시술을 말한다. 즉 이 시술을 받으면, '단절층'에서의 나와 외부의 내가 나눠지게 된다. 외부의 나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는 셈이고, 직장에서의 기억은 없다. 그러나 단절층에서의 나는 회사 내에서 깨어나, 퇴근하자마자 출근하게 되는 삶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기억은 곧 인격이다. 과거의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회사 내의 자신(이니 :Innie), 회사 밖의 자신(아우티: Outie)의 자아는 나눠져,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한쪽은 끊임없이 일을 하고, 한쪽은 일한 기억이 없는 삶. 퇴사하려면 아우티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니의 삶을 모르는 아우티는 쉽게 동의를 해줄 리가 없다. 이 드라마는 그러한 설정을 두고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순응하는 사람, 포기한 사람, 끊임없이 순응하지 않는 사람.



마크로 데이터 정제부서

위의 설정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도는 이 드라마의 설정이어서 난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1화부터 마크의 밖에서의 삶이나 외부의 이야기, 단절 시술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나온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단절 시술이 비인격적이며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크는 그런 시술에 자원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던 아내가 큰 사고로 죽었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내를 잊고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를 전혀 모르는 마크의 이니는, 신기하게도 단절층에 아주 잘 적응해 나가는 인물이다. 성격이 원래 그럴 수도 있지만 스스로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받아들여 버린 것이다. 그 층에 있는 일하는 사람은 전부. '단절'층에서 일하는 이니들은 모두 아우티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들어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마크가 있는 '마크로 데이터 정제'부서에 새로 들어온 헬리는 다르다. 그녀도 기억을 잃었지만, 타고난 기질이 레지스탕스인 듯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단절층의 기묘한 일, 명령, 구속에 저항한다. 조용하게 잘 지내던 회사의 단절층에 파문이 일어난다. 그녀로 인해 꼬리를 물고 그들은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조금씩 해보게 된다.


또한 밖에서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마크의 이니와 같이 일했던 피티의 등장이 그것이다. 피티는 단절 시술을 복구하고, 회사와 집으로부터 도망친 사람이다. 그는 그 시술을 복구하고서 이니와 아우티의 인격과 기억이 합쳐지면서 계속 혼란을 겪는다. 아우티 마크는 그의 존재 때문에 삶이 흔들린다.



기묘하고 긴장감 넘치는 연출

드라마 <세브란스>는 시종일관 기묘한 연출을 해 놓았다. 일단 단절층 공간은 시대를 알기 힘들게 되어있다. 브라운관 모니터, CD플레이어를 이용한 영상 감상, 굉장히 클래식한 컴퓨터와 사무기기들. 그렇기 때문에 카드키를 제외하고는 디지털이 완전히 제한되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흰 벽의 통로들, 직원들이 하는 일도 도무지 무엇을 위한 일인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다른 부서와 만날 수 없게 되어있어서, 서로 경계하며 생겨버린 무성한 타 부서에 대한 소문들.


거기에 그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은 때리거나 살인하는 것도 아닌데 쳐다보거나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긴장과 공포를 자아낸다. 그들이 받는 최고의 벌은 '휴게실'에 들어가는 일이고, 최고의 상은 '상담'을 받는 일이다. 휴게실과 상담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보면 정말 별 일 아닌데, 별 일 아닌 것들을 별 일로 만들어버리는 연출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선 그동안의 미드들이 보여준 것처럼 선정적인 장면들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최고의 드라마>라는 찬사를 벌써 시청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하지만 시청자의 성향에 따라서, 이런 연출을 지루하다고 느낄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시나리오도 마지막 회차를 가기 전까지 대체 왜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건지 계속되는 떡밥만 뿌려지고, 알 수 없는 일들만 계속되니 말이다. 그 긴장감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회차에서는 엄청난 힘으로 폭발시켜버린다. 결말을 보면 시즌2가 왜 왜 아직 안 나왔냐며 탄식을 하게 되지만.



신과 인간의 단절

재미있게도 이 드라마는 종교적인 신과 인간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회사 안에서 태어난 이니는,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는 경영진과 스피커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경영진은 관리직에게도 사원들에게도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스피커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오로지 대리인을 통해서만 말한다. 이 모든 상황은, 인간이 신과 단절되어 직접 소통을 하지 못하고, 대리인(사제)을 통해서만 소통하는 현대 종교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들을 관리하는 관리직의 코벨은, 경영진과 회사에 대한 사랑이 거의 광신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거의 모든 종교나 신화에 의하면, 신은 인간과 직접 소통을 했다. 그러나 적어도 기원후가 되면 그것은 사제나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고, 일반인들은 그 뜻을 알 수 없게 된 것 같다. 줄리언 제인스는 저서 '의식의 기원'에서, 인간은 과거에 뇌 양쪽이 소통하는 것을 신의 목소리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교량이 단절되어 들을 수 없다고.


성경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괴로운 것은 '신과의 단절'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예수도 인간이 됨으로써 그 '단절'을 경험하여, 인간으로서 고통을 느낀 것이라고 한다. 부처도 인간계와 윤회를 넘어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고서야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밖이 있다면, 그곳에서 실제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왔을까?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실제 세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닐까? 이 세상을 만든 신은 왜 우리에게 아무 말이 없을까?


드라마 <세브란스>에서는, 이런 현실과 그 너머의 세계, 인간과 신, 나와 참나(진아)의 단절을 '직장에서의 시술'이라는 형태를 빌려서 표현한다. 특히 드라마 내에서 흔해빠진 자기 계발 서적 책의 구절들이 마치 성경처럼 이니들의 가슴에 팍팍 꽂히는 부분은, 신과 단절된 현실세계의 종교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관리자 코벨에게 마크가 면담을 하다가 나갈 때, 마크는 문을 닫을지 열어둘지 물어본다. 여기에서 코벨은 '양쪽 다(Both)'라고 답하는데, 이것은 경영진과 사원들,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잘 표현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세브란스: 단절>은 아직 시즌1 뿐이지만, 현대인의 삶에 대해 많은 부분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갈 수록 이니가 진짜 나인지 아우티가 진짜 나인지 알기 힘들어진다. 서로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두 인격 사이에서, 둘은 서로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또 현실을 살고 있는 나는, 진짜 나의 모습을 알고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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