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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May 16. 2022

고요함과 따스함의 밤 골목

산책이 즐거운 동네

산책은 내가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다. 그저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 그 사이에 놓여있는 온갖 물건들과 건물들과 간판들과 사람들이 뭉뚱그려 얽혀있는 골목길을 걷는 것. 5살 때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잠실부터 경동시장까지 오가던 나는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일에 지쳐 살다 보면, 산책은 산책이 아니라 'A와 B사이 최단거리를 구하시오'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한 골목길에서도 최단거리로 가려고 내가 꺾을 모퉁이까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갔다. 마음이 지치면 주변은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 내가 다시 산책의 즐거움을 찾은 것은 바로 이 동네, '성남 구 시가지'에 이사 오면서부터다. 그즈음 처음으로 DSLR을 사게 되면서, 더욱더 재미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이 동네는 정말 재미있는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성남은 전통이 유구한 도시라기 보단, 한국전쟁 이후 거의 허허벌판 언덕이었다가 박정희가 청계천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키 만들어진 도시다. 신도시 같은 거창 한 건 아니었고, 청계천 주변 사람들을 서울 밖으로 집도 없는 곳에 내쫓은 것에 불과하지만. 하지만 그래서 더 근대 현대 한국 건축이 마구 버무려져 있다. 60년대 국민주택부터, 초 현대식 건물인 성남종합스포츠센터까지. 바로 옆골목으로 옮겨 걸을 때마다 새로 발견하게 되는 그 신기한 삶의 냄새들이란!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으니, 처음은 우선 소소하게 4년 전 부처님 오신 날 산중에 있는 작은 암자에서부터 집으로 걸어왔던 길을 곱씹어 보려 한다.


가천대 뒤쪽에 있는 조그만 산인 영장산에는, 유적이 있는 작은 암자가 있다. 망경암. 이 산에 들어오기 전에 큰 절이 하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로 간다. 하지만 이 절의 좋은 점은 바로 노을이다.

이렇게 롯데타워와 서울 시가지가 멋들어지게 보이는 풍경에서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요 근래는 코로나 때문에 아예 출입이 막혀버렸다. 언제 다시 개방하려는 지 모르겠다.

가천대 뒤쪽 골목길은 어마어마한 경사를 자랑한다. 가천대부터 모란역까지 이어지는 고개는 그 각도가 어마무시하고 도로가 주택가를 따라 쭉 이어져 있어서, 마치 인셉션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런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올라가는 건지 내려가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지면, 어떤 길에는 가운데 유도등이 켜진다. 길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하지만, 길의 굴곡을 알 수 있어서 더 편하다.

해가 지고 캄캄해진 가게 앞에, 주차금지용으로 갖다 놓았을 법한 의자가 누워있었다. 보통은 의자를 그냥 세워놓을 텐데 왜 눕혀놨을까? 아. 여기서 세워놓으면 어디론가 굴러가버릴 테니까. 무릎을 꿇은 것은 이유 있는 모습이었다.

골목 안쪽 어두운 곳에 활짝 열린 문. 마치 이세계로 통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이한 풍경이었다. 유난히 밝은 빛을 내뿜는 문 안쪽은 무엇이 있는 걸까.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왔고, 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산성대로를 가로지르는 수성교 육교는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바쁘게 지나가는 차들을 보면, 나만 바쁘게 사는 게 아니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붉게 물들어가는 차도 위에, 한줄기 한숨을 쉬는 것으로 안심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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