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시모프 Aug 09. 2021

저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발적 노예가 되어버렸던 사회 초년생

"무엇이든 그림 그리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2000년이 되던 해 갓 20살을 넘긴 나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산업기능요원을 뽑는다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마초적이지 못한 성격으로 군대에 두려움이 컸던 터라,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2000년도 당시는 IMF 이후 IT벤처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날 때였고, 내가 가게 된 회사도 그런 회사들 중 하나라고 들었다. '플래시'라고 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프로그램을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난 PC로 포토샵만 겨우 다뤄봤을 뿐이라서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캐릭터를 만들고 애니메이션 하는 게 일이라 해서, 부랴부랴 대학교 입학 때 썼던 포트폴리오와 학교 과제들을 들고 찾아갔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업무와 아무 상관없는 작업물들이었지만.

그 회사는 아파트 단지 안쪽 구석에 있는 상가건물 꼭대기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뭔가 컴퓨터들은 어지럽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자리는 비좁고 안에 휴게실처럼 생긴 방에서 다들 모여 밥을 먹는, 초라한 옥탑방 사무실이었다. 벤처회사라는 것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갓 대학교 졸업한 사람들이 모여 패기 있게 작은 사무실에 모여 시작하는 뭔가 로망이 있는 모습을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구렸다. 지금 20년 동안 여러 회사에 회의를 하러 가 봤지만, 아직도 그런 곳은 못 봤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경력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내가 일 하면서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면 어떤 허드렛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난 되지도 않는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그걸로 그림과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뽑혔다. 내 생각엔 포트폴리오보다, 나라는 사람이 이사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안심이 되었던 건, 이사라는 사람이 보여준 회사의 비전과 플래시라는 툴이 가진 미래, 그리고 그들이 가진 진지한 열정 같은 것이었다. 플래시는 액션 스크립트라는 코딩을 쓰기 때문에, 프로그래머로써 취업하면 산업기능요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난 자리에 앉아서, 생전 처음 보는 와콤 타블렛 (펜으로 마우스처럼 옆에 두고 그림 그리는 입력장치)으로 간단하게 연습을 시작했다. 하지만 색감이나 그림 그리는 방식 모두가 생소해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회사 선배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플래시 웹사이트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당시는 마시마로도 나오기 전이었어서, 내가 생각하는 웹 사이트는 그저 글씨가 반짝이는 정도의 무언가였다. 그런데 막 뮤직비디오처럼 움직이고 애니메이션 되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하지만 당시엔 내가 그 일을 20년 동안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지...


그런데 다음 출근부터, 그 회사는 이사를 간다고 했다. 회사를 합병했다는 것이었다. 직원으로 뽑히자마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사실 이 회사는 강남에 있는 어떤 작은 회사의 플래시 연구 부서로 합병이 되어가는 상태였고, 산업기능요원 T.O. 는 그 회사에서 주는 것이었다. 즉 나는 이 사람들의 직원이 아니라, 실제적으론 알지도 못하는 그 회사의 직원이 되어야 했다.


웹드라마 <좋좋소>의 신입사원 근로계약서 장면. 다니는 회사와 계약서의 회사 이름이 다르다.


여기에서 내가 사회경험이 있었다면 여기서 뭔가 쎄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는데. 어쩐지 뽑겠다고 하고선 근로계약서를 안 쓰더라. 이사를 가서 보니, 그곳은 강남인데다 작은 건물이긴 하지만 꽤 번듯한 사무실이었고, 파티션과 업무 부서 등이 제대로 갖추어진 '진짜 중소기업 회사'였다. 그 한쪽 구석에 우리는 짐을 풀고 들어가 연구부서가 되었다. 거기서 사장님이라는 분을 처음 만나서, 근로계약서를 썼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산업기능요원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어보니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리고 나는 산업기능요원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증인 '정보처리기능사'자격증도 없었다. 그만큼 난 불리한 입장에 있었고, 사장은 나의 그런 심리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에게 말도 안 되게 턱없이 적은 500만 원을 연봉으로 제안했다. 참고로, 당시 IT계열 신입사원 연봉은 대략 1600만 원 정도였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산업기능요원이라고 해서 월급을 일반 사원보다 적게 주는 건 노동부에 신고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대 가기 싫으니까.


나는 여기가 아니면 군대를 가야 할 것이라는 압박이 심했고, 군인들 월급은 그것보다 적다는 사장의 말에 수긍했다. 그리고 아무 경력도 자격증도 없는 나를 산업기능요원이 될 때까지 '키워준다'는 말에 넘어갔다. 나는 그 엉터리 계약서에 사인했다. 하지만 난 집이 남양주였고 회사는 강남이었다. 며칠 다녀보니 출근하기 너무 버거웠다. 그래서 회사에서 이불 깔고 자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학교 과실 바닥에서 잠을 자면서 공부했던 터라, 그런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열정은 사회에서는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내가 회사에서 자고 있다는 걸 안 사장은, 월급을 좀 올려줄 테니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당시 고시원은 12~20만 원 정도였고, 그걸 감안해서 월급을 무려 60으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사장님의 엄청난(?) 배려에 감동해서 회사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나는 꼴사납게도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저를 써주시고, 또 가난해서 집도 못 구하는 저를 위해 월급을 무려 20만 원이나 올려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장님에게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사장님은 나를 토닥여주셨다. 나는 그런 엄청난(?) 배려를 해 준 회사에 몸 바쳐 일할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회사에서 산업기능요원은 커녕 말도 안 되는 투자자들 눈요기용 작업만 하다가 9개월 뒤 그만두고 말았다. 들리던 얘기로는 나를 뽑은 그 연구팀은 다시 다른 회사로 팔려나갔다 한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첫 회사를 들어가게 된 이 일련의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과정들은, 정말 회사에 들어간다는 것이 뭔지 알지도 못하는 사회 초년생의 헛짓과,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를 이용해 먹으려는 기업인들의 콜라보였던 셈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구직 사이트나 모임, 블로그 등이 많아서 정보를 구하기가 쉽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직업을 구한다면, 다음을 꼭 염두해 두어야 한다. 취업이 아니라 창업, 프리랜서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시작하자.


이게 무슨 당연한 말인가. 하지만 보통 막연하게, '일단 시작하면 될 거야'같은 식으로 취업이나 창업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취업. 창업 방식이나 직업군의 연봉, 또는 국가에서 받는 지원 등 다양한 것들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을 파악해놓지 않으면 대체로 굴려 먹히다 팽당하거나, 받을 수 있던 다양한 혜택을 받지 못하기 십상이다. 나 역시 최소한 산업기능요원이 과연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뽑히는 건지, 월급이나 페이는 어느 정도인지, 그 직업이 실제로 하는 일은 무엇인지 등을 알고 시작했어야 했다. 내 초창기 사회생활에 저런 사기를 당한 것은, 나를 등쳐먹으려던 이사나 사장 탓도 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라는 식으로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내 탓도 있다. 알았으면 그런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겠지.


또, 법적인 부분을 알아놓는 것도 중요하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노동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수당은 안 받아도 되는 것인지, 세금은 어떻게 내고 어떻게 환급받는 것인지 등이다. 이런 것들을 알고 들어가더라도 실제로 부딪혀보기 전에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아예 모르고 시작하는 것보단 낫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건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의외로 사람들이 꼼꼼하게 챙겨 파악하고 분석하고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리저리 나중에 닥쳤을 때 알아보다가 망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초년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요새는 대학 졸업반에서 노동법 관련부터 회사 예절까지 다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모든 걸 다 배울 수는 없다. 스스로 찾아보고 공부하고, 그리고 시작하자.




회사를 그만둔 나는 산업기능요원이 되기 위해 이미 휴학까지 한 상황.

다른 회사를 구하며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전 01화 프리랜서란 무엇인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