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 제주
제주 공항의 문이 열리자, 잿빛 하늘이 머리 위까지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공항 앞은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과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짐을 끌며 서두르는 사람들로 뒤섞여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의 웃음이 스쳐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혼저 옵서예'라고 적힌 큼지막한 문구와 그 뒤로 보이는 야자나무가 이곳이 어디인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야자나무와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가 함께 있는 풍경은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지만, 제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이질적인 조합이 묘하게 제주스러운 분위기를 완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추위를 벗어나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로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조금 거리를 둔 채, 은주와 K는 아직 검은 아스팔트의 색을 잃지 않은 도로를 따라 택시 승강장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둘은 꼭 붙어 걸었고, 그들의 움직임엔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조심스러운 친밀감과 숨죽인 온기가 섞여 있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바람이 둘 사이로 불어닥쳤다. 은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K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K는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감싸며 다른 손으로 택시에게 손짓했다.
택시가 멈춰 서자, K는 먼저 뒷좌석 문을 열고 은주가 타는 것을 도왔다. 은주는 짧게 "고마워"라고 속삭인 후 자리를 잡았다. K는 택시 트렁크에 작은 가방을 싣고는 반대편으로 돌아 택시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바깥세상의 차가운 공기와 소음이 차단되며 작은 방처럼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차 안은 따뜻했고, 라디오에선 익숙한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히터 바람이 차가워진 얼굴 위로 덮이며, K의 안경알을 뿌옇게 만들었다. K는 머리 위에 쌓인 눈송이를 털며 기사님께 예약해 둔 숙소 주소를 불렀다.
"애월읍 금성리 쪽으로 가주세요. 감사합니다."
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그들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라디오 볼륨을 조금 낮추고 악셀을 밟았다.
택시가 달리기 시작하자, 차창 밖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다. 공항 근처의 넓은 도로와 빽빽한 건물들은 금세 사라지고, 이차선 도로 양옆으로 낮은 집들과 듬성한 돌담이 이어졌다.
풍경이 달라질수록, 둘의 마음도 조금씩 느슨해졌다.
섬은 원래, 사람의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곳이니까.
도착하는 순간부터 일상의 규칙이 서서히 흐려지고, 마음속 깊숙이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미세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곳.
제주의 낯선 빛과 공기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마음을 서서히 흔들고 있었다.
눈발은 조금 굵어졌지만, 여전히 도로는 젖은 상태로 유지될 뿐 쌓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은주는 K의 어깨에 기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제주에 눈 많이 올 거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비행기 안 뜨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K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살짝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와 단 둘이 만났고, 지금은 제주에 함께 있다.’
은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바깥의 냉기와 차 안의 따스한 공기가 뒤섞여, 그녀의 뺨에 옅은 붉은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 짙고 가느다란 눈썹.
모임에서 밝고 말이 많던 은주는 지금 유난히 조용했다. 창밖의 눈발보다 더 얇고, 더 섬세한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속에 머무는 듯했다.
“많이 걱정했어요?”
K가 조심스레 물었다.
은주는 창문 밖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그냥… 못 오게 되면, 아마 마음이 많이 어지러웠을 것 같아서.”
그 말의 의미를 K는 알고 있었다.
아니,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여행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그리고 가능해진 순간, 이미 마음의 선을 조용히 넘어섰다는 사실까지도.
K는 은주의 손등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은주는 천천히 손을 뒤집어 그의 손을 잡았다.
흔들리지도, 놓으려 하지도 않는, 그저 지금의 온도를 확인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때, 택시가 해안도로로 올라섰다.
탁 트인 바다 위로 황량한 겨울빛이 퍼져 있었고, 저 멀리서부터 하얀 눈이 쉬지 않고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로 옆 까만 해안선에는 회색빛 파도가 거칠게 부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땅 위의 풍경이 갑자기 달라졌다. 방금까지는 도로를 적시던 빗방울 같던 눈발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솜뭉치처럼 굵어져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와..." 은주는 탄성을 질렀다.
도로를 달리던 택시 기사도 속도를 줄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이구, 갑자기 확 내리네. 눈보라가 시작됐나 봅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잠해지고, 오직 와이퍼가 눈을 쓸어내는 소리만 일정한 리듬으로 이어졌다.
그 규칙적인 소리 사이사이로, 둘의 감정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