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사회과목 선생님은 나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당시에 나는 교내에서 그림으로는 1등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꽤나 유명했지만, 그런 제안은 처음이라 살짝 당황했다. 만화가로 데뷔하는 것만이 나의 진짜 목표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러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스승이 일본어 교재를 내려고 하는데, 삽화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교재 삽화가 아니라, 한글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교재였다. 몸동작으로 내용을 이해시켜야 하는 방식인데, 그러려면 나처럼 만화를 잘 아는 사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유명한 잉글리시 리스타트와 아주 유사한 책이었다)
자세히 듣고 샘플을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집안이 넉넉지 않아서 등록금 등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정식으로 계약서를 쓴다고 했다. 방과 후 그분의 집으로 찾아가 산더미같이 쌓인 책의 원고를 보며 나는 계약을 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경력은 중학교 때 시작되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대학교 가기 전에 돈을 받을 수 있었고 등록금에 보탬이 되었다. 하지만 책은 출간되었는지 아닌 지 안타깝게도 알 수 없었다.
그림으로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으니 그때부터 계산하면 프리랜서는 햇수로만 벌써 28년, 정식으로 프리랜서로 일을 한 것은 22년이 된 셈이다. 회사를 중간에 다니긴 했지만 그 기간은 4년 정도로, 프리랜서 기간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다. 그동안 나는 특정한 전문분야라기 보단, 일러스트, 만화, 애니메이션, 모션그래픽, 영상 편집 등 내가 작업할 수 있는 것들은 무작정 해 왔다. 사실 이 분야를 계속해서 할 생각이 없었기에 끌려오듯 그때그때 부딪히면 해내는 삶이었지만, 어느새 그런 나에게도 경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게 되었다.
내 나이쯤 되면 대부분의 경력자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CEO가 되던지, 전문 분야의 책을 내던지, 대학 교수, 학원 강사 등으로 일을 한다. 디자인 분야에서 나처럼 40대에 들어서도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을 까 싶다. 그리고 나는 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툴을 학원이나 책을 보고 제대로 익혀본 적이 없으며, 디자인 관련 학교도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었고, 독학으로 더 능력을 키우려 하기보단 일에 치여 생을 깎아 살아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일은 그저 원래 그림을 잘 그리고 만화를 좋아하던 감각과, 현장에서 배운 것들이 전부였다. 어느 날 문득, 만화를 좋아하는 난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용병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정식으로 몸담고 있는 군대도, 섬기는 군주도 없고, 오로지 그때 그때 살아남는 기술만 익혀 목숨을 이어가는 용병. 20살에 그런 캐릭터를 좋아해 아이디로 삼았는데, 어느새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불멸의 용병: 만화 <베르세르크>의 불법복제판 제목이다)
그래도 내가 무엇하나 이룬 것이 있지 않을까? 이 분야에서 후배들에게 무언가 남길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바로 내 삶 그 자체였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바로 전선에 뛰어들어 지금까지도 틈새시장 디자이너 프리랜서로 먹고살고 있는 그 삶. 생각해보면 내가 일하는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아니지만, '프리랜서 디자이너'그 자체로써는 어느새 전문가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프리랜서(Freelancer)의 어원은 용병 창기병(Lancer)이다. 중세시대에 마상 창기병 시합이 유행했는데, 귀족들은 자신을 대신해서 돈받고 시합을 해 줄 용병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프리랜서다. 지금도 정해진 고용주 없이 능력만 가지고 단기적으로 이곳 저곳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일하는 사람을 프리랜서라고 한다. 역할은 중세시대의 용병과 같지만, 피를 흘리지 않을 뿐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실제 피를 흘릴 수 있다.
나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먼저 알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만들어 놓은 것들은 덧없이 사라져 가는데, 내 안에 있는 경험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써 살아왔다. 그리고 디자이너가 아닌 새로운 분야로 도약을 시도하는 지금, 한번쯤 정리해두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어떤 삶을 사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리했다. 프리랜서로써의 경험 뿐 아니라, 사회 초년생의 경험과 직장생활 등의 경험도 같이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